[특별연재] 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⑪전두환 편

“5공 철권통치가 대한민국 부도냈다”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박정희 시대의 수출진흥책으로 밀어붙였던 기업들이 우후죽순 손을 들기 시작했다. 화학, 엔지니어링을 영위하던 E그룹은 자금난에 봉착하자 매각의사를 밝혔다. 이 회사는 전 과학기술부 장관 출신이 경영했는데, 도저히 경영의 효율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마침 대우그룹은 화학업종이 전략상 반드시 필요했다. 미래의 기술발전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무한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학은 모든 그룹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최첨단(Cutting Edge)업종이었다.

은행감독원장, 총수 호출
“대통령 사돈 회사 좀…”


필자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지시를 받고 E그룹이 위치했던 여의도로 달렸다.

“3일 만에 인수를 끝내라.”

김 회장의 지시에 인수팀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하는 의구심을 안고 실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는 절대보안과 전광석화를 요하는 M&A 성격상 오히려 훨씬 효율적이었다. M&A는 절대 시간을 오래 끌고 비밀이 공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시간을 오래 끌 경우 경영권공백으로 종업원들 간의 불평불만이 극도로 달할 수 있고, 나아가 인수조건에 그들이 개입할 소지를 남겨 두기 때문이다. 또 비밀이 공개될 경우 그 물건을 탐내는 다른 포식자 혹은 탐내지는 않지만 경쟁그룹에 넘어가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다른 포식자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나타나거나 방해할 수가 있다.

3일만의 실사 끝에 당시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가공자산이 발견됐다. 실무적으로 인수불가였다. 하지만 전 장관 출신인 오너는 가만히 앉아서 부도 당하고 형사처벌을 감수할 수 없었다. 결국 5일 후 청와대의 전화 한 통화를 받고는 인수결정을 단행해 인수그룹의 비자금으로 피인수기업의 가공자산을 충당하고 모든 주식을 무상으로 양수도 했다. 주식을 무상으로 양수 받는 대신 기업을 살릴 자금을 투입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자금투입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주주에게 일단 양수대금으로 지급하고 그 돈이 다시 기업의 가공자산으로 충당되면 주주의 문제도 해결하고 가공자산으로 인한 기업의 세무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더러 기업회생에 필요한 자금원이 될 수 있다.

며칠 후 당시 ‘밤의 황제’로 불리던 은행감독원장이 김 회장을 호출했다. 은행감독원은 기업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은행들의 수장 격으로, 그 권한이 막강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원장은 대통령의 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어 기업들에겐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면담을 끝낸 김 회장은 그룹 기획조정실장에게 여러 장의 서류를 던져주고 D산업의 인수 검토를 하라고 명했다. 필자는 검토 결과 인수불가의 의견을 제시했다. 섬유를 제조한 D산업은 회사규모에 비해 재무구조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부실했다. 곧바로 회장, 기획조정실장, 실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골치 아픈 회의가 열렸다.

“실무자 의견은 인수 불가라는데 어떡하지? 그 원장이 보통 분이시냐. 대통령의 친구인데 나한테 신신당부하시는 거야. 꼭 인수 좀 해달라고.”

“회장님, 그 원장님이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 D기업에 신경을 쓰십니까?”

사실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달리는 호랑이도 멈추게 할 수 있는 최강 권력자인 그가 왜 조그마한 섬유기업의 부도를 막으려고 안달일까 하는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응, D산업의 오너의 장인이 바로 대통령의 군대선배인 K씨야. 대통령이 군대시절 평소 존경해왔던 K씨인데, 글쎄 그 사위가 D산업의 오너야. 지금 당장 부도인데 J은행이 부도 안내고 막고 있는 것 같아. 부도나면 그 사위 당장 감방이야. 그러니 K씨가 울고불고하는 딸의 애원을 외면 할 수 없어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아. 이거 어떡하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대통령의 철권시대에 이러쿵저러쿵 재고할 명분도 필요도 없고 할 시간도 없었다. 즉시 가공자산을 비자금으로 충당하는 방법으로 인수를 단행했다. 물론 무상의 주식양수자는 그룹과는 관계없는 차명으로 달아 놓았다. E그룹과 D산업을 인수한 후 전문경영인을 파견해 그룹과는 별도로 관리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흔히 얘기하는 그룹의 위장계열사의 태동이다. 대우, 삼성, 현대, 럭키, 선경 등 30대 그룹을 위시한 모든 대기업들에 공히 일어나는 정권교체기의 현상이었다.

이런 위장계열사의 태동엔 세 가지 동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첫째는 불가피한 경우다. 대통령의 하명으로 인수한 것인데 대부분 그룹의 경영전략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으로 공식적인 인수를 발표할 수 없다. 따라서 대통령이나 재벌총수나 모두 이를 숨길 필요가 있어 비자금으로 인수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자의적인 경우다. 그룹의 경영전략상 반드시 영위할 필요가 있는 기업이지만 대기업 윤리 및 도의상 영위할 수가 없는 사례다. 이런 경우 그룹의 시너지효과상 인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부득이 공식 그룹이름으로는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명으로 인수 관리한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지정하고 대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기 두 가지 동기 외에 오너의 재산 빼돌리기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다. 엄연한 그룹의 자금을 비자금화해 빼돌린 후 차명으로 기업을 인수 한 후 비밀리에 경영하는 것으로, 그룹에서 비공식적인 물량지원을 하기도 한다.

가명구좌 금지 시도
‘누구’반대로 무산


이같은 이유로 박정희 시대의 부산물인 부실기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삼성, 대우, 현대, 럭키, 선경 등을 비롯한 대기업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체가 불분명한 그룹의 위성회사 즉 위장계열사를 본의 아니게 거느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위장계열사의 태동에는 비자금 생성을 가능케 했던 가명구좌의 설치를 용인했던 대통령의 통치책임이 더 크다 하겠다. 당시엔 은행예금에 실명구좌뿐만 아니라 가명구좌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시 부조리와 부패의 원인이 되는 비자금의 온상인 가명구좌를 금지시키는 법률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누구의 반대 때문에 못했다고 한다. 그 누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 관심거리다. 대통령 자신일까. 아니면 측근의 권력자들일까. 또는 재벌총수들일까, 일반 중소기업자일까, 국민들일까. 가명구좌로 가장 혜택을 보는 이는 대통령, 측근의 권력자, 재벌총수들일 것이고 살기에 항상 허덕이는 일반 중소기업자들이나 국민들은 아닐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명구좌의 금지에 따른 경제의 위험성을 과대 포장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를 지하경제 80%, 지상경제 20%로 분석한 후 당장 가명구좌를 금지할 경우 지하경제 80%가 죽어버리고 우리나라 경제는 꺼꾸러진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였다. 이는 당장 없어져야 하는 가명구좌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다만 가명구좌의 예금이자를 무이자로 하는 불이익을 주는 선에서 입법을 마무리했다.

이미 자금세탁을 한 ‘눈 먼 비자금’이 그까짓 무이자를 무서워할 리가 없었다. 천방지축의 주인 없는 비자금은 그때부터 우리 경제와 관료의 부패를 만들어 내는 동인이 됐고 기업의 재무구조와 수익악화를 초래했다. 현금을 원가조작으로 빼내니 수익악화가 뻔했다. 매출액 대비 당기순이익율이 평균 4% 정도이니 만일 현금 1백억원을 빼냈다면 매출은 약 2천5백억원의 물량이 빠졌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기업의 재무구조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의 나쁜 신용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재벌 스스로가 재무구조를 좋게 포장시키는 이른바 분식행위가 성행했다. 반드시 해서는 안 되고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업의 최고화두가 ‘분식(粉飾)’이었다. 하는 순간 그 마약의 쾌감과도 같은 그러나 마약의 중독에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기업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분식의 한자를 분석해보면 ‘쌀을 가루로 만들어 화장하고 천을 식탁 위에 덮은 후 음식을 차려놓는다’는 뜻이다. 차려놓은 음식에 제3자들이 입맛을 댕기고 침을 흘린다는 것이다. 즉 ‘WINDOW DRESSING’이다. 겉만 잘 발라 꾸민 다음 진열대에 잘 걸려 있는 옷을 말한다.

분식의 성행으로 기업의 부채비율은 4백%이상 올라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분식의 관행이 후일 1997년 일어났던 우리나라 미증유의 IMF 외환위기 사태, 바꾸어 말하면 국제간의 지급불능인 ‘대한민국 부도’를 초래한 셈이나 다름없다.

현금 1백억 비자금화
매출 2천5백억 누락


역설적으로 이때 만일 전 대통령이 가명구좌의 금지를 시행했다면 아마 전 국민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던 국가부도 상태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부도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노숙자가 되고 했던 참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참한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면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행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우리 서민의 생명과도 직결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김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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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