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층 해외 원정 도박 실태 고발

명품서비스에 한번, 본전 생각에 또한번 ‘폭삭’

`해외 원정 도박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때 일부 연예인들이 대중의 눈을 피해가며 도박을 하기 위해 선택했던 원정 도박에 일반인들까지도 빠져들고 있는 것. 특히 부유층들의 원정 도박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에는 학원장, 공인회계사, 병원이사장 등 부유층의 원정 도박을 하다 적발됐다. 이들 가운데는 도박에 빠져 70억원에 가까운 재산을 탕진하고 중국집 종업원으로 전락한 사업가도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필리핀으로 원정 떠나 카지노 도박 일삼은 이들 대거 적발
공인회계사, 병원 이사장, 중견 기업체 대표 등 부유층 주류


필리핀으로 원정을 떠나 카지노 도박을 일삼은 부유층이 대거 적발됐다. 지난 3일 경기경찰청 외사범죄수사대는 2008년 6월부터 지난 1월까지 필리핀 앙헬레스시티 ‘발리바고’ 카지노에서 원정 도박을 한 31명과 이를 알선한 전당포, 불법 환전업자 6명 등 37명을 상습 도박 등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항공권에 외제차까지?
고급서비스로 유혹

이번에 적발된 원정 도박사범에는 공인회계사, 병원 이사장, 중견 기업체 대표, 고소득 자영업자 등 부유층 인사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서울, 경기, 부산, 대구 등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은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도박을 했고 가산을 탕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원정 도박에 빠져든 경로는 다양했다. 그 중 하나는 총책을 맡고 있는 브로커 김모(46·필리핀 체류)씨를 통해서였다. 김씨는 강원랜드 인근에서 여행사를 운영했는데 이 곳을 찾는 도박꾼들을 자연스럽게 해외원정도박으로 이끈 것이다. 또 하나의 경로는 강원랜드 인근에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모집책을 통해서였다. 이들 모집책은 항공권, 호텔숙박권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도박꾼들을 유혹해 필리핀 행을 부추긴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 카지노 사이트도 원정 도박을 광고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이밖에 필리핀 관광지에 온 한국인들에게 동포라는 점을 내세워 접근한 뒤 카지노에 발을 들이게 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도박꾼을 모집한 브로커 김씨 등은 필리핀 현지 카지노 2층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본격적으로 원정도박꾼들을 관리했다. 먼저 이들은 현지 카지노측과 ‘파코르시스템(PAGCOR: 필리핀 게임진흥사업부의 외국인 고객 카지노 유치 방안)’ 방식으로 계약을 맺은 뒤 한국인 고객이 30만페소(한화 700만원) 이상 도박을 하면 골프 부킹, 항공권, 호텔 숙박권, 고급차량 등 VIP급 편의를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도박꾼들을 유혹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도박자금을 탕진해 도박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돈을 구해줬다. 자신들의 국내 계좌를 통해 송금, 환전하도록 하거나 현지에서 직접 현금을 빌려주며 도박을 계속 하도록 도와준 것.

이처럼 원정 도박꾼들이 도박에 많은 돈을 쓰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객 시드머니(고객이 칩으로 환전한 금액)의 3%에 해당하는 수수료와 총 베팅금액의 0.5~1.5%에 해당하는 롤링 포인트를 받는 등 부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베팅에 비례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리 없었던 도박꾼들은 각종 술책에 넘어가며 하루하루 도박에 빠져들고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원정 도박사범들은 보통 3박4일, 길게는 한달 동안 필리핀에 머물면서 도박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도박꾼들은 호텔 등의 VIP급 대우에 매료돼 필리핀 행을 멈출 수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카지노에서 한 게임은 ‘바카라’. 이 게임은 게임 방법이 쉽고 간단해 누구나 할 수 있는데다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따거나 잃을 수 있는 중독성이 강한 게임이다. 이 때문에 주부 등 평범한 사람들도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카지노게임 중 하나다. 도박꾼들이 바카라게임에 들인 돈은 1인당 평균 4300만원. 많게는 3억원의 돈을 카지노로 잃은 도박꾼도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중견기업 대표 전모(52)씨는 2008년 5월부터 최근까지 무려 25회에 걸쳐 필리핀으로 도박여행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전씨가 도박으로 잃은 돈은 무려 2억원. 가져간 돈을 모두 도박에 탕진한 전씨는 모집책을 통해 국내에서 자금을 송금 받아 또 다시 도박에 빠져들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박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나락으로 빠져든 경우도 있었다. 중견기업을 운영하던 나모(56)씨가 그 주인공. 경기도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던 나씨는 지난 2000년 10월 강원랜드를 찾았다가 바카라 게임에 빠졌다. 하룻밤에 그가 잃은 돈은 3000만원. 본전 생각이 났던 나씨는 다음날도 돈을 싸들고 강원랜드를 찾았다.

하지만 행운은 나씨에게는 오지 않았다. 몇 달 동안 하루 종일 도박에 빠졌지만 매번 잃기만을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아내도 잃었다. 심장병이 있었던 아내는 나씨가 카지노에 발을 들인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한때는 70억대 자산가
도박 빠져 ‘철가방’ 신세

아내의 죽음도 나씨를 돌려놓지 못했다. 나씨는 그 후에도 매달 강원랜드를 찾았고 5~6년 만에 전 재산 70억원을 날렸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시도까지 한 나씨. 그러나 목숨 줄을 놓을 수는 없었던 나씨는 중국음식점 종업원으로 일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카지노에서 영원히 손을 뗄 거라 자신했던 나씨. 하지만 최근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도박판에 들어갔고 이번 경찰조사에 적발됐다.
한편 경찰은 필리핀 현지로 달아난 브로커 김씨 등 3명의 검거를 위해 현지 경찰에 공조수사를 요청하고, 조사과정에서 필리핀 카지노에 출입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것으로 확인돼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최근 부유층들의 원정 도박 사건이 심심찮게 벌어져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마카오에서 100억대의 도박을 한 부유층들이 적발돼 파문을 낳았다. 이들은 환치기를 통해 거액을 해외로 빼돌려 도박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경찰청에 따르면 권모(45)씨 등 도박 알선조직 ‘롤링에이전시’ 직원들은 2008년 5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중국 마카오 현지에서 중소기업 대표인 강모(47)씨 등 20명을 카지노에 알선하고 카지노 측으로부터 베팅금액의 1% 상당을 수수료로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호텔숙박, 고급 외제차 등 VIP급 서비스 유혹에 돈 펑펑
70억 탕진하고 음식점 종업원 신세 …무서운 도박 중독


강씨 등 도박 사범들은 롤링에이전트의 안내에 따라 마카오 지역 카지노를 전전하며 도박을 해 1인당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잃은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결과 마카오 현지 도박 알선 조직은 한국인 도박꾼을 도박판에 끌어들이기 위해 강원랜드 출신 한국인 에이전트를 영입한 뒤 부유층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에이전트는 항공권, 호텔사용료 할인 등의 특전을 걸고 부유층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벤츠 등 고급차량과 통역서비스 등 각종 고급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이들의 환심을 사 카지노로 끌어들였다. 주요 고객층이 부유층의 저명인사인 탓에 ‘확실한 신분보장’도 내세웠다. 도박을 하더라도 절대 신분이 들통 날 염려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

또 도박 알선 조직은 환치기 업자들과 손을 잡고 고객들이 도박 자금이 떨어지면 환치기를 통해 자금을 조달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최근 해외 원정 도박에 발을 들이는 부유층들은 대부분 해외 카지노업체와 한국인 에이전트들이 만든 덫에 걸려 돈과 명예를 잃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한번 빠지면 쉽게 끊을 수 없는 도박의 중독성에 있다. 매일 도박장을 찾아 수천만원의 돈을 잃으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나는 절대 도박중독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박을 끊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난 도박 중독 아니야”
자신하는 사이 나락으로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폐인의 길로 한 발자국씩 걸어들어 가는 것이 도박의 위험성이다. 한국도박중독예방치유센터는 도박중독자가 되는 진행과정을 세 단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그 중 1단계는 ‘따는 시기’다. 이는 자신의 수입에 비해 매우 큰돈을 따면서 도박으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달콤한 환상에 빠지는 시기다. 도박에 대한 강한 흥미가 생기는 것도 이때다. 물론 돈을 잃을 때도 있지만 도박자들은 딴 것에 대해서만 회상하는 경향이 있고 잃은 것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힘든 노동활동 없이 큰돈을 한 번에 거머쥐어 본 경험은 도박장으로 걸어가는 걸음을 가볍게 할 수 밖에 없다. 2단계는 ‘잃는 시기’다. 도박으로 돈을 딴 경험만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돈을 잃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때다. 이때 도박 중독자들은 도박을 중단하지 않고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해 더 많은 돈을 잃게 된다.

마지막 3단계는 ‘절망의 시기’다. 이 시기에 도달한 도박자들은 이성적·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 도박을 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도 이 시기다. 도박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비윤리적 행동이 다음의 큰 승리를 위해 치러야 할 과정이라고 합리화한다. 재산을 잃어가면서 다시는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이를 지키기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마약 중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힘으로 도박을 조절하지 못하고 조울증, 공황장애 등의 정신장애로 고통 받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도박의 강력한 중독성은 두뇌 반응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병이라고 할 수 있다”며 “스스로 도박을 끊기 어려운 만큼 의사나 상담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조언한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