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약해지는’ 전경련 회장단 변천사

옛날엔 ‘못해’ 안달, 지금은 ‘안해’ 발뺌

[일요시사 경제팀] 한종해 기자 = 대안이 없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의 3연임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각이다. 책임 있는 선택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소수의 목소리에 그친다. 사실상 전경련이 유명무실해졌다는 극단적인 얘기도 나온다. '재계 본산'이었던 전경련이 언제부터 이렇게 추락하기 시작한 걸까.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세 번째 연임했다. 전경련은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회원 기업 대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54회 정기총회를 열고 현 회장인 허 회장을 제35대 전경련 회장으로 선임했다.

계속 고사…
대안이 없다

허 회장은 취임사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2년의 임기 동안 미래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역점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구조적 장기불황의 우려를 털어내고 힘차게 전진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반갑지만은 않은 눈치다.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이어가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허 회장은 처음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2011년과 연임 때인 2013년 모두 회장직을 고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32대 회장을 맡고 있던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2011년 7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를 선언하자 전경련은 즉시 후임 인선 작업에 돌입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단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 '콜'을 넣었다. 이건희 회장의 초청으로 만찬에 참석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재계 주요 총수들은 만장일치로 이 회장에게 차기 회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회장의 대답은 없었다. '예스'도 '노'도 아니었다. 사실상 고사한 셈이다.


전경련이 '이건희 바라기'에 빠져 있는 동안 전경련 회장직은 7개월간 공석이었다. 물망에 올랐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박용현 두산연강재단 이사장도 회장직 제의에 손사래를 쳤다. 결국 전경련의 선택은 허 회장이었다.

'하기 싫은데…' 허창수 회장 또 연임
이장한 종근당 회장 부회장 신규 선임

2013년 2월 정기총회에서 허 회장이 처음 연임될 때도 전경련은 또 한 번 진통을 겪었다. 허 회장은 정기총회를 앞두고 회장직을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동안 허 회장은 "내 임기는 끝났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허 회장의 사임 의지는 헛된 바람이 됐다.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은 건강 등의 이유로 어려웠고 최태원 회장은 이제 막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이장에서 물러난 상태, 구본무 회장은 1998년 이른바 '빅딜' 사건 이후 전경련 행사에 발길을 끊었다.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과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굵직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반대가 심했다.

올해 역시 허 회장은 3연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허 회장은 지난달 초 연임 여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업계는 허 회장이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반대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재계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달콤한 권력의 상징인 전경련 회장직을 재벌 총수들이 하나같이 기피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사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경련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전경련은 1961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를 모방해 조직한 한국경제인협의회로 시작했다. 회장은 고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자가, 부회장은 고 전택보 천우사 창업자와 고 이한원 대한제분 창립자가 맡아 이끌다가 같은 해 7월 재계 유지 13명이 모여 경제재건촉진회 창립총회를 열고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공장(대한양회) 설립자인 고 이정림 회장이 회장으로 선출됐다.


부회장 없어서…
재계 716위까지

같은 해 8월 이름을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꾼 전경련은 1968년 3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경련은 재벌을 대변하는 단체로서 그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정부의 대형 국책공사 물량이 나오면 전경련이 분배를 담당했고 업체 간 과당경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때문에 전경련 회장직은 기업 오너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전경련 역대 회장을 보면 초대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재임기간 1961년 8월∼1962년 9월)를 시작으로 고 이정림 대한양회 설립자가 2·3대 회장(1962년 9월∼1964년 4월), 고 김용완 경방 창업주가 4·5·9·10·11·12대 회장(1964년 4월∼1966년 4월, 1969년 4월∼1977년 4월), 고 홍재선 쌍용양회 회장이 6·7·8대 회장(1966년 4월∼1969년 4월)을 맡았다.
 

이후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13·14·15·16·17대 회장(1977년 4월∼1987년 2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18대 회장(1987년 2월∼1989년 2월), 고 유창순 호남석유화학 회장(전 국무총리)이 19·20대 회장(1989년 2월∼1993년 2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21·23대 회장(1993년 2월∼1998년 8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24·25대 회장(1998년 9월∼1999년 10월) 등 당대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총수들이 이끌어 왔다. 

와병, 수감…
핑계도 제각각

전경련은 정주영 창업주가 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인 1977년부터 10년 동안이 최전성기였다. 여의도 전경련 회관이 지어졌고, 서울 올림픽이 유치됐다. 정 회장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들이다. 전경련 앞에 '재계의 본산'이라는 말이 붙고, 전경련 회장이 '재계의 총리'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전경련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자 당시 회장이던 최종현 회장이 강하게 반발했고, SK는 한동안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돼야 했다. 여기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고 1998년 전경련이 빅딜을 추진하면서 내분이 생겼다.

2000년대 들어서자 재계와 노동계 간의 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갈등이 심화됐고 통상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 동반성장, 갑질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총수들은 전경련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김우중 회장을 마지막으로 국내 5대 그룹에서 회장을 맡은 적이 없다. 26·27대는 고 김각중 전 경방 명예회장, 29·30대는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31·32대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회장직을 맡았다.

전경련 회장 기피 현상은 회장단 구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전경련 회장단은 회장 1명, 상근부회장 1명, 부회장 18명 등 2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경련은 지속적으로 회장단 확대를 추진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전경련은 올해 정기총회에 앞서 2013년부터 30대 그룹 총수에 한정됐던 회장단 자격을 50대 그룹으로 확대했다. 그룹 부도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이 사퇴하면서 생긴 빈자리를 메꿔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재계 곳곳에서 전경련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회장단 자격 확대에 따라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이수영 OCI그룹 회장, 장형진 영풍그룹 회장,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등이 부회장 후보로 거론됐다. 허 회장과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 직접 영입에 나섰다. 2~3명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됐다. 하지만 이들 모두 가입을 고사했다.

신규 영업된 부회장은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유일하다. 50대 그룹 수장으로 가입이 한정된 전경련 회장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사. 종근당의 재계순위는 716위(2013년 자산 기준)다. 이 회장도 처음에는 부회장 선임 제의를 고사하다 막판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경련 측은 이 회장 선임에 대해 "2003년경 업종별로 다양한 목소리를 전경련에 담아내자는 취지에서 각 업종 대표들이 부회장으로 선임됐는데 고 허영섭 녹십자 회장이 그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며 "허 회장의 타계 이후 제약업계 목소리를 전해 줄 부회장이 없었는데 이번에 이 회장을 영입했고 그 역할이 주어진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정치 일동제약 회장과 강정석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이 전경련 이사로 신규 선임된 이유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회장단 확대 시도 무산 21명→20명
절반도 안 되는 전경련 회의 참석률

현재 전경련 부회장은 이승철 상근부회장을 비롯해 이건희 회장, 구본무 회장, 김승연 회장, 조양호 회장, 정몽구 회장, 이준용 회장, 신동빈 회장, 최태원 회장, 이장한 회장, 박영주 회장,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김윤 삼양사 회장, 류진 풍산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권오준 포스코 회장 등이 맡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제대로 전경련 활동을 하는 인사는 적다. 이건희 회장은 와병 중이고 최태원 회장은 수감 중이다. 정몽구 회장은 전경련과 거리를 둔 지 오래다. 김승연 회장은 집행유예 상태고 박용만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고 있어 전경련 회장단에서 사퇴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조양호 회장도 '땅콩 회장'사건 여파로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다. 김준기 회장도 지난 2007년 전경련 운영에 불만을 표시하고 부회장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를 밝힌 뒤 현재까지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있다. 구본무 회장도 1999년 이른바 '빅딜 사건'이후 "전경련이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발을 끊었다.

장세주 회장과 박용만 회장의 경우에는 활동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적었다. 박용만 회장은 형인 박용현 회장에 이어 그룹 회장에 오른 시기가 2012년이기 때문에 2013년이 돼서야 선임됐고 장세주 회장도 같은 해 법정관리를 이유로 사임의사를 밝힌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 빈자리를 채웠다.

전경련 관계자에 따르면 격월로 열리는 회장단 회의에 참석이 가능한 회장단은 10명 정도. 실제 참석은 6~7명 정도만 이뤄지고 있다. 최근 수년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참석률이 절반을 넘긴 경우는 손에 꼽는다. 지난해 1월9일 새해 첫 전경련 정기 회장단 회의에 국내 5대 그룹 총수 가운데 참석한 사람은 신동빈 회장 단 한 명뿐이었다.


두 달 뒤 신축회관 첫 회장단 회의 때는 회장단 21명 가운데 7명만 참여했다. 국가경제 현안에 대한 재계의 입장을 밝히는 자리가 아니라 소규모 친목 모임으로 전락한 것이다. 참석률이 극히 저조하자 회장단 회의는 아예 비공개로 바뀌어 개회 여부를 모르는 지경이다.

2011년 2월, 허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허 회장은 업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0대 그룹 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된 것이 무려 11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 회장은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는 동안 ▲초과이익공유제 추진 ▲기업별 동반성장지수 발표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법인세 감세 철회 움직임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등 재계에 대한 정치권 압박이 거세졌지만 전경련의 대응을 없었다.

허 회장이 침묵을 깬 것은 취임 4개월 만인 2011년 6월 기자간담회서다. 이날 허 회장은 정치권의 포퓰리즘 정책을 비난하고 감세 철회 논의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이 했다. 또 휘발유 가격과 동반성장 등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당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는 "오늘날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는 정부 압박 발언을 했다.

재계는 환영했다. 이제야 전경련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허 회장이 몇 차례 여의도로 호출된 후 전경련은 꼬리를 내렸다. 독설은 자취를 감췄고 전경련은 중립 노선을 탔다.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2013년 이후에도 전경련은 특별한 발전이 없었다. 회원사 문턱을 낮추고 회장단을 추가 영입키로 하는 등 사업·조직 개편에 착수했지만 2기 임기가 다 돼서도 대안을 찾지 못한 채 부회장 추가 영입 시기를 연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섣부른 기대 금물
보여주기 될 수도

허 회장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3기 임기를 시작했다. 지금 전경련 앞에는 법인세 인상과 기업인 가석방, 반기업 정서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허 회장은 일단 나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취임식 후 기자들과 만나 "법인세는 낮춰야지 올리면 안 된다"며 "앞으로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고 밝혔다. 재계는 이번만큼은 대놓고 반기지 않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며 "지금 허 회장이 내고 있는 목소리가 앞으로도 죽 이어질지, 아니면 임기 초기 보여주기식으로 그칠지 두고 봐야 한다"고 전했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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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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