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⑩전두환 편
“각하 독대? 눈먼 비자금 갖고 줄을 서시요”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군사정부는 무소불위였다. 공식적인 공익법인에 대한 기부금 말고 다른 것도 필요했다. 다름 아닌 비자금이다. 공익법인 기부금은 회계장부에 기장돼 외부에 그 사용처가 알려져 다른 사적인 용도로 전환할 수 없다.

반면 비자금은 기업의 원가처리에서 가짜로 원가투입 즉 가공원가로 계상, 그 금액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으로 통상 은행의 가명구좌로 관리하곤 했었다. 구좌는 홍길동, 이몽룡 등 가상의 이름이 동원됐다. 혹은 다른 임원의 이름을 빌려 구좌를 터 관리하기도 했다. 물론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막도장을 새겨 경리부, 자금부 혹은 아예 비자금관리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했다. 자금관리부의 담당자 책상을 뒤져 보면 수백 개의 막도장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각 기업 자금부 담당자
책상에 막도장만 수십개


이런 자금은 기업에서 사외로 유출될 때 현금으로 빠지고 그 후에도 다른 구좌로 이동되며 자금세탁을 거치므로 사실상 이 비자금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자금담당자가 입으로 불지 않으면 그 출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주인 없는 돈’이 돼 버리고 만다.

청와대는 꼬리표 없는 기업의 눈 먼 비자금을 원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영원한 비밀로 감춰 놓을 수 있는 비자금이야말로 돈을 원하는 대통령과 비밀리에 돈을 주고자 하는 재벌총수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찰떡궁합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청와대는 재벌총수와의 회합을 ‘정치와 재계의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자주 가졌다. 겉으로는 대통령이 재계의 어려움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만 보였다.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돈을 주라는 혹은 달라는 멘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만남’이라는 문장에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역시 돈인 것이다. 돈의 수수가 불문율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느 재벌총수를 막론하고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만나는 데 빈손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면 배짱이 없었다. 또 대통령도 당연히 재벌총수가 알아서 가져올 것이라는 당연지심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러니 돈의 수수는 양손바닥이 마주치는 격과 같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강요한다고 해서 소리가 요란히 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이 자리야 말로 재벌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회합의 일정이 잡히면 재벌총수는 청와대가 원하는 비자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비자금의 규모가 문제였다. 도대체 얼마를 준비해야 하는지 지침이 없으니 알아서 가져가야 하는 아주 난감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됐다. 각 재벌마다 크기와 등급이 다르니 다른 경쟁그룹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정도의 돈 액수가 필요한데 이게 도대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벌총수끼리 담합해서 얼마 얼마씩 얘기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청와대에다 눈치 없이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상 제각각 눈치코치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총수의 됨됨이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모월 모일 눈이 내리는 저녁. 청와대에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이 긴장한 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입장입니다.”

모두가 일어났고 전두환 대통령은 용이 그려져 있는 상석에 앉았다.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다 오셨는가?”
“예, 딱 한 분이 아직…P그룹의 P회장님이 지방에서 오다가 눈이 내려 비행기가 연착됐고 지금 오고 있답니다.”

대통령은 별 대꾸 없이 주변에 모인 재벌총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 속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날씨 및 건강의 덕담을 해가며 경제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과외공부를 많이 한 군부출신의 대통령은 박식한 경제논리를 펴 모인 재벌총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는 한국역사상 부동산가격의 절대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의 올림픽아파트를 비롯한 강남의 아파트는 미분양으로 아무나 원하는 곳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기업과 실물경제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열심히 일하면 아파트 얻기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는 5천만원을 밑돌았고 아무도 부동산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소득의 양극화도 심하지 않았다. 임원이나 신입사원이나 월급차이가 그리 나지 않았다. 신입사원 월급이 25만원 정도면 임원의 월급이 1백만원을 넘지 않았다. 지금의 신입사원 월급이 2백50만원, 임원 월급이 2억원이라 한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 월급차이가 75만원에서 1억8천만원 이상의 극심한 소득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미친 듯이 불고 있는 부동산광풍과 소득의 양극화 심화를 고려해보면 당시의 경제상황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다 하겠다.

홀로 두자리 금액 준비
한달후 청산절차 밟아


한참 후에서야 문이 열리며 P회장이 헐레벌떡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의 눈길이 슬쩍 P회장에게 쏠렸고 이미 착석한 다른 회장들도 P회장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길 속에는 ‘간도 크지 어떤 자리라고 이렇게 늦게 오다니 저 사람 아래위로 보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하는 뜻이 담겼다.

3시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나서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든 총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비서관이 제지했다.

“아 참, 지금 옆방에서 각하께서 회장님들과 독대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분씩 각하를 뵙고 가시죠.”

안 그래도 들고 온 비자금을 건네 줘야 하는데 기회가 없어 어벙벙 하던 차에 독대라니 서로 잘됐다 싶었다. 각자는 일대 일로 대통령과 만났고 저마다 준비해온 비자금을 진상(?)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그것을 낸 총수와 그것을 펴 본 대통령만이 알 수 있었다. 청와대를 나오는 총수들은 고심해서 낸 돈들의 규모에 따라 대통령을 만족시킬 만한 것인지 아니면 진노를 사 오히려 그룹에 불똥이 튈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인식 탓에 얼굴이 밝지 못했다.

P그룹의 P회장은 청와대 회합이 있기 며칠 전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잃고 상심하던 차에 청와대 미팅 건을 통보 받았다. 본래 그는 돈에 대한 절약과 검소함으로 그룹을 일으킨 자수성가형으로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도 주위 참모들의 간곡한 권유 탓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니 들고 가야 하는 비자금의 규모에 인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대통령이라 주위에서 세자리 수의 금액을 권유했지만 P회장은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설마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의표시라는 심정으로 두 자리 수의 금액을 준비했다. “너무 적다”는 참모들의 충언이 귀에 따갑게 들려 왔다. ‘본래 P회장의 그릇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P그룹의 종업원 인건비는 타 그룹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P회장은 청와대를 나오면서 무언가 알지 못할 불안감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착잡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모임에 지각하는 불경죄를 저지른데다가 대통령에게 주는 지참금도 적은 느낌이 들어 이모저모 심정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오비이락일까. 한달 후 신문 지상에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인쇄 활자가 경제계를 요동치게 했다.

‘청와대, 재경원은 P그룹 공중 분해해 회사별 매각, 또는 청산절차 돌입키로 결정했습니다.’

공중분해의 원인은 친인척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인한 부실 및 비도덕 경영과 과다한 부동산투자에 의한 유동성부족으로 자금난 악화였다. 사실 P그룹은 총수가 딸부자라서 사위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이미 재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본격적인 재벌 해체작업이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각 계열사는 뿔뿔이 흩어져 매각·청산의 수순에 돌입했다. 이 문어발의 잔재를 먹으려는 타 그룹의 문어발이 또 숨 가쁘게 뻗쳐 왔다. 더불어 수출진흥에 편승해 수출붐으로 그룹을 일구어 냈던 율산그룹,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무리한 수출확장의 부작용과 총수의 과욕에 따른 사기수출로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 율산, 국제 등이 대우, 삼성 등과 같은 직장대대 소속으로 나란히 훈련을 받았는데 다들 수출위주의 그룹이라 친하게 지낸 바 있었다. 대우, 삼성 직원들과는 달리 율산, 국제 직원들이 다소 느림보여서 중대장의 입에서는 항상 ‘율산 뭐하냐, 국제 뭐하냐’하는 고함소리가 항상 맴돌았다. 그러던 몇 달 후 훈련에는 율산, 국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옆줄에 서 있던 율산, 국제 직원들의 예비훈련복이 보이지 않아 새삼 기업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둑판 시작하려면
대마만 살렸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중소그룹은 대마불사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일 율산, 국제,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대우나 삼성, 현대와 같은 대마였다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사회에 미치는 그 파장이 엄청나 무리해서 살려 두는 것이 그냥 죽게 내 버려두는 것보다 더 유리한 정치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 대마가 죽으면 그 바둑판은 처음부터 둘 수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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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