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고속철도 복마전' MB정부 실세 개입 의혹

국민 안전 볼모로…MB측근 돈 쓸어 담았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지난달 26일 새누리당 송광호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요구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송 의원은 2년(2010∼2012년)간 철도부품 제작업체로부터 수천만원 상당의 뒷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억대 뇌물수수 혐의를 받은 같은 당 조현룡 의원에 이어 송 의원은 구속수사를 앞두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호남고속철도 공사에 개입해 업체로부터 로비를 받았다는 것에 있다. 호남고속철도 사업은 이미 수차례 '철피아'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된 바 있다. 

모 전문건설사 대표 A씨와 지난 정권 실세와의 유착 의혹이 불거졌다. 취재 과정에서 기자는 건설업계 전문가를 만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호남고속철도요? 문제 많죠. 자금 압박을 받았는지 원가를 절감한다고 여기저기서 부실이 일어난 걸로 알고 있어요. 교량이나 이런 부분들. 설계도 꽤 많이 바꿨더라고요. 발주처가 민간 기업이었다면 이렇게 하진 않았을 거예요."

비리 투성이
호남고속철도

당시 기자가 입수한 문건에는 모두 5개 공구(호남고속철도 1-1, 2-3 등)의 원도급사와 도급금액, 공사기간, 설계변경내역 등이 명시돼 있었다. 5개 원도급사가 수주한 금액은 약 1조3200억원. 토공·철콘(철근과 콘크리트), 노반 공사 등을 포함한 호남고속철도 전체 공사비용은 지난해 말 기준 13조원으로 파악됐다. 이 엄청난 공사로 득을 봤던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A씨는 이미 회사를 부도내고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 공사를 따내기 위해 무리한 저가입찰을 수년간 지속한 게 원인이었다. 전문건설협회 한 관계자는 "호남고속철도 공사에 참여했던 많은 중소·전문건설사들이 중간에 엎어졌다(부도를 맞았다)"고 말했다.

호남고속철도 사업은 길이 249.1km의 철도를 '오송∼익산∼광주송정'에 이어 목포까지 연결하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이 중 2006년부터 시작된 KTX 1단계 사업(오송∼광주송정 구간)은 올해 말 완공을 앞두고 있다. 착공 당시엔 이름 있는 건설사들이 군침을 흘렸던 사업이지만 지금은 서로가 슬그머니 발을 빼려 하는 분위기라고 전해진다.


지난 7월27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호남고속철도 공사 입찰 과정에서 담합한 28개 건설사에 대해 과징금 4355억원을 부과했다. 이는 건설업계 단일 담합 사건으로는 역대 가장 많은 액수다. 담합을 주도한 건설사 법인과 주요 임원들은 검찰에 고발된 상황이다.

공정위가 적발한 입찰 담합 규모는 3조5980억원이다. 1단계 사업으로 책정된 사업비가 8조3500억원인 것을 고려하면 공사비의 절반 가까이를 담합한 셈이다.

공정위는 담합을 주도한 대형 건설사 7곳을 특정했다. 건설업계에서 이른바 '빅7'으로 불리는 대림산업·대우건설·삼성물산·SK건설·GS건설·현대건설·현대산업개발이 지목됐다.

이들은 2009년 6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2조2000억원대의 호남고속철도 노반공사 수주 과정에서 서로 공사를 '나눠먹기'로 공모했다. 13개 공구의 입찰이 진행되자 각 공구별로 낙찰예정업체가 선정됐다. 나머지 업체는 들러리로 세웠다. 두산중공업·포스코건설·한신공영 등 7개 건설사가 무늬만 경쟁입찰의 들러리가 돼 주기로 했다.

다른 공사구간 입찰도 사전 추첨으로 투찰률이 조작됐다. 가령 턴키방식으로 발주된 차량기지 공사를 희망했던 대림산업·대우건설·삼성물산은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 모여 '사다리 타기'로 업체를 추첨했다.

이른바 '짬짜미'로 불리는 대기업건설사들의 입찰담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점은 유독 정부가 발주한 대형 건설·토목공사가 많았던 지난 정권에서 이 같은 폐해가 도드라졌다는 것이다.

대기업 주도
정부가 묵인


실제로 지난해에는 이명박정부 당시 건설사 간 담합 과정에 한국철도시설공단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정권 실세가 뒤를 봐준 것 아니냐'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이미경 의원실에서 나온 문건과 관계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한국철도시설공단은 호남고속철도 공사 입찰 과정에서 몇몇 건설본부에 특정 건설사를 선정하도록 한 것으로 의심된다.

먼저 한국철도시설공단 고위 관계자는 하급부서에 특정업체를 선정하라고 지시했다. 지시를 내려 받은 담당 부서는 각 건설사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연락을 받은 건설사 임직원들은 대전 소재 한 호텔에 모여 일부 공구 낙찰률을 78.5%로 정하는 등 담합했다. 담합에 가담한 건설사는 모두 8곳으로 이들이 따낸 공사비는 1조5697억원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8개 건설사가 담합한 78.5%의 낙찰률과 관련해 일각에선 비자금 조성 의혹을 제기했다. MB정부의 실세가 개입해 '커미션'을 챙긴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호남고속철도 공사 입찰 집계결과 모든 공구의 평균 낙찰률은 73.01%였다. 그러나 8개 건설사가 담합한 구간은 낙찰률이 78.52%로 평균보다 높았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한 국회출입기자는 "높은 낙찰률 때문에 상당한 공사비가 이익으로 남았을 테고, 남은 돈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담합의 배후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의혹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호남고속철도 공사는 지난 이명박정부의 4대강 공사만큼이나 뒷탈이 많은 사업으로 꼽힌다. 이명박정부 임기 말 '몰아치기 공사'로 안전성에 '노란불'이 켜졌던 건 물론이고,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김후곤)가 벌이고 있는 '철피아' 수사에서도 '호남고속철도'란 단어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속된 말로 '해 먹을 것이 많았던 사업'이란 얘기다.

각종 비리 징후는 뚜렷했다.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한국철도시설공단이 특정업체에게 4600여억원에 달하는 사업을 몰아줬다"고 주장했다.

당시 심 의원은 "호남고속철도를 비롯해 국내 레일체결장치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는 AVT사가 제출한 탄성패드를 분석한 결과, 샘플 10개 가운데 5개가 하자보증 기준치를 초과했다"고 밝혔다. 탄성패드는 고속철도의 충격을 흡수해 주는 레일체결장치의 핵심 부품이며, 문제가 있을 시 열차탈선 등의 대형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13조 대형관급공사…대기업 무더기 담합 과징금
낙찰률 높여 비자금 조성?…누가 커미션 챙겼나
국회의원 등 줄줄이 구속 "진짜 몸통은 따로 있다"

지난 7월28일에는 350억원 상당의 호남고속철도 전력선 입찰 담합을 한 8개 전선회사들이 경찰에 적발됐다. 이들은 호남고속철도 전력선 입찰 과정에서 낙찰사, 들러리업체로 역할을 분담해 투찰가를 담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적발된 담합업체는 일진전기·LS전선·넥상스코리아·대한전선·호명케이블·TCT·KTC·가온전선 등이다.

이 중 일신전기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135억원 규모의 중국산 조가선(주 전력선 지탱 및 전력 공급 보조역할)을 수입해 자사 제품으로 속여 납품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기준 미달인 중국산 저가제품이 호남고속철도 공사에 사용된 것을 의미했다.

또 철도궤도 시공업체인 삼표이앤씨는 안정성에 일부 결함이 있는 사전제작형 콘크리트 궤도(PST) 공법을 호남고속철도(익산∼정읍, 7.8㎞) 구간에 적용토록 했다. PST는 철로 레일 아래 자갈 대신 미리 만든 콘크리트 패널을 까는 공법이다. 하지만 PST 공법은 열차 하중 및 고온에 약해 레일에 균열이 발생하거나 콘크리트가 휘어지는 등 고속철도에 적합하지 않은 공법으로 알려져 있다.


검은돈 천국
줄줄이 구속

그런데 문제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이 PST 공법을 승인한 사실에 있다. 이 과정에서 검은돈이 오갔음은 말할 나위 없다.

한국철도시설공단 전 검사 성모씨는 삼표이앤씨로부터 PST 공법의 안정성 문제 등을 덮어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성씨는 감사원에서 건설·환경감사국장과 공직감찰본부장을 지낸 고위 공무원 출신이다.

또 최근 AVT사로부터 납품 청탁과 함께 3억8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권영모 전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도 호남고속철도 비리에 연루돼 있다.

그는 AVT사가 호남고속철도 레일체결장치 독점납품 계약을 맺자 AVT사를 대신해 김광재(사망) 전 한국철도시설공단 이사장에게 3000만원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뇌물수수 의혹을 받았던 김 전 이사장은 한강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13일에는 한국철도시설공단 호남본부 궤도부장 이모씨와 철도건설 용역업체 KRTC 감리단장 김모씨가 구속됐다. 이들은 한 철도시설업체로부터 호남고속철도 공구 설계 변경 등 편의를 봐주는 대신 수천만원 상당의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문제의 시설업체는 공사 지연에 따른 비용부담이 가중되자 콘크리트 타설 방법을 변경해 비용 감축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남고속철도 비리와 관련한 구속 릴레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7일에는 성능 미달인 AVT사 부품의 시험성적서를 위조해 적격 심사를 통과하게 해준 혐의로 한국철도기술연구원(KRRI) 책임연구원 박모씨가 구속됐다.

앞서 AVT사는 KRRI 측에 의뢰한 성능시험에서 부품 변형 등의 이유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재심사 과정에서 박씨가 만든 위조성적서로 적격 심사를 통과했고, 호남고속철도 독점납품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수주액은 450억원 규모로 전해졌다.

불량 레일에
위조성적서까지

이런 까닭에 호남고속철도의 안전성에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담합으로 얼룩진 기초공사와 불량 레일, 성능미달의 부품까지 '제2의 세월호'가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지난 7월 철도노조 호남지방본부는 "2017년 개통 예정인 호남고속철도가 건설 과정에서 담합과 부정, 비리, 부실시공으로 열차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며 "국토해양부는 비리와 부실 혐의를 철저히 밝혀내고 부실 시공된 불량자재들을 전면 교체하는 등 실효성 있는 안전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시속 300㎞로 달리는 고속열차는 조그만 결함이나 문제로도 대형 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원가절감을 이유로 하도급업체들을 괴롭혔고, 끝내는 도산시켰다.

국고로 지출된 공사비는 담합으로 뻥튀기됐으며, 현직 국회의원마저 철도비리에 연루돼 구치소에 갇혔다. 정치권에 흘러간 정체불명의 자금은 출처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다. 불행히도 '철피아'가 시작한 돈 먹는 레이스이자 국민의 안전을 담보로 한 '위험한 머니게임'은 그 실체가 규명되지 않고 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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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