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이번엔 다를까’ 이병호 신임 국정원장

당장 급한 불 껐지만…산 넘어 산

[일요시사 사회팀] 박창민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의 수첩 속에 더 이상 새롭게 발탁할 만한 인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신임 국정원장에 이병호(74) 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을 깜짝 지명했다. ‘돌려막기’ ‘올드보이 귀환’ ‘불통’ 등 현 정부 인사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란 비판이 제기된다. 과거 그의 전력을 본다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지난 19일 국정원 개혁이라는 과업을 안고 이병호 제33대 국가정보원장이 취임했다. 이 원장은 국정원 개혁에 대해 이미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19기)를 졸업한 뒤 26년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와 외교부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196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정보학교 교관, 미국 태평양정보학교 통역장교를 거쳐 1970년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임용됐다. 1980년 7월 중령으로 전역했고, 1981년 1월부터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국가관 확고” 
“정치색 강해”
 
그는 ‘관운의 사나이’로도 통한다. 19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사돈이었던 김정원 전 안기부 제2차장이 취임 3개월 만에 석연찮은 이유로 물러나면서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됐다. 이후 1996년 12월까지 4년여 동안 안기부 제2차장을 지냈다. 그가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면서 퇴임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과 당부 등을 남긴 장문의 편지는 국정원 내에선 유명한 일화다. 
 

안기부에서 나온 후에는 1997년 1월부터 10월까지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2000년 8월까지 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관 특명전권대사를 지냈다. 2003년 9월부터는 울산대학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2007년에는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외교정책자문단으로 활동했다.
 
1940년생인 이 원장은 그동안 정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다만 대학교수 신분으로 언론사에 기고문을 발표해 국정원 개혁과 관련된 소신을 피력해왔다. 그는 2013년 한 일간지에 ‘언제까지 국정원도 권력기관인가’라는 글을 기고하며 “선진국 어느 나라도 정보기관을 권력기관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 정무 기능을 과감히 정리하고 국가안보 사안에만 전력도록 업무 집중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 재판 1심에서 관련자 전원이 실형을 선고받는 등 국정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이를 경계하는 기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국정원을 몹쓸 기관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건 국정원 개혁 의지를 약화하고 안보체계의 근간을 흔든다”며 “국정원의 정보역량 강화를 지원해야 할 정치권 일각이 이런 분위기에 동조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정원의 정상적 업무 수행에 반드시 필요한 통신비밀보호법·테러방지법·사이버테러방지법 등이 몇 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며 “전 세계에서 휴대전화 감청을 못 하는 정보기관은 대한민국 국정원이 유일하다. 국정원의 손발이 묶여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해외 정보기관을 벤치마킹해 국내·해외 업무를 독립 조직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6월 이병기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정원장으로 지명된 직후 쓴 기고문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이스라엘 등 선진국은 해외 파트와 국내 파트를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전담토록 하고 있다”며 “한국만이 이 두 기능을 통합해 운영하고 있다. 해외·북한을 담당하는 1차장 산하와 국내를 담당하는 2차장 산하를 사실상의 독립된 부서로 분리·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그는 2010년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의 활동을 소개한 책 ‘기드온의 스파이’를 번역·출간하며, 모사드를 ‘교과서적인 정보기관’이라 평하고 “우리나라 정보기관에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원장의 세 아들과 며느리, 손자·손녀 등 12명 가운데 7명이 미국 시민권자(4명) 또는 영주권자(3명)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 들어 ‘이중국적’논란을 부른 사례로 2013년 3월 초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던 김종훈씨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중국적과 중앙정보국(CIA) 연루 의혹에 휩싸여 자진 사퇴한 바 있다. 
 
‘관운의 사나이’

투철한 안보관
 
이 원장의 장남(47)은 홍콩의 한 증권사 임원으로 근무 중이며, 장남의 15·13살 된 두 딸은 미국 시민권과 한국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이중국적자이다. 장남의 부인은 미국 시민권만 가지고 있다. 장남은 초중고를 한국과 미국에서 다녔고, 미국에서 졸업했다. 두 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인이 미국인이라 미국의 ‘속인주의’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차남(44)은 미국 영주권자다. 차남 역시 중학교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공부하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미국에서 졸업했다. 차남은 2005년 미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2010년 영주권을 획득했고, 한국 국적 여성과 결혼했다.
 
 
차남의 부인 역시 2011년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차남의 딸은 한국 국적이 없는 순수 미국 시민권자인데, 이름도 미국식으로 미들네임이 있다. 차남의 아들(14)은 한국 국적을 가진 미국 영주권자다. 차남 가족은 미국에 살고 있다. 삼남(44)과 부인, 그의 두 딸은 모두 한국 국적자다.
 
고위 공직 후보자 가족의 국적이 그 후보자의 결격사유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가 최고 정보기관장 후보자 직계비속의 국적이 특정한 외국에 치우쳐 있는 점은 청문회에서 논란이 컸다. 
 
문병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 원장의 친인척들이 미국 영주권·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한미간 이익 충돌이 생겼을 때 미국에 불이익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이 원장은 “이 문제에 가족이 끼어들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저의 애국관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이해 충돌이 있을 땐 절대로 대한민국 국가의 이익만 생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11일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이 원장 등의 국민건강보험가입 및 납부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 원장 장남과 차남이 현재까지 이 원장의 ‘직장피부양자’로 등록돼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들이 내지 않은 보험료는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8년간 모두 1억5000만원에 달했다.
 
인사청문요청안 자료에 장남과 차남이 한 해 받은 급여는 지난해 기준으로 각각 3억9000만원, 1억4000만원 정도다. 김 의원은 “건강보험요율과 장기요양보험료를 대입하면 장남은 한 해 약 1300만원을, 차남은 대략 450만원 건강보험료로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깜짝 지명에 돌려막기·올드보이 지적
청문회 가족 국적·과거 전력 등 도마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해외 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채 이 원장의 직장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했다. 이 때문에 건강보험공단 부담금 수급은 정지되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이 기간에 매년 한국에서 진료를 받아 공단부담금을 수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 의원은 “서민들은 건강보험료 부담을 겪고 있는데, 해외 고액 연봉자인 국정원장 후보의 아들들이 편법을 저질러온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원장 측은 “해외로 나갈 당시 행정적인 부분을 잘 몰라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해명했다.
 
 

이 원장은 지난 2009년 2월2일 울산대 초빙교수 자격으로 <동아일보>에 기고한 ‘용산 참사, 공권력 확립 계기로 삼자’는 제목의 글에서 “용산 사건과 유사한 폭동이 만에 하나 뉴욕이나 파리, 런던 등 다른 선진국 도심에서 발생했다고…”라며 용산참사를 폭동에 비유했다. 이어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화염병과 시너로 격렬히 저항한 공무집행 방해 케이스”라며 “이번 사태는 졸속진압이나 과잉진압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법 집행의 격렬한 충돌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한 비극적 우발사고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또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 비극을 정쟁거리로 삼으라고 부추기니 다른 선진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형국”이라면서 “정쟁거리로 악용해 법치의 근간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가족은 미국사람
아들 건보료 미납
 
야당 측 의원들이 질타하자 이 원장은 용산 참사를 폭동에 비유한 것에 대해 “어휘가 사려 깊지 못했으며,부적절했다. 그 용어 때문에 상처받으신 분이 있다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자성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그 글은 아무리 아픈 사연이어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지적한 것”이라며 “폭동이란 단어는 적절치 않았다. 대신 전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개입 댓글 논란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나오던 지난 2013년 10월17일에도 같은 신문에 ‘국정원이 일류정보기관이 되면 정치개입은 없어진다’는 기고문을 실어 야당의 개혁안을 맹비난했다. 
 
이 국장은 기고문에서 “민주당 개혁안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인 무책임한 발상”이라며 “국정원을 지속적으로 때리고 흔드는 것은 백해무익한 자해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주당도 이젠 댓글 사건의 미련을 접고 진정한 국가정보역량 강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11월12일에는 한 언론사 기고문을 통해 “국정원을 몹쓸 기관으로 매도하는 것은 우리 안보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자해 행위로 국정원의 무력화를 줄기차게 노려 온 북한을 결과적으로 돕는 셈”이라며 역시 정치권의 국정원 개혁 움직임을 비판했다.
 
 
이날 인사청문회에서는 국정원의 정치 중립과 개혁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국회 정보위원회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 개입 사건 등을 언급하며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을 거듭 강조했다.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정원 정치개입과 정치 관여는 금지돼야 하고 국정원장은 이를 지키기 위해 정권의 운명에 좌우되면 안 된다”며 “유능한 사람들이 (국정원장으로) 와서 안보라는 이름으로 정치에 관여하다 몰락하는 것을 여러 사례에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국정원 개혁의 본질은 국내정치 개입 금지 부분”이라고 전제하고, 이 후보자가 게재한 기고문이나 대학교 강연 등을 근거로 정치적 편향성에 대해 지적했다. 
 
특히 국정원 댓글 사건을 두고 “조직적 선거개입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힌 이 후보자의 기고문을 언급하며 “국정원 조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이 후보자는 “당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 배경에서 쓴 글이니, 개인 의견 표출이라는 점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해명했다. 
 
전형적인 ‘박심’으로 분류
정치적 중립 지킬 수 있을까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국정원이 이른바 ‘논두렁 시계 공작’을 벌였다는 이인규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의 폭로를 언급하며 “국정원이 비열한 방법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전직 국가원수에 대해 (공작을 했다는 의혹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이 후보자는 “이런 얘기가 또 나온 게 참으로 당혹스럽다”며 “진실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답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 후보자가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5·16 쿠데타 지지행진에 참석했던 이력을 강하게 비판하며 5·16쿠데타에 대한 역사인식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이에 대해 이 원장은 “저는 역사적인 사건을 국가안보에 기여했느냐, 안 했느냐의 관점에서 보는 습관이 있다”며 “이 사건은 국가안보를 강화한 역사적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어 박 의원이 계속해서 5·16 쿠데타에 대한 입장을 묻자 “정회 시간에 (다시) 연구했다”면서 “법률적 학술적으로 쿠데타라는 점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김광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울산대로부터 제출받은 ‘이병호 교수 강의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학생들이 불만을 토로했다고 밝혔다. 강의평가에는 ‘교수님 정치색이 너무 강해 레포트를 쓸 때 정치성향을 고려해야 하는지 갈등이 생겼다’ ‘수업시간에 정치적인 색깔을 너무 많이 드러내 자신의 색깔로 수업을 주도해 나갔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용산참사 폭동으로 
5·16은 말 바꾸기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이 원장에 대해 “강직하고 국가관이 투철하며 조직 내에 신망이 두터워 국가정보원을 이끌 적임으로 (박 대통령이)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원장 자신도 내정 받은 이후 한 언론사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정치 관여는 없다”고 못 박았다. 또한 “제대로 된 정보기관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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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