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비리 '멘탈갑' 산업은행 대해부

국책은행 맞아? 뒷돈 받는 KDB '사면초가'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사면초가에 놓였다.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산업은행은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의 중징계 통보에 이어 일부 임직원이 검찰의 수사망에 오르는 등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산업은행은 STX그룹을 상대로 수천억원 규모의 부실대출을 한 의혹을 받고 있으며 ▲임직원 금품 수수사건 ▲동부그룹 패키지 매각 실패 ▲은행권 인사개입 의혹 등에 휘말리며 표류 중이다. 위기에 빠진 KDB호, 선장인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산업은행은 이명박정부 들어 '용광로'가 됐다. 여기서 비유한 용광로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민영화'라는 이슈로 우리 사회를 달궜던 것이 첫째고, 정권 실세와 연결된 '모종의 의혹'이 녹아 없어진 것이 둘째다. 어느 경우든 산업은행은 금융권의 뜨거운 감자였다.

산은 임직원
동양 봐줬나

정권이 바뀌고 산업은행에는 새 주인이 들어섰다.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지금껏 무난히 조직을 이끌어 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정부 각 기관은 약속이나 한 듯 산업은행을 겨냥해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궁지에 몰린 산업은행, 홍 회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먼저 검찰은 산업은행 임직원들을 상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달 26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3부(부장 이선봉)는 산업은행 임직원 3∼4명의 비리 정황을 포착해 수사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최근 몇 년간 동양그룹 경영진으로부터 수억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동양그룹 측이 카드 매출을 과다계상한 뒤 현금을 되돌려 받는 수법(일명 카드깡)으로 비자금을 조성했으며, 이중 일부 현금을 산업은행 임직원들에게 건넨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은행은 동양그룹 핵심 계열사로 알려진 동양시멘트의 주채권은행으로 확인된다.


검, 임원 동양서 수억 챙긴 의혹 수사 착수
금, STX 부실대출 책임자 10여명 징계 예고

지난해부터 정치권에선 산업은행과 동양그룹의 커넥션 의혹이 제기됐다. 불거진 의혹의 핵심은 동양시멘트에 대한 특혜 대출이다. 동양시멘트는 지난 2010∼2012년까지 재무구조개선에 대한 약정을 모두 3차례 불이행했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오히려 약정 조건을 완화해주거나 자금 회수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등 특혜를 줬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또 산업은행의 전·현직 임원진은 동양시멘트의 사외이사나 고문직으로 대거 이름을 올렸는데 이들이 일종의 '관피아'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최근 검찰은 동양그룹 계좌추적 과정에서 의문의 뭉칫돈을 발견했다. 액수는 5억원가량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돈의 용처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산업은행을 수사망에 올렸다. 앞선 조사에서 동양그룹 관계자는 관련한 사실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실액만 1조원
금감원 징계 예고

수사결과에 따라 산업은행은 금융 신용도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산업은행은 STX그룹에 대한 대출 여파로 1조원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업은행은 국세청의 세무조사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세무전문지 <조세일보>는 지난 7월 국세청이 산업은행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산업은행이 세무조사를 받는 건 4년 만의 일이다. 국세청은 오는 11월7일까지 조사관 5명을 파견해 산업은행을 집중 점검할 계획이다. 공교롭게도 동양시멘트에 대한 특혜 의혹이 불거진 2010년부터 2012년까지의 회계 기록이 조사 대상으로 알려졌다.


홍 회장의 전임인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산은금융지주 회장)이 재임했던 2011년 산업은행은 1조4124억원의 순이익을 올렸다. 2012년에도 9469억원의 흑자를 냈다. 그러나 홍 회장이 취임한 2013년 산업은행은 적자로 돌아서 손실규모가 1조4474억원에 이르렀다.

통계만 놓고 보면 홍 회장이 방만 경영을 한 것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다. 홍 회장이 기록한 대부분의 적자는 전임인 '강만수호'의 유산이다. 금융권은 강 전 행장이 STX그룹에 대한 '묻지마' 대출로 적자폭을 키웠다고 지적한다.

산업은행에 큰 손실을 끼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지난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그는 MB(이명박 전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수차례 수행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강 전 회장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던 2012년 산업은행으로부터 단기차입금 2300억원을 융통했다. 산업운용자금 1800억원도 확보했다. 다른 민간은행들은 앞다퉈 대출금을 줄이는 추세였는데 산업은행은 유독 '퍼주기'로 STX그룹을 도왔다. 지난 정권 비호설이 나온 배경이다. 실제로 MB의 '경제통'이자 측근으로 불렸던 강 전 행장은 "계열사들이 모두 나서서라도 (STX그룹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KDB대학 부실운영 지적
각종 구설 휘말려 곤욕
홍기택 회장 자질 시험대

결과적으로 STX그룹은 산업은행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무너졌다. 지난 5월 강 전 회장은 2조3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를 저질러 9000억원의 사기성 대출을 일으킨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STX그룹 분식회계 후폭풍은 곧장 산업은행을 덮쳤다. 지난 21일 금감원은 산업은행 전·현직 임직원에 대한 제재를 사전 통보했다. 징계 명단에는 현직 산업은행 부행장을 비롯해 전·현직 간부 18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STX그룹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이행하지 않았지만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분식회계 우려가 있었음에도 STX조선해양에 대한 대출액을 3000억원으로 늘려줬다"며 "산업은행에게 부실대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징계 이유를 밝혔다.

또 선박건조 현황을 살피지 않고 거액의 선수금을 지급해 돈이 유용된 점도 문제 삼았다. 금감원은 당시 산업은행이 여신심사를 제대로 했더라면 천문학적인 손실은 없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STX그룹 구조조정 가운데 생긴 불가피한 손실이란 것이다. 산업은행은 국책은행 자격으로 리스크를 감수했는데 이를 금융당국이 사후 징계하는 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금감원은 조만간 징계대상자들의 해명자료를 종합해 제재심의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할 계획이다.

동부 매각 난항
'음모론' 창궐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건 징계대상에 강 전 행장이 포함되지 않은 부분이다. 여신 총책임자이자 결정권자인 강 전 행장은 여신심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산업은행이 현재 부침을 겪고 있는 건 궁극적으로 이명박정부 때 단초가 제공됐다.

세부적으로 산업은행은 2년 전과 비교해 고졸 채용인원이 10분의 1로 줄었다. MB는 임기 중 '고등학교만 나와도 취업할 수 있다'는 정책을 들고 나와 금융권에 고졸을 채용하도록 주문했다.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MB의 아이디어는 없던 일이 됐다.


새누리당 김정훈 의원이 산업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2011년 전체 채용인원(188명)의 절반에 육박했던 고졸 사원(90명)은 2012년 120명으로 늘었다가 지난해 20명으로 급감했고, 올해 역시 15명에 그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강 전 행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KDB금융대학교(이하 대학교)의 신입생 수도 감소했다. 사내 고졸사원을 대상으로 한 대학교의 신입생은 2013년 68명이었다가 2014년 45명으로 줄었고, 같은 기간 자퇴생은 1명에서 14명으로 늘었다. 덧붙여 김 의원은 "대학교 학생 수가 교육부 설치인가 학생 수 기준(교원 1인당 25명)과 비교해 미달됐다"고 주장했다.

장애인 고용비율도 문제다. 산업은행의 장애인고용비율은 1%대로 국정감사를 받는 모든 금융기관을 통틀어 가장 낮았다. 2010년부터는 장애인 법정 의무고용 비율인 3%를 채우지 못해 관련 법규에 따라 매년 의무고용부담금을 내 왔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준 의원이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산업은행은 2010년 0.8%, 2011년 2.1%, 2012년 1.5%, 2013년 1.3%, 2014년 1.3%의 비율로 장애인을 채용했다. 지난해 산업은행은 고용의무 미이행으로 3억1000만원의 부담금을 납부했으며 4년간 모두 8억4000만원의 부담금을 사용했다.

중소기업 대출 비중 감소 문제도 심각하다. 지난 2009년 산업은행의 대출 비중은 대기업 61.0%, 중소기업 39.0%로 나름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5년 새 대출 비중은 대기업 76.2%, 중소기업 23.8%로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산업은행은 그간 여러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에 채권단 자격으로 참여했다. 현대·한진그룹을 포함해 지난해엔 동부그룹의 구조조정에 개입했다. 동부그룹의 금융권 여신은 지난달 기준 6조원 정도로 파악되는데 산업은행은 전체 여신 중 3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동부그룹의 경영난이 가속화될수록 산업은행 역시 출혈을 피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 산업은행은 동부그룹을 대신해 동부제철 인천공장과 동부건설 발전당진을 묶어 매각하려다 실패했다. 때문에 동부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겪었고, 비금융계열 지주회사격인 동부CNI의 법정관리 가능성이 타진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았다.

당초 산업은행은 동부그룹의 희망과 달리 경쟁입찰 없는 패키지 인수를 포스코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포스코가 입찰을 포기하면서 구설에 올랐다. 시간만 허비한 채 구조조정을 어렵게 만든 까닭이다.

일각에선 "산업은행이 같은 금융권인 동부화재의 경영권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방해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내놓고 있다. 산업은행은 강 전 행장 시절 장기적인 수익모델을 찾다가 민영화를 추진한 전력이 있다.

당시 강 전 행장은 '메가뱅크론'을 주장했다. 우리금융지주와 산은금융지주(산업은행 포함), IBK기업은행을 합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사실상 민영화로 가기 위한 전초전 성격이 강했는데 결과적으로 여러 암초에 부딪히며 실현되지 못했다.

인사 외압설
메가 뱅크론?

흥미로운 것은 박근혜정부 들어 산업은행 민영화가 전면 중단됐다는 점이다. 박근혜정부는 정책금융을 위한 금고로 산업은행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경영자 입장에서 권력에 끌려다니는 등 자율성을 보장받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홍 회장은 전임에 비해 뚜렷한 '자기 색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강 전 행장이 풀지 못했던 수익구조 역시 해법이 없는 상황이다.

홍 회장은 지난주 IBK자산운용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내용을 요약하면 IBK자산운용 대표로 추천된 내부인사가 홍 회장이 추천한 외부인사에 밀려 인선이 늦어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산업은행이 타은행 경영에 관여했다는 주장이었지만 산업은행 측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이후에도 홍 회장과 관련한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계열사인 대우증권 사장 교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사장 공모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홍 회장이 입김을 불어넣고 있다는 의혹은 복수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며 벌어지는 기현상이다.

여러 정황상 홍 회장의 지위는 공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에 대한 전방위 압박이 계속되는 건 각 사정기관의 과열된 실적경쟁으로 풀이된다. 바꿔 말하면 산업은행만큼 적폐가 많은 곳이 없다는 얘기다. 어느덧 '사면초가'에 몰린 산업은행. 이제 홍 회장은 권력의 눈치를 살펴야 살아남는 처지가 됐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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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