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이 충격에 빠졌다. 창립 이래 줄곧 흑자를 기록하다가 지난해 처음 적자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지만 무려 50년 넘게 이어진 대기록이 깨진 점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다. 대한전선이 거둔 지난해 실적의 앞과 뒤, 그리고 그동안 쌓았던 무적자 기록을 오버랩해봤다.
지난해 2799억원 순손실…창립 후 첫 적자 전환
무리한 몸집 불리기 원인 “현금 유동성 빨간불”
대한전선이 지난 12일 2009년 실적을 공시했다. 공시에 따르면 대한전선은 지난해 매출 2조2600억원을 올렸다. 회사 측은 “당초 목표 1조8000억원보다 약 25% 초과 달성했다”고 강조했지만 이는 전년에 비해 7.5% 감소한 금액이다. 전선의 원재료인 동 가격이 평균 동가 대비 약 25% 수준으로 하락한 게 원인으로 분석된다.
여기저기 ‘빚잔치’
영업이익도 전년 대비 약 14% 감소한 705억원을 기록했다. 전선사업에서 전년 대비 20% 증가한 1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했지만 300억원 정도의 안양공장 임대료를 지급한 것이 감소 이유다. 대한전선은 2008년 당진 신공장으로 이전하기 위해 안양공장 부지를 매각했다.
문제는 대한전선의 순이익 부분이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마이너스 2799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708억원 순이익에서 순손실로 돌아선 것이다. 대한전선은 창립 이래 줄곧 흑자를 기록하다 지난해 처음 적자 전환된 점에서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대한전선은 ▲2001년 505억원 ▲2002년 633억원 ▲2003년 433억원 ▲2004년 448억원 ▲2005년 1455억원 ▲2006년 1044억원 ▲2007년 776억원 ▲2008년 708억원 등의 당기순이익을 거뒀다.
이전에도 마찬가지다. 대한전선은 ‘50년 연속 흑자’기업으로 유명하다. 1955년 설립 이후 지난해까지 단 한 해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그동안 1·2차 오일쇼크, IMF 등 국내 경제를 덮친 대내외 악재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이적인 대기록이다.
대한전선의 흑자 행진은 유동성 확보를 최우선으로 꼽은 고 설원량 회장의 경영방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설 회장은 과거 사업이 어려워질 때마다 은행을 비롯해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현실을 체험하면서 ‘평소 현금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고 한다.
2004년 설 회장이 타계하자 유가족들이 당시 최고액인 1355억원의 상속세를 주식 처분 없이 모두 현금으로 납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무리하게 몸집을 불리면서 ‘곳간’이 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여기저기 ‘빚잔치’를 벌여 차입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여기에 주력인 전선부문을 제외한 인수 기업 등 자회사들이 부진을 면치 못해 부담을 부채질했다.
대한전선은 기존 전선업 중심에서 해외투자, 건설, 홈네트워크, 레저 등으로 사세를 키우기 위해 2002년 무주리조트, 2003년 트라이브랜즈(옛 쌍방울), 2005년 대한위즈홈과 대한테크렌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심화된 2008년에도 TEC건설(옛 명지건설)과 남광토건, 한국렌탈 등을 사들였다.
이 과정에서 현금 유동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대한전선의 부채는 2005년 7713억원, 2006년 8383억원, 2007년 1조9095억원, 2008년 2조5161억원, 지난해 2조6414억원으로 공교롭게도 설 회장이 세상을 뜬 후 매년 늘어났다.
부채비율은 2005년 말 80%대에서 지난해 말 340%대까지 높아졌다. 부채비율이 200% 이상이면 자기자본에 비해 타인자본이 2배 이상 많다는 것으로 재무적 불안정 수준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1990년대 말 IMF 때 부채비율 200%를 재무건전성 기준으로 삼아 구조조정 대상기업을 선별했다. 당시 국내 대기업 평균 부채비율이 1000%를 넘었지만 대한전선은 200%대를 넘지 않았다. 오히려 풍부한 현금을 바탕으로 신규사업에 진출한 바 있다.
대한전선은 지난해부터 꽉 막힌 ‘돈맥경화’를 풀기 위해 현금이 될 만한 자산과 지분, 계열사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가 하면 본사 사옥까지 ‘급매물’로 팔아치우는 등 유동성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난해 말 신용평가기관인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한신정평가 등은 모두 대한전선의 신용등급 전망을 BBB+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등급전망이 ‘부정적’이란 것은 향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신용등급(BBB+)이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이들 기관은 “대한전선의 차입금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일부 유동성 확보 방안이 성사됐지만 영업을 통한 현금창출보다 과도한 이자비용을 부담하고 있어 당분간 재무구조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대한전선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대한전선 측은 적자 전환에 대해 “영업외 부문에서 지분법 평가손(홍콩투자법인을 통해 투자했던 프리즈미안의 간접금융상품 처분 손실 반영 등)과 대손상각(부동산개발 등과 관련한 투자자산에 대한 사전적 비용처리), 환차손, 이자비용 등이 반영됐기 때문”이라며 “그동안 재무적 부담이 되어 왔던 부실을 지난해 대부분 털어내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꽉 막힌 ‘돈맥경화’
유동성 확보에 대해서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대한전선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중장기 사업계획에 따라 비주력 사업 부문을 정리하거나 자산매각 등을 통해 현금을 마련하고 부채 감축 등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며 “올해는 재무안정성 확보와 더불어 주력사업을 중심으로 성장기반을 확고히 다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세계 전선시장이 대한전선의 주력인 초고압전력과 광통신 부문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외 생산기반을 축으로 전선부문에서 꾸준한 성장을 실현해 갈 계획”이라며 “남광토건, 대경기계, 온세텔레콤, 무주리조트 등 주요 계열사도 전선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전선 또 다른 기록은?
대한전선 ‘황태자’설윤석씨가 또 초고속 승진했다. 대한전선은 지난 1일 임원인사를 단행하면서 설씨를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입사 6년 만이다. 더구나 설씨는 전무로 승진한지 3개월 만에 부사장 자리에 오르게 됐다.
창업 2세인 고 설원량 회장의 외아들 설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3월 스테인리스 사업부 마케팅팀 과장으로 대한전선에 입사했다. 설씨는 당초 대학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 학업을 계속할 계획이었지만 설 회장이 2004년 3월 세상을 떠나자 유학일정을 접고 대한전선에 입사해 경영 수업을 받기로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이후 2006년 경영전략실 차장과 2007년 부장을 거쳐 2008년 9월 상무, 지난해 10월 경영기획담당 전무로 승진했다. 일각에선 설씨의 초고속 승진에 대해 자질 논란이 불거지는 등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편 설씨는 14.75%의 지분을 보유한 대한전선 최대주주다. 또 대한전선의 지주회사인 삼양금속 지분도 53.77%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