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서울대 총장되는 성낙인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고지식한 이미지 서울대 ‘과연 변할까’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서울대학교 신임 총장 최종후보자에 성낙인(64) 법과대학장이 선출됐다. 서울대 총장 선거는 교직원이 뽑는 직선제였지만 2011년 법인화가 되면서 이사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로 바뀌었다. 이번 총장은 서울대 첫 간선제 총장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성 후보자는 향후 교육부장관의 임명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을 거쳐 7월20일부터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서울대학교는 지난 19일 오후 4시 서울대 관악캠퍼스 호암교수회관에서 2014년도 제6차 이사회를 개최하고, 비공개 투표를 통해 제26대 총장 최종후보자에 성낙인 교수(64)를 선출했다. 2011년 법인화 이후 첫 간선제 총장이 등장하는 만큼, 학내에서 새 총장에 거는 기대와 관심은 여느 때보다 높다. 교수채용 비리, 인재 이탈, 국공립대 통합 논란 등으로 잡음이 끊이지 않은 서울대를 새 총장이 어떻게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도 초미의 관심사로 꼽힌다.

역대 총장 모두
순혈주의 못깨
 
앞서 총장추천위원회는 5월 초에 공과대학 재료공학부 강태진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법학과 성낙인 교수, 자연과학대학 물리·천문학부 오세정 교수를 3명의 총장후보자로 이사회에 추천하였으며, 이사회는 13일 개최된 제5차 이사회에서 면접을 실시하고, 이날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정관’에 따라 재적이사 과반수를 득표한 성낙인 교수를 최종 총장후보자로 선출했다.
 
성 후보자는 이날 비공개로 진행된 이사회에서 재적 15명 중 과반인 이사 8명의 표를 얻어 최종 후보자로 낙점됐다. 오세정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4표를, 강태진 재료공학부 교수는 3표를 각각 득표했다. 앞서 성 후보자는 대학의 분권형 운영체계 및 대학 자치, 학생상담학점제 도입을, 오세정 교수는 서울대의 공공성 강화와 입시제도를 통한 중·고교 교육의 정상화를, 강태진 교수는 학부교육 강화, 학내 연구진과 외부 산업을 잇는 SNU C&D(Connect & Development) 도입을 주요정책으로 내세웠다. 앞선 평가에서는 오세정 교수가 1위, 강태진 교수와 성 후보자가 공동 2위를 했다.
 

서울대는 지난 2월부터 오연천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과 외부 인사 30명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를 꾸려 새 총장을 뽑는 작업을 진행해왔다. 총장추천위원회는 12명의 예비후보자들을 대상으로 소견발표와 정책평가 등을 거쳐 4월 말 성 후보자와 강 교수, 오 교수를 후보자로 압축해 이사회에 추천했다. 성 후보자는 2012년 서울대가 법인화된 이후 처음 간선제로 치러진 선거를 통해 서울대호의 수장을 맡게 됐다. 이전 선거는 서울대 교직원들의 직선제로 치러졌다.
 
서울대는 국립대 체제에서 지난 1991년 이후 직선제 방식의 총장 선출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11년 법인화 이후 간선제로 선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성낙인 후보자는 그동안 총장추천위원회가 주최한 소견발표회와 정책평가회에서 “인간성 회복과 인간 존엄이라는 지성인 최고 덕목의 구현을 목표로 선한 인재를 양성하며, 모교의 모든 법인을 아우르는 거버넌스를 재정립하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헌법학자인 성 후보자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의 자율성과 발전 기반을 조성하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학자치의 이념을 구현하겠다”며 “단과대학과 대학원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해 분권형 운영체제를 확립하겠다”라고 말했다. 또한 서울대 출신 교수 임용을 확대하고 연 500만원의 교수 바우처 시행, 서울대 과밀화 해소를 위해 대운동장 지하개발 등을 제안했다.
 
 
그는 “서울대병원의 법정 유형을 연구병원에서 교육병원으로 바꾸면 연 460억원가량 내는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며 관련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 국고 출연금을 안정적으로 지급받기 위해 매년 15% 증액이 가능하도록 하는 입법조치 강화 방안도 공약했다. 임기 4년간 발전기금 6000억원을 달성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서울대가 2020년에 세계 20위 대학, 2030년에 세계 10위 대학으로 부상하는 ‘2020-20 프로젝트’도 강조했다.
 
이와 더불어 인문계 출신 총장으로서 간과하기 쉬웠던 기초학문 육성과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다보니 이사회 최종 투표에서도 법적 한계를 보완하면서 기초학문을 육성할 수 있는 후보라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내에서 성 후보자는 의사결정 속도가 빠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포용할 줄 아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K·S 출신
화려한 경력
 

과거 성 후보자와 대학 내에서 업무를 해 본 경험이 많은 서울대의 한 교수는 “성 교수는 굵직굵직한 선을 긋는 사람이고 세세한 부분은 실무진에 전적으로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서울대 교수는 “아무리 어려운 사안이 있더라도 시간을 안 끌고 결정하기 때문에 밑에서 일하기 편하다”며 “정·관계 인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낸다는 것도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성 교수에게는 오는 7월 서울대 총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학내 구성원들의 가장 큰 지지를 받지 못한 후보였기 때문에 성 후보자가 내세운 정책과 비전에 반대하는 학내 세력을 설득하고 포용해 나가는 작업을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 교수는 지난 4월 총장추천위원회 1차 평가에선 1위를 차지해 여유 있게 총장예비후보 5명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학내 구성원으로 이뤄진 정책평가단 투표에선 꼴찌에서 두 번째인 4위를 차지했다.
 
직선제서 간선제로 바뀌고 첫 수장
앞으로 당면과제 산적 “전체 개조”
 
성 후보자는 교육부의 임명 제청과 대통령 임명 절차를 기다리고 있지만, 최종후보자가 사실상 차기 총장이 된다. 신임 총장의 임기는 다음달 20일부터 4년이다. 이번 총장 선거는 서울대 법인화 이후 처음 치러지는 간선제 선거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전 총장 선거는 서울대 교직원이 참여하는 직선제로 치러졌다.
 
최근 선출된 진보교육감의 ‘국공립대 통합’ 공약에 따라 서울대 폐지론이 불거지는 가운데 신임 총장에게는 서울대의 위상을 지켜야 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성 후보자는 지난 2010년 25대 총장 선거에서 한차례 고배를 마신 적이 있다. 그러나 재수 끝에 서울대 제26대 총장에 올랐다. 
 
성 후보자는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82년 동대학원에서 헌법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87년 프랑스파리2대학교에서 국내공법(헌법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교육개혁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2000년 서울대 법대 교무부학장·법학부장을 거쳐 2004년 법대 학장을 지냈다. 2002년 서울대 교수협의회 이사와 2008년 서울대 평의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저명한 헌법학자인 성 신임 총장은 2005년 헌법재판소 자문위원과 2006년 한국공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지냈다. 2009년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95년 김영삼 정부에서 대통령자문교육개혁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2010년에는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와 통일부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성 후보자는 2005년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황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12년 한국헌법학회와 지난 2월 대한민국법률대상위원회에서는 각각 학술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학자일 때 쓴 저서로는 <프랑스헌법학과 언론정보법> <선거법론> <한국헌법사> <헌법소송론(공저)> 등이 있다.
 
“국민의 사랑받는 
대학교 만들겠다”
 

서울대 총장 선거의 간선제 전환은 정부가 국립대 총장 직선제의 폐단인 돈선거와 파벌주의 등을 고치기 위해 권고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서울대는 올해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도 ‘KS(경기고·서울대)’ 총장 전통이 이어졌다.
 
실제 최종 후보에 오른 3명 모두 ‘KS(경기고·서울대)’ 출신으로 순혈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역대 서울대 총장 7명 중 5명이 경기고 출신이다. 22대 이기준(서울대 사대부고), 20대 이수성(서울고) 총장만 다른 고등학교를 나왔다.
 
선출 규정을 정하는 문제도 기준이 없다 보니 후보가 원하는 대로 이뤄져 지나치게 복잡한 룰이 탄생한 점이나 흑색선전, 포퓰리즘이 사라지지 않은 점 등도 첫 간선제에서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당면 과제
산적한 서울대
 
김태원 새누리당 의원이 교육과학기술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기준 서울대 전체교원 2164명 중 1832명(84.7%)이 모교 출신이다. 이는 39개 국립대 평균(31.9%)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지난해 상반기엔 서울대 신규채용 교수 48명 가운데 36명이 서울대 학부 출신이었으며, 서울대 학부 출신 교수 중 36%는 석·박사 학위도 모두 서울대에서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시내 모 대학의 한 교수는 “채용 과정의 폐쇄성은 인맥으로 점철된 서울대 순혈주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러한 구조의 개혁 없이 서울대의 혁신은 무의미하다”고 꼬집었다.
 

신임 총장이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6·4 지방선거 당시 진보교육감들은 서울대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를 공동 공약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서울대 학생들의 거센 반대가 이어지고 있어 이들을 달래고 서울대의 위상을 지키는 것이 신임 총장의 첫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학생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신임 총장에게 요구되는 조건으로 ‘강한 리더십’을 꼽았다. 서울대 3학년생 김모씨는 “사교육 걱정 없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서울대를 없앨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가”라며 “이번 신임 총장은 과감한 결단력과 판단력으로 과거부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국공립대 통합 논란을 확실히 잠재워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 유모씨 역시 “역대 총장들에게는 과감한 리더십이 없었다”며 “법인화 이후 첫 간선제 총장인 만큼 학생들을 위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앞서 서울대 교수협의회는 역대 총장 7명에 대한 평가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번 간선제 이전에 직선제로 선출된 총장들의 공약과 업적을 평가해 ‘성공한 총장’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정재 서울대 교수협의회장은 지난 4월 5일 “최근 열린 총회에서 교수협의회(교협)가 역대 총장들을 평가해 공과를 제시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며 “이를 받아들여 직선제로 선출된 총장들이 제시했던 공약과 업적을 평가할 방침이다. 평가 결과가 나오면 ‘잘한 총장’이나 ‘못한 총장’의 모델이 제시될 것”이라고 밝혔다.
 
 
교협은 1990년 이후 임용된 교수들도 많기 때문에 평가 범위를 ‘직선제 이후 선출된 총장’으로 제한할 계획이다. 서울대는 1991년부터 2011년 법인화 이전까지 직선으로 7명의 총장을 선출했다. 역사상 첫 직선 총장이 된 인물은 제19대 총장(1991∼1995년)인 고 김종운 서울대 명예교수다. 교협은 김 전 총장을 비롯해 ▲20대 이수성(1995년 3∼12월) ▲21대 선우중호(1996∼1998년) ▲22대 이기준(1998∼2002년) ▲23대 정운찬(2002∼2006년) ▲24대 이장무(2006∼2010년) ▲25대 오연천(2010∼2014년) 총장에 대한 평가를 추진하기로 했다.

법인화 2기
순항 여부 주목
 
교협은 평가 과정에서 총장들의 공과가 균형있게 드러나도록 할 방침이다. 일례로 23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경우 재직 중 지역균형선발제도를 도입해 서울대의 위상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4년 당시 거세게 불었던 ‘서울대 폐지론’을 비교적 선방했다는 분석도 있다. 반면 대학 입학정원을 줄이는 구조개혁을 단행, 결과적으로 서울대 연구인력 규모를 축소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교협은 올해 안으로 평가문항을 개발, 전임교수 2178명을 대상으로 평가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교협이 평가에 착수할 무렵에는 이미 법인화 이후 첫 간선제 총장이 선출돼 있을 것”이라며 “차기 총장에게 역대 총장들에 대한 서울대 교수사회의 평가 결과를 제시하면 향후 대학을 이끄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khlee@ilyosisa.co.kr>

 
[성낙인은?]
 
▲경남 창녕
▲경기고 졸업
▲서울대 법학과 학사, 동대학원 석사, 박사 수료
▲프랑스 파리2대학교 법학 박사
▲서울대 법과대학장
▲한국법학교수회장
▲한국공법학회장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장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
▲대통령자문교육개혁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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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