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수사설' 포스코 사정 난항 막전막후

검찰 무리수?…벌써 출구전략 찾나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포스코 수사가 암초에 부딪혔다. 수사의 중심이 비자금 용처에 맞춰지면서 혐의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란했던 시작과 달리 벌써부터 '배임죄' 얘기가 나오는 등 사실상 출구전략을 찾는 모양이다. 첫 관문인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은 자신만만한 분위기다. 그 '윗선'인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는 갈 길이 멀다.

"언론이 대단한 것처럼 얘기 하는데 성진지오텍 건은 별 의미가 없다. 이미 과거에 한두 차례씩 의혹이 제기됐던 것들이다. 지금과 같은 '먼지털이'로는 안 된다. 수사가 잘되고 있는지는 '그곳'을 들추는가 보면 알 수 있다."

박근혜정부
레임덕 기로

포스코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지난 25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진행 중인 포스코 수사와 관련한 여러 에피소드를 전하며 언론에 친숙한 몇몇 이름을 꺼냈다. '영포회' '정준양' '박영준' '이상득' '이명박' 등등. 그러나 이 관계자는 "그 핵심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며 수사 과정에 의문을 표했다. "다른 대기업 수사와 비교해 속도가 너무 더디다"라고 주장했다.

앞서 관계자가 지칭한 '그곳'은 동양종합건설이다. 최근 사정당국은 "동양종합건설 배성로 회장을 출국금지했다"라고 발표했다. 동양종합건설은 인도 제철소 건설공사를 포함해 2009년부터 4년간 포스코에서 해외공사 7건을 따낸 것으로 파악됐다. 수주된 공사 규모는 2400억원에 달했다.

동양종합건설이 포스코가 발주한 공사에 참여한 시기는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의 재임 기간과 대부분 일치한다. 포스코 안팎에선 '정준양이 배성로와 사적인 친분 때문에 해외공사 수주를 밀어줬다'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두 회장님'은 포스코의 전신인 포항제철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이번 포스코 수사에 착수하면서 동양종합건설과 관련한 폭넓은 계좌추적에 들어갔다. 동양종합건설의 법인계좌와 배성로 회장의 개인계좌를 동시에 추적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 한 관계자는 "정 전 회장보다 그의 측근인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과의 금전 거래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비자금을 조성했더라도 정준양 측에게 직접 전달했을 가능성은 낮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관련 부분까지 확인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방 언론사 사주를 겸직한 배 회장은 대구·경북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힌다. 정·관계에도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이명박정부 시절 '배 회장의 인맥'으로 불렸다. 포스코 내부에선 '올 것이 왔다'라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포스코 잡도리
동양종건 관건

사정권에 들어온 동양종합건설은 펄쩍 뛴다. 해외공사 수주 특혜나 비자금 조성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배 회장 측은 "(포스코를 믿고) 해외공사에 참여했다가 오히려 손해를 봤다"라며 "포스코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이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배 회장과 이른바 영포회 간의 커넥션 의혹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해외사업 기준 2010년 20억원대 매출을 올렸던 동양종합건설은 이명박 대통령 퇴임 무렵, 무려 6배 이상이 증가한 매출 신장을 기록했다.

특히 동양종합건설은 국가가 발주한 관급공사에서도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4대강 공사 당시 낙동강 5개 공구 가운데 3곳에 입찰했고, 3곳 모두 계약을 따냈다. 30공구에서는 공사를 책임진 포스코건설과 호흡을 맞췄다.


지난 정권에서 동양종합건설은 일종의 '금기어'였다고 한다. 'S라인'(서울시 공무원 출신)으로 힘의 결이 다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쪽이 황보건설과 가깝게 지냈다면 영포회 쪽은 동양종합건설을 비호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로써는 검찰 수사의 방점이 정·관계로 흘러간 비자금 확인에 있는 만큼 관련 주장의 진위 여부가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동양종합건설을 온전히 수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검찰 관계자는 "영포회 내부 결속이 강해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역공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영포회를 오랫동안 취재해 온 한 포스코 출입기자는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취재원들이 배 회장을 '대구의 박연차'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지난 정권 입장에서 동양종합건설은 드러나선 안 되는 '저수지'다. 여기서 말하는 저수지는 돈이 고여 있는 곳이다. 자원외교 비리 혐의로 수사가 진행 중인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보다 배 회장에 대한 수사가 훨씬 민감하다고 전해진다. 이는 수사 첫 개시를 동양종합건설이 아닌 성진지오텍으로 했던 이유로 추정된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하면서 성진지오텍조차 바로 겨누지 못하고 포스코 동남아사업단을 우회했다. 지난 2월 포스코 수사를 앞두고 만난 사정기관 관계자는 "명분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 "묵은 비리를 들춰내겠다는 것인데 '의도'는 있지만 '계기'가 없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검찰의 고민은 압수수색을 위한 구실 찾기에 있었다.

동남아 비자금 규명 암초 "속도 더뎌" 
동양종건 배성로 회장 출금 '승부수'
기획은 청와대가 수습은 검찰이?

포스코에 대한 사정작업은 올 1월 초 시작됐다. 앞서 검찰은 포스코 내부 관계자를 통해 포스코 안에서 일어난 동남아사업단 감사 결과를 접했다. 이를 '크로스체킹'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정보가 샜다. '정준양 체제'에 반감을 갖고 있던 일부 인사들은 신문기자와 접촉했다. 유명 언론매체가 취재에 들어가자 포스코로부터 '억대 인사'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 과정에서 기자도 은폐된 감사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지난해 8월 포스코건설 상무급 간부 2명이 베트남 파견업무(고속도로 공사) 중 보직해임 돼 한국으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이다.

당시 복수 경로로 전해진 비위 사실과 사건 개요는 이랬다. 두 박모씨(모두 구속)는 2010∼2012년 포스코건설이 운영 중인 동남아사업단에서 100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 직원 10여명과 공모해 하도급 대금을 부풀리는 수법을 이용했다. 1인당 20억원씩 백머니(뒷돈)를 챙겼고, 남은 돈은 어디론가 상납했다. 두 박씨는 즉시 귀국했다.

이제부터 본 게임
정동화 구속 고비

그러나 포스코는 별도 조치 없이 이들을 대기발령 상태로 놔뒀다. 올 초 정기인사에서도 비상근 임원직을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포스코 측은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상무인 권모씨를 동남아사업단으로 급파했다. 한 가지 수상한 점은 전임자인 두 박씨와 후임자인 권씨 모두 '정동화의 측근'으로 통했다는 것이다.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은 이번 수사에서 정 전 회장만큼이나 비중 높은 인사로 거론된다. 검찰은 '양정(정준양·정동화)'의 구속을 통해 '대기업 사정'을 '영포회 게이트'로 확대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지난 26일에는 포스코건설 토목환경사업본부장인 최모 전무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사실이 알려졌다. 최 전무는 두 박씨가 베트남법인장(동남아사업단)으로 일할 당시 한국 본사의 담담 상무였다. 두 박씨가 만든 돈이 최 전무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정 전 부회장에게 갔다는 주장인데 이와 관련 검찰은 "우리도 밝히고 싶은 부분이다"라며 "최 전무의 비자급 상납 여부를 알아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우선 검찰은 비자금으로 확인된 107억원 중 47억원가량이 하도급업체를 거쳐 국내로 반입됐고, 이 과정에서 최 전무가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속된 두 박씨는 비자금 조성 및 전달 혐의에 대해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지만 최 전무는 '꼬리'일 뿐이라는 게 검찰 안팎의 주된 시각이다. 비자금 상납에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김모 전 부사장 등 연결고리는 최소 대여섯명에 이른다는 것이 검찰의 조심스런 설명이다. 때문에 정 전 부회장까지 복잡하게 얽힌 자금흐름은 단박에 규명될 가능성이 낮다.

그 윗선인 정 전 회장과 더 윗선인 친이계 인사까지 가려면 못해도 한 달은 넘게 수사가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그야말로 '구름 같은 이야기'다. 차라리 자원외교나 방위사업 비리 수사에서 이 전 대통령의 책임론이 대두될 확률이 높다. 포스코 수사가 처음 의도했던 바가 무엇이든 일부 언론이 추측하는 것처럼 MB를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지난 2월26일 <세계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박근혜정부는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포스코를 비롯한 대기업 사정이 핵심 과제였다. 이 총리는 지난 12일 대국민담화를 통해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총리가 판을 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7일 화상 국무회의에서 "비리의 뿌리를 찾아내 뿌리 덩어리를 들어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가 벌려 놓은 기획은 검찰이 실행하고 있다. '기획수사'인 탓에 여론전은 하지만 수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검찰은 지난 2월부터 '내부 고발자'를 찾아왔다. 수사 과정은 물론이고 재판 과정까지 '양정'의 비리를 일관되게 진술해 줄 핵심 증인을 구했다.

증거는 있나
선심성 봐주기?


그러나 포스코 안팎의 상황을 지켜보면 그 같은 조력자가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당장 언론은 포스코가 쏟아내는 홍보기사에 잠식됐고, 일부 검찰 관계는 수사 정보를 포스코 쪽에 넘기고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두 박씨를 포함한 사건 관련자들에게 '플리바게닝'을 적용할 것이란 관측이 나돌고 있다. 그들의 '입'을 열지 않고는 더 이상 수사를 위로 뻗어나갈 수 없어서다. 현재 수사팀 밖에서는 비자금 용처 규명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정준양 개인에 대한 배임죄 적용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정준양체제 당시 포스코가 인수한 부실기업 쪽으로 언론의 초점을 바꾸려는 시도다.

지난 정권 당시 검찰은 배임건과 관련한 의혹을 모두 묵살했다. 이제 와서 묵은 비리를 재수사하면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을 자인하는 꼴이다. 지난 27일 오후 검찰은 정 전 부회장의 자택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다급한 검찰의 승부수가 통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angeli@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