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건너온 ‘다국적 조폭’ 대해부

겁 없는 동남아 칼잡이 대한민국 밤거리 설친다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한국에도 외국인 폭력조직이 스며들었다. 익히 알려진 중국 삼합회, 일본 야쿠자, 러시아 마피아 등 전통 조직들 외에도 이제는 중국 흑사파, 베트남,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등의 신흥 조직들이 곳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 이들의 세력 확장으로 수사당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21세기 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해야 할 판이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해외 폭력조직으로는 국제적 조직을 갖춘 중국 삼합회, 러시아 마피아, 일본 야쿠자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엔 신흥 폭력조직이 점차 비대해지면서 다양한 외국 폭력조직이 활개를 치는 형국이다. 이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국내 조직과 손을 잡기도 한다. 이처럼 외국인 폭력조직이 국내로 대거 잠입하면서 각종 사회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최강 외국조폭
‘연변 흑사파’
 
2009년 8월, 서울힐튼호텔의 ‘세븐럭’ 카지노 앞에서 조선족 조폭들이 화교출신 조폭 두목 회칼로 납치하려고 했으나 마씨가 호텔로비로 도망가는 바람에 힐튼호텔 로비는 아수라장이 됐다. 조선족 조폭들은 마씨를 따라가면서 회칼을 휘둘렀다. 조선족 조폭이 노린 것은 마씨가 가지고 있는 카지노 기프트 카드 유통권이었다. 카지노에서 VIP회원들에게 사은품으로 주는 것으로 알짜배기 사업권이었다.
 
이 사건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해온 조선족 조폭이 서울 도심 진출과 함께 카지노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외국인 조폭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잔인하기로 소문난 게 연변 흑사파다. 중국 북동부의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등 3성의 조선족계 흑사파 조직원들은 한국에 들어와 현재는 16개 조직에 2300명의 조선족 흑사파 조직원들이 조직력을 뻗치며 활개를 치고 있다.
 

국내 활동 외국인 조폭 중 절반이 조선족이다. 여기서 가장 강력한 조직은 연변흑사파, 흑룡강파, 뱀파, 호박파 등이다. 이 가운데 현재 가장 잘나가는 조직인 ‘연변흑사파’는 2001년 흑사회 행동대장 출신의 조선족 양씨가 부산항을 통해 밀입국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05년 양씨는 조선족 31명을 모아 흑사회를 모방한 ‘연변흑사파’를 결성하고 조선족 밀집지역인 서울 가리봉동 장악에 나섰다. 이들이 가리봉동을 장악하는 과정을 전설처럼 ‘가리봉 잔혹사’라고 한다.
 
이들의 활동방식은 중국 본토 흑사회처럼 등에는 칼, 다리에는 도끼를 차고 다니면서 가리봉동 일대를 휩쓸었다. 이들은 업주와 여성 종업원들의 약점을 이용해 공짜 술을 얻어 먹으며 돈을 뜯어냈다. 중국에서 게임기를 들여와 마작방을 운영하며 돈을 딴 사람들을 협박해 다시 돈을 가로채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가리봉동의 업주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설사 추방된다 해도 중국에서 이름을 바꾸는 등 호적을 세탁한 뒤 다시 돌아올 게 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전을 위해 방검복을 입고 영업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알려졌다. 
 
폭력조직도 이제 글로벌·다문화 시대
신흥파 대거 상륙…통제불능 상태 우려
 
이들은 손도끼를 크게 휘두르며 ‘피를 뒤집어쓸 때까지’ 싸우는 잔인함을 보여 타 외국인 폭력 조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연변흑사파’는 무서운 확장으로 일대의 군소 조직들을 하나 둘씩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리고 2006년, 가리봉동의 맹주였던 ‘흑룡강파’ 사무실에 흑사파 조직원들이 손도끼와 회칼을 들고 나타나서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전쟁 선포나 다름없었다. 곧바로 복수에 나선 ‘흑룡강파’ 조직원은 호프집에서 ‘연변흑사파’ 두목의 배를 칼로 찔렀다. 이후 8일 만에 반격에 나선 ‘연변흑사파’는 흑룡강파 행동대장 조선족 A씨를 납치해 흉기로 찌르고 발목을 부러뜨려 5급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린 뒤 돈을 받고 풀어줬다.
 
이때부터 가리봉동은 ‘연변흑사파’가 접수하게 되며 서울 영등포, 구로동, 건대 일대, 가양동, 창원, 일산, 용인, 인천, 울산, 부산, 김해 등지의 전국 조선족 밀집지역들이 흑사파 수중에 들어갔다. ‘연변흑사파’는 국내 외국인 조직에서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이들은 외국인 조폭계의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최근에는 서울 강남 룸살롱이나, 카지노, 오락실 등에 조직원들 진출시키는 등 강남 유흥가 장악까지 시도하고 있어 국내 조폭의 아성까지 무너뜨릴 기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돈을 받고 폭력을 일삼고 있다. 팔 절단 250만원, 다리 절단 500만원, 청부살인 1000만원 등이다. 
  
또한 국내 조폭들과 연대도 모색하고 있다. 한국어에 능숙한 조선족 출신들로 구성된 연변 흑사파는 오래전부터 서울 등지에서 활동 무대가 겹치는 국내 조폭과 연합전선을 펴고 있다. 조선족 종업원이 많은 오락실, 유흥업소에서 사고가 터지면 눈개 조폭과 연변흑사파가 긴밀히 협조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고 친 조직원들을 서로 숨겨주는 식의 공생관계도 맺고 있다고 전해진다.

흑사파 라이벌
‘베트남 하노이파’
 
최근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의 한 유흥가에서 접대부 일을 마치고 나온 베트남 여성이 낯선 남자 3명에게 납치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괴한들은 여성을 부천의 한 은신처에 사흘 간 감금했고 베트남에 있는 그녀의 가족에게 협박 전화를 걸었다. “당장 650만원을 보내지 않으면 성매매 업소에 팔아버리겠다”. 깜짝 놀란 가족들은 급하게 돈을 마련해주고 붙잡혔던 여성은 풀려났다.
 
‘하노이파’는 외국인 조폭 중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연변흑사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이미 베트남 조폭들이 미국의 암흑가를 평정했을 정도로 악명이 높다. 하노이파는 베트남 북부 하노이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밀입국한 현지 조직원이 불법체류자와 근로자들을 규합해 세력을 불리고 있는데, 서울 구로동과 경기도 포천, 안양, 안산, 경남 창원시 공단 밀집지역에서 주로 활동한다.
 
‘하노이파’는 2000년 이후 소규모로 활동해오다 점차 전국화되어 전국 산업단지 주변을 중심으로 점조직화 됐다. 순수 조직원 및 협력자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10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리사채, 납치폭행, 인질강도, 성매매, 마약밀매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연 500%가 넘는 살인적인 이자로 도박자금을 빌려준 뒤 갚지 않으면 본국의 가족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도 한다. ‘하노이파’는 총책(두목), 중간간부, 행동대원, 유인책(베트남 여성) 등으로 역할을 분담한다. 보통 여성 조직원이 남성들을 유혹한 뒤 범죄를 저지른다.
 
한국형 조폭
‘방글라데시 군다파’
 
일부 베트남인들은 외국인 사회에서 일부러 ‘하노이파’를 사칭하고 다니기도 한다. 폭행사건으로 경찰에 입건된 베트남인들은 자신을 ‘하노이파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해진다. 물론 ‘하노이파’가 아닌, ‘뒷골목 양아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하노이파’의 위세가 대단한 것이다. 또한 베트남 계열 조폭 중에는 ‘호치민파’와 ‘허이세이파’ 등도 최근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외국계 한국형 조폭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의 ‘군다파’는 방글라데시어로 ‘폭력배’ ‘깡패’를 의미한다. 이들은 다 같이 합숙생활을 하며 90도 인사 등 국내 조폭의 행동 및 생활방식, 예의, 지휘체계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조폭으로 알려진다. ‘군다파’는 보통 20명의 조직원이 합숙생활을 하기 때문에 위계질서 등 명령계통이 타 외국인 폭력조직에 비해서 상당히 체계적인 편이다.
 
이러한 ‘군다파’는 방글라데시인들 거주지마다 있다. ‘안산 군다’ ‘서울 군다’ ‘수원 군다’ 등 지명을 딴 조직과 ‘앨런 군다’ 등 두목 이름을 딴 조직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불법 체류자를 상대로 돈을 뜯어내고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외국인 조폭보다 세력은 미약한 편이지만 국내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 중 대다수는 한국에서 추방당한 뒤, 여권을 위조해 다시 국내로 들어온다.


국내 조직과 손잡고 연대·공생
세력 확장으로 수사당국 골머리

‘가디언스파’는 필리핀 노동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조직으로 최근 떠오르고 있는 신흥 필리핀 조폭이다. 신체부위의 문신이 크면 클수록 고위 간부라고 한다. 문신은 주로 머리, 손목, 어깨에 있으며 문신모양은 해적이다. ‘가디언스파’는 군소조직인 ‘일롱고파’를 흡수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가디언스파’는 당초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자(불법체류자 포함)의 임금을 착취할 목적으로 들어왔다. 이후 조직원이 수백 명 이상으로 불어났고, 조직 운영을 위해 불법 도박장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안산을 거점으로 불법 게임장, 지하 카지노를 운영하며 활동영역을 넓혔다.
 
‘가디언스파’ 조직원들은 필리핀에서 권총살인을 저지르고 국내에 취업비자로 도망쳐온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권총사용에 능하다. 이들은 평소에 식칼과 송곳, 드라이버 등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총기 무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마약 담당
'태국 깽야이파'
 

‘깽야이파’는 태국 조폭으로 최근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조직 중 하나다. 1m가 넘는 길이의 정글도와 야구방망이로 무장하고 다니면서 태국산 마약인 ‘야바’를 국내로 밀반입 하고 있다. ‘야바’는 태국, 미얀마, 라오스에서 생산되는 마약으로서 국내에 거주하는 태국인들 중 대부분이 마약인 야바를 신경안정용으로 복용하고 있다. 이 ‘야바’의 약효는 36시간 지속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깽야이파’ 외에도 위장결혼 수법으로 국내 업소에 태국 여성을 공급하고 있는 태국 폭력조직 ‘싸만코차호타이파’와 태국인 업소를 상대로 금품을 갈취하는 ‘딸라타이파’도 최근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 ‘야쿠자’와 러시아 ‘마피아’는 이들과 달리 호텔 사업이나 벤처기업 인수,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다. 세계에서 메이저급으로 통하는 이들은 한국을 상대로 합법적인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즈베키스탄, 자카흐스탄 등 구소련 연방국가들과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폭력조직도 활개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산간지방과 변두리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아직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자국민과 한국 기업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다. 외국 신흥 조폭들의 세는 아직은 ‘패거리’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다. 하지만 점차 조직 형태를 발전시키는 모양새다.
 
이처럼 외국인 조폭들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지만, 이들을 퇴치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 베트남, 필리핀, 방글라데시 등의 국가들은 주민등록시스템이 취약해 신분 위장이 간단하다. 입국 단계에서 조폭인지 노동자인지 분류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지문날인을 하지 않은 외국인들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여차하면 본국으로 돌아가 수사 자체가 불가능한 것도 문제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범죄자를 가려내 추방을 해도 이름을 바꾸거나 위조여권을 이용해 재입국하는 외국인이 연간 2000명이 넘는다. 다문화 조폭에 대한 장기간 기획수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대로 가다간 ‘외국산 주먹’에 벌벌 떠는 시대가 도래 할 수도 있다.
 
‘2013경찰백서’에 따르면 경찰은 2012년 한해 동안 강력한 단속활동을 전개한 결과 신흥폭력조직 53개파 1296명 등 총 3688명을 검거해 649명을 구속시켰다. ‘2012년 경찰범죄통계’에 따르면 외국인범죄자의 연령대는 주로 2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이며, 주로 일용직 노동자였다. 외국인범죄자의 공범관계를 살펴보면 직장동료인 경우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고향친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범죄자의 국적은 중국이 57.4%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베트남, 필리핀, 몽골, 태국 등이 뒤를 이었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국내 체류 외국인은?
 
법무부 출입국과 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으로 등록 외국인은 101만2010명으로 집계됐다. 2003년 43만7954명, 2006년 63만1219명, 2009년 87만636명, 2012년 93만2983명, 2013년 98만5923명으로 꾸준히 늘어 마침내 올해 사상 처음으로 100만명을 돌파했다.
 
우리나라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2%에 달하는 수준이다. 우리 사회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다인종·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취업자 수는 지난해 5월 기준으로 76만여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3%에 달할 만큼 높은 수치를 보이지만,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는 여전하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다문화 포용성은 조사 대상 50여개국 중 몇 년째 꼴지로 나타나고 있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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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