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통장 ‘1억 증발’ 미스터리

믿고 맡겼는데…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갔다

[일요시사 경제팀] 한종해 기자 = 사람들이 은행에 돈을 맡기는 이유는 뭘까? 이자를 받기 위해서?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만 가는 금리에 이자 수익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지 오래다. 사람들은 분실과 도난 위험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은행에 예금한다. 은행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그런데 이 본질이 깨졌다. 통장에 있던 거액의 돈이 증발했다. 예금주는 1억1800만원이 사라질 때까지 낌새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해당 사건이 발생한 농협과 금융당국은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농협 통장에서 1억원이 넘는 돈이 주인도 모르게 빠져나간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은 지난 7월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양에 거주하는 평범한 가정주부 이모씨는 이날 돈이 필요해 농협 CD기로 20만원 인출을 시도했지만 ‘잔액 부족’이라는 메시지를 보게 됐다.

이씨는 단순 오류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통장 잔액은 1억1800만원이었기 때문. 결혼생활 25년 만에 장만한 집을 팔고 통장에 넣어놓은 돈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단독주택을 장만하면서 잔금을 치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어 등장한 통장 잔액을 알리는 메시지를 본 이씨는 충격에 휩싸였다.

남은 건 -500만원

잔액은 마이너스 498만원. 이씨 통장은 마이너스 500만원까지 인출이 가능한 통장이었다. 이씨는 농협 창구를 찾았다. 경위를 듣게 된 이씨는 절망에 빠졌다. 6월26일 밤 10시51분부터 사흘 동안 11개 은행 15개 계좌로 한번에 299만원, 298만원씩 총 41차례에 걸쳐 돈이 빠져나갔다는 것. 기록에는 정상적인 텔레뱅킹으로 남아있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금액 인출 이전에 누군가가 이씨의 아이디로 농협 홈페이지에 접속한 흔적을 발견했다. 인터넷 뱅킹 접속 지점은 중국이었다. 문제는 이씨가 평소 인터넷 뱅킹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터넷 뱅킹은 가입한 적도 없고, 은행 업무는 거의 출퇴근 시간에 은행ATM기 또는 텔레뱅킹으로 이용했다.

보이스 피싱이나, 스미싱, 파밍 등 금융사기를 당한 적도 없다. 또한 돈이 빠져나간 시간 이씨의 휴대폰에는 통화기록도 없었다. 각종 비밀번호와 보안카드를 유출하거나 분실한 적도 없었다.

경찰 조사 결과 1억1800만원이 송금된 계좌는 제3자 이름으로 된 이른바 ‘대포통장’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게 전부였다. 경찰은 범인의 윤곽은 물론 계좌 접근 방식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결국 대포통장 이름을 빌려준 4명을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으로 입건하는 선에서 지난 9월10일 수사를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사고가 여론의 관심을 받자 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보강 수사를 시작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 27일 IT금융정보보호단과 상호금융검사국 등을 농협중앙회에 투입해 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과 경찰은 해당 지역조합의 IT정보보안 실태와 내부 통제 상황을 점검하고 사고 원인을 밝히는 데 조사력을 모을 방침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도 상황파악에 나섰다.

사고 원인만큼이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보상 여부다. 전자금융거래법 제9조에 따르면 ▲접근매체의 위·변조로 발생한 사고 ▲계약체결 또는 거래지시의 전자적 전송이나 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 ▲전자금융거래를 위해 전자적 장치 또는 정보통신망에 침입해 부정한 방법으로 획득한 접근매체의 이용으로 발생한 사고 등에 대해 해당 금융사가 손배 배상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다만 이용자의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경우 그 책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자의 부담으로 할 수 있다고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예금 1억1800만원 감쪽같이 인출
범행수법 오리무중…보상은 누가?

하루 아침에 1억1800만원을 날린 이씨는 월세살이를 전전하고 있다. 농협은 사건이 전해진 초기 ‘내부정보 유출 등 책임이 없어 보상하기 힘들다’며 ‘버티기’에 돌입했다가 파장이 커지자 그제서야 보험사를 통해 보상심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

현재 농협은 농협손해보험의 ‘전자금융업자배상책임보험’에 가입돼 있다. 보험금 지급을 심사 중인 농협손보가 이번 사고를 보험금 지급 사유라고 판단할 경우, 전액이 해당 농협에 보험금으로 지급된다.

보험금 지급 사유에 해당하는 사안은 신종 해킹이나 피싱 등 전자금융사기다. 농협 측의 관리부실이나 보안시스템 허점, 예금자의 과실로 이번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밝혀지면 농협손보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농협 측의 보안상 문제라면 배상 책임은 농협이 져야한다.


농협 측은 “텔레뱅킹 이체는 고객 계좌번호, 통장 비밀번호, 자금이체 비밀번호, 보안카드번호, 주민등록번호, 고객전화번호가 있어야 가능하다”며 “이들 정보가 유출되는 경우는 고객의 고의·과실이나 금융기관 내부 유출에 의한 것인데 자체 확인한 결과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된 사실은 없다”고 밝혔다.

이씨가 농협카드도 만든 적이 없어 올해 초 발생한 카드사 정보유출 대란 때 신상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도 낮다.
 

일부 전문가들은 보안카드번호가 유출됐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보안카드번호를 제외한 계좌번호, 통장·자금이체 비밀번호,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는 이미 알려진 해킹기술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자금융사기 피해소송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이준길 변호사는 이씨의 전화가 도·감청이 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휴대폰으로 보안카드번호를 누를 때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번호 소리를 범인들이 분석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농협은 주파수 도·감청을 차단하는 시스템을 2007년부터 도입했다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은행은 모르쇠

농협의 허술한 보안시스템도 구설수에 올랐다. 현재 국내 금융사들은 해킹 등에 대비해 기존에 발생한 해킹 기업을 본부 전상망에 데이터베이스화 해놓고 해킹이 감지되면 차단하는 시스템인 모니터링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부 금융사에서는 고객의 평상시 거래 패턴을 데이터베이스화 해 이상한 거래형태가 나타나면 고객에게 통지하고 확인하는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농협은 모니터링시스템만 갖춰 놓았다. 농협이 FDS를 도입했다면 나흘 간 41차례 인출이 일어나는 중간에 이씨에게 확인 전화가 갔고 사고를 중간에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농협은 현재 FDS에 대한 테스트 중에 있다. 빠르면 12월 초, 늦어도 1월 중순안으로 구축을 완료할 예정이다.

사건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농협 고객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농협 통장을 옮기겠다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다.

 

<han10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현대카드 ‘15억 증발’ 미스터리

현대카드에서 전산 오류로 인해 1300명이 넘는 고객의 카드대금이 이중 결제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 26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카드 내부 전산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해 고객 1364명의 계좌에서 약 15억원의 카드대금이 이중으로 결제됐다.


피해를 본 고객들을 은행이 아닌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를 카드 결제계좌로 해놓고 매달 24일을 카드 결제일로 지정한 고객들이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CMA 계좌는 금융결제원을 통해 카드대금이 인출되는데 결제일인 24일 정상 인출된 것을 내부 전산시스템이 읽어내지 못해 26일 다시 인출됐다”며 “이중 출금된 금액을 바로 환불 처리해 입금을 완료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번 사고의 원인과 과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대카드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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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