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XX야!” 신용카드 텔레마케터 2개월차 박모(25·여)씨는 선배를 붙잡고 울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부모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욕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들어 충격을 받았다고 울먹였다. 그런 박씨에게 선배는 그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며 경력이 쌓이다 보면 기분 나쁜 감정을 빨리 없앨수 있다고 다독여 줬다. 도대체 텔레마케터 사회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텔레마케터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감정노동 시달리고 성희롱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열악한 텔레마케터 환경 개선되기 어려운 실정
“현재 우리나라 텔레마케터 종사자들은 30만명에서 100만명가량으로 추산되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어요. 이들 중 66.1%가 비정규직이죠. 이들 중엔 강박관념과 감정노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서도 할 수 없이 일을 하는 동료들이 많아요.”
지난 2월23일 오후 2시 서울 종로에서 만난 조모(27·여)씨는 경력 5년차의 보험 텔레마케터다. 조씨는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단련되어 왔다고 한다.
“언어폭력 너무 싫어요”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스트레스고 다른 하나는 성희롱입니다. 종종 언어폭력을 하는 고객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는 끊고 싶어도 끊지를 못해요. 고객보다 먼저 전화를 끊는 행위가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죠.”
조씨의 지적은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텔레마케터 실태조사’ 보고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텔레마케터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성희롱’.
보고서에 따르면 텔레마케터들의 강박관념은 고객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정신적·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지만 사후조치나 사전예방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열악한 환경은 개선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꼬집고 있다.
“고객서비스를 중시하기 때문에 규제가 심하죠. 심한 욕설을 듣거나 성희롱을 당해도 전화를 끊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에는 40분가량 노골적인 성희롱에 시달린 적도 있어요. 통화가 끝나는 것은 전화를 끊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죄송하다고 해야 가능해요.”
같은 자리에 나온 3년차 홈쇼핑 텔레마케터 한모(27·여)씨의 말이다. 한씨는 인격적 또는 성적으로 욕을 하는 것을 들을 땐 상대방 모르게 울면서 전화를 받기도 한단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는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돌아온다고 설명했다.
박씨도 다짜고짜 ‘죽여 버리겠다’고 말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럴 때마다 ‘죄송합니다’하고 무조건 사과부터 해야 하는데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어려운 여건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고객들이 조금만 우리 사정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그러면 그들은 얼마만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인권위에 따르면 텔레마케터들의 근무시간은 주당 43.3시간에 육박한다. 텔레마케터 종사자들 중 여성이 89.2%를 차지하고 있다.
“사후대책이요? 없어요.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났지만 우리들의 업무강도는 높은 편이죠. 성희롱 노출빈도도 강해요. 그럼 뭐해요. 법적으로 정해진 1년에 1회 이상의 성희롱 예방 교육을 대부분 실시하지 않는 형편인데….”
한씨는 현장에선 현행법상 감정노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고 지적했다. 물론 성희롱에 노출된 텔레마케터를 위한 대응매뉴얼 또한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이로 인해 수화기를 들 때마다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으며 업무적으로도 스트레스가 강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씨는 “저 같은 경우는 연장근무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실적을 채우지 못하면 연장근무에 들어가는데 정말 미치죠. 추가수당이라도 받으면 그나마 위안이 될 텐데 그런 것도 없고 그러다보니 집에 돌아갈 땐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많아요”라고 털어놨다.
“저는 보험을 하잖아요. 실적에 대한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예요. 휴식시간도 없죠. 10분이란 휴식시간이 주어지는데 이 시간이 지나면 모니터에 빨간불이 깜박거려요. 고객과의 통화가 길어지면 휴식시간은 물론 점심시간도 사라집니다. 이것조차도 스트레스죠.”
조씨는 입사 때와는 달리 감정표현이 없어진 동료들이 많다고 귀띔했다. 일하는 동안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그 원인은 기분이 좋지 않아도 웃으면서 통화를 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저와 같이 입사한 동료는 얼마 전 그만뒀어요. 2년 쯤 지나니까 변하더라고요. 일종의 대인기피증 같다고나 할까요. 점점 동료들과 어울리거나 사람만나는 것을 귀찮아하더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그러더니 결국 회사를 떠났어요. 이 일을 하면서 종종 그 동료 같은 사람들을 봤습니다.”
조씨는 또 텔레마케터들은 음식을 수시로 먹는다고 말했다. 계속 앉아 일하면서 말을 많이 하다 보니 배가 고프고 그래서 음식을 먹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이 고스란히 몸무게로 늘어나 또 다른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운동량이 거의 전무하다는 이유에서다.
때문에 텔레마케터들은 감정을 없애기 위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책상 그림이나 사진을 두는 방법이 그 중 하나다. 기분 나쁜 감정을 빨리 없애야 다음 통화도 밝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 자살충동 나타나기도
사실 감정노동에 시달리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의료계 보고서는 많다. 감정노동 자체가 정신과적 문제를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나 성희롱과 같은 감정노동이 심각할 경우에는 우울증, 탈진, 자살충동까지 나타난다고 한다.
조씨는 “고충처리만 전담으로 하는 텔레마케터들을 육성했으면 좋겠어요. 또 상습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동료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 정부에선 이 같은 실태를 파악하고 개선이나 규정 변화 등을 손질해주었으면 합니다”라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