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기업인 가석방론 막전막후

기업이 살아야 경제도 나라도 산다?

[일요시사 경제1팀] 한종해 기자 = 재계에 '가석방'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번 법무부장관과 경제부총리가 슬쩍 운을 뗀 것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정재계를 막론하고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것. 주로 거론되는 재벌총수로는 연일 역대 최장기간 수감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이다. 물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재벌 봐주기'라는 것. 가열되는 '가석방 논란'을 조명해 봤다.

가석방은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고 수형 중에 있는 사람이 그 행장(복역 태도에 대한 성적)이 양호하고 개전의 정이 뚜렷해 나머지 형벌의 집행이 불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일정한 조건하에 임시로 석방하는 제도다.

개전의 정을 제외한 조건으로는 무기는 20년, 유기는 형기의 3분의 1을 경과해야 한다. 가석방 후에는 남은 형기를 경과하면 형의 집행을 종료한 것으로 본다. 다만 기간 중에 금고 이상 형의 선고를 받아 그 판결이 확정되거나 보호관찰의 준수사항을 위반한 때에는 가석방 처분이 취소된다.

누가 되고
누가 안 되나

절차는 교정시설의 장이 수형자에 대한 가석방 적격심사를 신청하면 법무부 장관 소속 가석방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진행하고 법무부장관의 승인을 거친다. 사면과는 달리 가석방은 법무부장관의 고유 권한이다. 가석방심사위원회는 위원장인 법무부 차관을 포함해 판사, 검사, 변호사, 법무부 공무원, 교정 관계자 등 법무부 장관이 임명 또는 위촉한 5~9명으로 구성된다.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 대기업 오너는 현재 3명 정도다.


재벌 총수 중에는 최태원 SK 회장이 유일하다. 최 회장은 역대 재벌 총수 가운데 최장 기간 수감 중이다.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지난 1일(2015년 1월1일 기준·이하 기준 동일)까지 701일을 기록했다. 최 회장은 계열사 자금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2012년 1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형기는 2017년 1월 말까지. 확정 형기 중 3분의 1(486일)을 215일 초과해 가석방 요건을 충족했다.

최 회장은 이외에도 병보석 신청도 없이 수감생활을 하고 옥중에서 사회적 기업 전문서인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을 펴내는 등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해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지난 2012년 받은 보수 중 세금을 제외한 187억원 전액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사회적기업 활동에 기부하기도 했다.

최 회장과 함께 기소된 동생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도 가석방 대상에 포함된다. 그의 수감 기간은 618일. 최 부회장은 지난 2011년 12월 검찰에 구속된 후 다음해 6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이듬해 9월 2심에서 징역 3년6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도 가석방 대상이다. 구 부회장은 2012년 기업어음(CP) 사기 발행 혐의로 구속돼 징역 4년을 확정받고 2년 넘게 수감 중이다. 함께 재판을 받은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의 경우, 징역 3년 확정 후 315일 동안 수감생활을 해 50일 이후인 오는 2월20일 가석방 요건이 충족된다.

장관·부총리 이어 여당 대표 가세해 군불
다가오는 설날 또는 3·1절 특사 가능성↑

수감 중이지만 가석방 요건을 채우지 못한 대기업 오너도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2012년 7월1일 구속됐지만 신장 이식 등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수차례 구속집행이 중단되면서 총 수감기간을 114일 채우는 데 그쳤다. 지난해 9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이 회장이 계속 수감생활을 이어 왔다면 가석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이 회장 사건은 아직 대법원 선고 전이다. 이 회장은 아직까지도 구속집행정지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질병을 이유로 각각 보석과 형집행정지를 받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도 수감기간이 가석방 요건에 미치지 못한다. 불구속 기소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을 비롯, 회계분식 혐의로 270일 가까이 수감된 상태에서 고등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도 가석방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도 가석방 요건이 안 된다. 4만명에 이르는 CP 사기 피해자들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기업인 '가석방 바람'은 지난해 9월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발언에서 불기 시작했다. 당시 황 장관은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 기업인도 요건만 갖춘다면 가석방될 수 있다"고 말했으며 이에 최 경제부총리는 "기업인들이 죄를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원칙에 어긋나서 엄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살리기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힘을 실었다.
 

재계는 기업인 가석방이 자칫 국민의 반감을 불러올 수 있을 가능성을 염려하면서도 반색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가 경제가 매우 불확실한 상황에서 투자와 고용 창출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시점에 실질적 결정권자인 오너들의 경영일선 복귀가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이유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경제민주화라는 명목으로 기업인들이 지나치게 엄정한 법 집행으로 역차별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정부가 경제살리기 정책을 펼치고 있고 경제민주화 기조가 바뀌어 가고 있는 가운데 기업인 가석방은 선행되어야 할 정책"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오너가 부재 중인 주요 대기업들은 투자가 줄줄이 중단되고 신년 경영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등 아픔을 겪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2011년 6조606억원이던 그룹 투자 규모가 2012년 4조9283억원으로 쪼그라 들었으며 계열사인 SK E&S와 SK텔레콤이 추진했던 STX에너지와 ADT캡스 인수·합병 건이 중단됐고, 태양전지 사업과 연료전지 개발 사업도 도착상태다.

오너 부재 기업
투자 줄줄이 중단

CJ그룹 역시 총수 부재로 시련을 겪고 있다. CJ대한통운의 물류터미널 거점 마련을 위한 충청 지역 2000억원 투자 계획은 전면 보류됐고, CJ CGV의 해외 극장 사업 투자와 CJ오쇼핑의 해외 인수합병도 중단됐다. CJ제일제당이 추진하던 베트남·중국 업체와의 생물자원 사업과 관련한 인수합병도 최종 단계에서 고배를 들었다.

태광그룹도 마찬가지다. 주력 계열사인 태광산업의 매출은 2011년 3조5000억원에서, 2012년 2조8100억원, 2013년 2조5196억원으로 하락세를 타고 있으며 신사업 개발과 신규시장 개척 등도 답보상태다.

이런 가운데 김승연 회장이 복귀한 한화그룹은 요즘 한 마디로 활기가 넘치고 있다. 집행유예 기간 중인 김 회장은 계열사 등기임원이나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데 제약은 있지만 이미 경영에 복귀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다. 매일 출근하지는 않지만 일주일에 한두번 본사에 나와 사업개편을 이끌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의 방산·화학 계열사를 인수하고 태양광 계열사인 한화솔라원과 한화큐셀이 합병하는 등 굵직한 인수합병을 성사시켰다.
 

김 회장의 복귀 전까지 한화그룹은 '비상경영위원회'를 가동하며 공백 메꾸기에 나섰지만 투자와 경영전략 등 현안에 대한 결정이 미뤄지면서 주력 계열사를 중심으로 이상 신호가 감지되어 왔다. 김 회장이 복귀하자마자 달라진 한화그룹의 모습에 재계에 부는 기업인 가석방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지난 12월 초 발생한 '땅콩 회항 사태'는 여론을 급반전시켰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12월5일 대한항공 항공기 일등석에 앉아 있던 자신에게 기내식 서비스로 땅콩을 봉지째 내온 승무원에게 화가 나 램프리턴(항공기를 탑승 게이트로 되돌리는 일)을 지시하고 사무장을 내리게 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반기업·반재벌 정서가 확산된 것.

복귀한 김승연
활기 띄는 한화

여론을 반영한 듯 연말 시행된 성탄절 기념 가석방 명단에는 기업 총수가 빠졌다. 지난달 25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교도소에서 가석방된 수형자는 614명. 형기의 80~95%를 채운 모범수 중간처우자(26명), 외국인 수형자(24명), 중증질환 환자(21명), 10년 이상 장기수(8명), 고령자(8명), 소년수(1명) 등이 포함됐다. 법무부는 이날 "통상 절차대로 실시한 것"이라며 "대상은 행형 성적이 좋은 사람들이고 경제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나 특이 신분자는 제외했다"고 밝혔다.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린 것은 최 부총리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최 부총리는 최근 한 언론에 "일반인들도 일정 형기가 지나면 가석방 등을 검토하는 것이 관행인데, 기업인이라고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역차별이란 생각에 변함이 없다"며 "박 대통령에게 여러 차례 기업인들의 가석방이 필요하다는 점을 건의 드렸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도 최근 "경제가 이렇게 안 좋은 상황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은 일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당초 기업인 가석방에 부정적인 입장이던 이완구 원내대표도 입장을 바궈 "경제살리기 측면과 함께 국민대통합 명제에 부합할 수 있도록 (가석방 문제에 관해) 야당과 협의를 해 보겠다"고 말했다. 서청원 최고위원과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도 가석방을 제안하고 나섰다.

동아줄 기다리는 간절한 범털들
모범 수감생활 최태원 회장 유력

재계는 다시 기대를 걸고 있다. 2월 설 연휴 또는 3·1절 등 가석방 시기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다. 새정치민주연합 원혜영 정치혁신실천위원장은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대기업 등에 대한 사면권 행사를 더욱 엄격히 제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나마 지키는 몇 안 되는 공약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며 "경제살리기를 위해 정부가 할 일은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것이고, 비리 기업인에는 더 엄격히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완주 원내대변인도 "재벌총수가 형기를 마치기 전에 나오면 경제가 활성화가 된다는 말인지 김무성 위원에게 묻고 싶다"며 "기업인의 가석방이 경제활성화를 가져온다는 구체적인 근거나 통계가 있는지 최경환 부총리께 묻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의 의견은 갈리고 있다. 박지원 의원은 "고위공직자나 기업인을 우대 하는 것도 나쁘지만 불이익을 주는 것도 나쁘다"며 기업인 가석방을 찬성했고 이석현 비상대책위원도 "법에 정한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라면 기업인이라고 해서 가석방에서 배제하는 건 옳지 않다"고 밝혔다.

민생사범+재벌
'물타기 작전?'

기업인 가석방이 법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나오자 새누리당은 생계형 민생사범까지 포함해 박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는 방침을 전했다. 서청원 의원은 "기업인 가석방 문제를 제기하려면 민생사범도 같은 법의 잣대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밝혔으며 이 원내대표도 "경제도 살려가며 국민대통합이라는 명제에 부합할 수 있도록 야당과 협의를 한 번 해보겠다"고 했다.

야당은 '물타기 작전'이라는 비판을 내놨다. 박 원내대변인은 "민생사범과 재벌을 묶어 같이 풀자고 물타기 하는 수법은 비겁하다"며 "재벌만을 대표하는 정당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이 오히려 신사다운 행동일 것입니다"고 비난했다.

불거지는 가석방 논란과 관련, 청와대는 "가석방은 법무부 장관의 고유권한"이라며 선을 그은 상태다.

 

<han10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가석방·사면' 기대조차 못하는 총수들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가 없다"

법무부 장관의 고유권한인 가석방과는 달리 사면은 대통령의 특권으로 형을 전부 또는 일부 소멸시키는 일을 말한다.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나뉘며 일반사면은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재판을 받고 있는 범죄자들을 포함해 특정범죄를 저지른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적용된다. 특별사면은 대통령 고유 권한으로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며 형이 확정돼 집행에 들어간 경우를 전제로 한다.

가석방 외에 기업인 사면이 실시되면 대기업 총수 중에는 가석방 요건을 충족시켰거나 앞두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 등을 제외하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유일하다. 김 회장은 지난해 2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원, 사회봉사명령 300시간을 선고받아 현재 집행유예 중이다.

김 회장은 사회봉사명령을 완수하고 지난 11월부터 서울 장교동 한화그룹 본사로 출근하고 있지만 집행유예 기간 중이기 때문에 ㈜한화 대표이사직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집행유예 판결이 확정된 사람이 임원을 하면 화약류 제조업 허가가 취소되며, 사업허가를 다시 받기 위해서는 집행유예 기간을 모두 마친 후 최소 1년이 지나야 한다는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규정 때문이다.

탈세, 횡령, 배임 혐의로 법정을 오가며 재판을 받고 있는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지난 4월 배임과 횡령 혐의로 1심 판결에서 징역 6년형을 받고 법정 구속된 뒤, 항소심을 진행 중인 강덕수 전 STX 회장은 사면이나 가석방을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사기성 회사채(CP) 발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도 마찬가지다. 현 전 회장은 1심에서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항소, 공판이 진행 중이다.

건강상의 이유로 상고심에서 재판이 계류 중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도 형이 확정되지 않아 사면의 대상이 아니다. <해>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야당발 ‘채 상병 특검’ 파장

야당발 ‘채 상병 특검’ 파장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채 상병 특검법)이 야당 주도로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해 7월19일 사건 발생 10여개월 만이다. 국민의힘은 표결에 반발하며 퇴장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할 것으로 관측됐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날 본회의서 ‘이태원참사특별법’을 합의 처리된 뒤 ‘의사일정 변경 동의안’을 제출하며 채 상병 특검법 상정을 요구했다. 채 상병 특검법은 해병대 채수근 상병이 실종자 수색 작전 중 순직한 사건을 초동 조사하고 경찰에 이첩하는 과정서 대통령실·국방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특검이 수사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경찰 이첩 개입 의혹 김진표 국회의장이 이를 수용해 의사일정 변경동의안에 대한 표결이 이뤄졌고, 재석 168명 전원 찬성표로 가결됐다. 표결에는 야당만 참여했고, 국민의힘은 반발해 사실상 표결에 불참했다. 민주당은 원래 본회의 안건에 없었던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기 위해 의사일정 변경을 우선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힘은 이번 본회의에 합의되지 않은 법안이 올라가는 것 자체를 반대해 왔다. 당초 김진표 의장도 여야가 합의해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양당 원내대표를 의장석으로 불러서 마지막으로 중재를 시도했지만 5분 뒤 김 의장은 여러 가지로 고려한 끝에 의사일정 변경 동의의 건을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양당의 마지막 협상도 결렬됐고, 국민의힘에서는 유일하게 자리에 남았던 김웅 의원만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방청 중이었던 해병대 예비역연대 법률 자문, 김규현 변호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노년의 해병대 예비역들도 연신 눈물을 흘렸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겸 당 대표 권한대행은 이날 야당이 강행 처리한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윤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로텐더홀서 규탄대회를 열고 “그간 우리 당은 이태원참사특별법에 합의 처리하는 조건으로 의사일정에 동의했다. (민주당과 김 의장이)채 상병 특검법을 애초에 처리하겠다고 했으면 저희는 오늘 본회의 의사일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모처럼 이태원법 합의 처리를 통해 협치 분위기가 조성되고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있는데 오늘 의사일정 변경까지 해서 채상병법을 처리하겠다는 것은 정치 도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채 상병 특검법 표결 시 본회의장을 퇴장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채 상병이 의사일정으로 상정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규탄대회 뒤 거부권 행사 건의와 관련한 질문에 “입법 과정과 법안 내용을 볼 때 거부권을 건의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국힘 퇴장 속 야당 전원 찬성 조각난 협치···대통령 또 거부?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 의사일정 변경안을 제출한 상태다. 이날 본회의는 이태원특별법 처리를 위해 여야 합의로 잡은 일정인 반면, 여당이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상황서 입법을 강행하기 위해 의사일정을 변경해 본회의 부의를 시도하겠다는 의도였다. 대통령실은 이날 야당의 강행 처리 예고를 예의주시하면서도 공수처 수사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정진석 비서실장은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서 “민주당이 오늘 국회 본회의서 채 상병 특검법을 의사일정까지 바꿔가면서 일방 강행 처리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며 “엄중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입장 표명은 특검법에 대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실장은 “채 상병의 안타까운 죽음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려는 나쁜 정치”라며 “공수처와 경찰이 이미 본격 수사 중인 사건인데도 야당 측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특검을 강행하려고 하는 것은 진상규명보다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권에선 채 상병 특검법 자체의 법리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미 수사 중인 사안에 특검을 도입하는 배경에 정쟁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바라봤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서 진행 중인 수사가 끝난 다음, 그 과정이나 결과를 토대로 특검 도입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이다. 야당이 특검을 당장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대통령실은 무엇보다 2021년 군사법원법 개정으로 해병대수사단에 수사권이 없어졌기 때문에 야권이 주장하는 ‘수사외압’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해병대수사단이 기초 조사는 할 수 있겠지만, 관계자 수십명을 소환하고 연루자가 몇 명이고 하는 것은 법에 규정된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박정훈 해병대수사단장의 ‘월권’ 가능성을 지적한 셈이다. “정치적 의도” 대통령실 발끈 또 과거 공수처 설치와 군사법원법 개정을 주도했던 민주당이 특검을 추진하는 모순을 거론하며, ‘참사의 정쟁화’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는 분위기다. 이날 정 실장은 “현재 공수처와 경찰서 철저한 수사를 진행 중이므로 수사 당국의 결과를 지켜보고 특검을 도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공수처와 경찰이 우선 수사해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특검 도입 등의 절차가 논의되고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공수처는 민주당이 패스트트랙까지 동원해 설치한 기구다. 당연히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는 것이 상식이고 정도”라며 “지금까지 13차례 특검이 도입됐지만 여야 합의 없이 이뤄진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야당이 단독으로 주도한 이유도 있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과정서 윤 대통령,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이시원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 등이 수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려 했다는 관련 정황은 이미 상당 부분 나왔다. 국방부는 사단장 등 고위 지휘관들의 혐의를 축소하려 했고, 경찰에 넘긴 수사기록도 매끄럽지 않은 과정을 통해 회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통령실과 국방부 관계자들이 전화와 문자메시지 등으로 조율한 흔적도 엿보였다. 국민의힘은 특검법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서 “공수처 수사가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공수처 수사가 1년 가까이 진척을 보이지 않으면서 야권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과거 대통령실이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조그마한 사고’라고 언급한 사건도 국민적 분노를 유발했다. 지난 3월22일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 매체와 인터뷰서 ‘조그마한 사고’로 표현하고 “전 지휘관이 법적인 문책을 받는 건 부적절하다”는 취지로 실언한 바 있다. 더구나 공수처는 지난해 8월 고발장을 접수한 이후 인력 부족, 수사 의지 등을 핑계로 현재까지 ‘수사 진행 중’이라는 변명만 되풀이했다. 해병대를 비롯한 국민 여론도 특검에 찬성하는 분위기다. 눈물 흘린 해병들 왜? 해병대예비역연대는 지난 2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국민의힘 당사를 찾아 채 상병 특검법 상정과 통과를 강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해병대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은 이날 오후 1시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 당사 앞에 모여 “채 상병 특검법 통과, 박정훈 대령 탄압 중지” 등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채 상병 특검법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같은)이런 세력들이 우리나라의 집권여당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은 정원철 해병대예비역연대 회장은 “국민의힘이 진정으로 이 나라의 안보를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국민의힘과 대통령은 민심을 외면하지 말고 채 상병 특검법을 수용하길 바란다”고 외쳤다. 해병대예비역연대에 법률자문을 하고 있는 해병대 출신 김규현 변호사는 “(국민의힘은)처음엔 ‘독소 조항이 있다’고, 지금은 ‘공수처와 경찰이 수사 중이니 그 수사가 끝난 다음에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과거 특검 때에는 (앞서)경찰·검찰이 수사를 안 했는가”라고 되물었다. 사실상 가장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할 방법은 법정 수사 기간을 최대 3개월로 정해놓고 있는 특검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병대 측은 이날 “3개월이 지나면 우리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안보에 전념할 수 있고, 정치권도 채 상병 문제를 일단락하고 지금 산적한 안보, 민생 정책을 논의할 수 있게 된다”며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수사를 기다리며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채 상병 문제로 정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인가. 지금이라도 국민의힘은 오후 2시에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 전원 참석해 채 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집회를 마친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원 45명은 채 상병 특검법의 상정·통과 여부를 보기 위해 곧장 국회 본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앞서 채 상병 특검법은 지난해 10월 민주당 주도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후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지난달 3일 본회의 자동 부의 요건을 충족했다. 여야는 지난 1일 이태원 참사 특별법 처리에는 합의했지만, 채 상병 특검법과 전세 사기 특별법 개정안에는 합의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채 상병 특검법을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통한 것이다. 1년 가까이 진척 없는 수사 역풍 뻔한데···용산 선택은? 특검법 통과에 대해 대통령실은 야당을 향해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해석했다. 다만, 수세에 몰린 대통령실이 야당을 지적할수록 부정 여론만 키우는 분위기다. 더구나 대통령실은 스스로가 수사 대상이 되는 사안서 ‘협치’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 대통령이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으나, 이로 인해 역풍을 맞게 되는 형국이다. 당장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용산의 뜻을 따를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어렵사리 여당 의원들을 단속하더라도 다음 달에 시작하는 22대 국회에서는 궁지에 내몰릴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여부에 신중한 모습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거부권을 행사할지는 예단하기 어렵다”며 “김진표 국회의장은 합의 정신을 존중하는 분”이라고 일축했다. 윤 대통령은 그동안 여야 합의 없이 거대 야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법안들에 대해선 ‘과도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젊은 병사의 죽음’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인 데다 야권과 언론이 국가안보실과 공직기강비서관실 등 대통령실 연루 의혹을 잇달아 제기한 상황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당의 총선 참패 한 달여 만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윤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다. 국회 재표결 시 여당 이탈표도 우려해야 하는 부분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용산 대통령실 회담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채 상병 특검법의 적극적인 수용을 요구한 데 대해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은 것도 복잡한 상황을 반영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편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가운데, 공수처는 특검 출범 여부와 별개로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 외압 의혹’과 관련된 핵심 인물들을 불러 조사하며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국방부가 채 상병 사건을 회수하고 재조사하는 과정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대통령실 등 ‘윗선’으로부터 외압이 있었는지 의혹을 풀어줄 핵심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환조사가 이뤄지는 모양새다. 수사는 진행 중 공수처 수사4부(부장검사 이대환)는 지난 2일 오전 9시25분쯤 박경훈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직무대리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이날 공수처는 박 전 직무대리를 상대로 국방부 조사본부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재조사한 후 혐의자를 축소해 경찰로 넘기는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 등을 캐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