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기사회생한 남재준

버틴 원장님…정권 약점 쥐고 있나?

[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국정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남재준 국정원장의 거취가 초미의 관심으로 떠올랐다. 아직까지는 유임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기 때문에 언제 다시 해임론이 고개를 들지 알 수 없다.

이미 야권에서는 특검 카드를 꺼내드는 등 총력전을 선언한 상황이다. 반면 여권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주류·비주류 간 온도차가 감지된다. 얽히고설킨 정치권의 이해관계는 또 다른 '대형사건'을 예고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괴물'이 된 국정원이 있다. 정가에서는 "국정원을 무너뜨리려면 청와대를 먼저 무너뜨려야 할 것"이라는 뼈 있는 말이 나온다. 이렇듯 박근혜정부의 '중추'는 지금도 꼿꼿하다.

국정원의 간첩사건 증거조작 수사결 과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사과했다. 지난 15일 국무회의를 주재한 박 대통령은 "유감스럽게도 국정원의 잘못된 관행과 철저하지 못한 관리체계의 허점이 드러나면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사과
남재준 꼿꼿

비록 공개석상은 아니었지만 박 대통령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이는 박근혜정부 출범 후 4번째 있는 일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정부조직 개편안과 관련한 대국민담화 발표 이후 윤창중 성추문 사태, 기초연금 공약후퇴 논란 당시 사과의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태풍의 한 가운데 인물이 살아남은 사례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유일하다. 앞서 정부조직 개편안과 관련한 마찰이 있었을 때는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가 사퇴했다. 또 윤창중 성추문 사태 때는 윤창중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옷을 벗었다. 아울러 기초연금 공약후퇴 논란 때는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면서 물러났다.


이들 모두는 '청와대의 의지와 동떨어진 행동으로 권력에서 멀어졌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남 원장만큼은 예외적으로 면죄부가 떨어졌다.

지난달 10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검찰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실제 수사 결과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국정원이 간첩 행위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문서를 위조하는 등 범법행위를 했다는 사실이 탄로 난 것이다.

검찰이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한 후 서천호 국정원 제2차장은 사표를 제출했고 청와대는 지체 없이 사표를 수리했다. 그리고 다음날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법원 선고가 있기 전 유감을 표명했다. 이는 청와대가 서둘러 사과하고 적절한 선에서 책임을 따지는 게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박 대통령 입장에서도 자신의 임기 내에 일어난 일인 만큼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관측됐다.

청와대 차원
사표 반려한 듯

그러나 정치권 안팎에서 요구된 '남재준 해임'은 수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논란거리다. 거듭된 실책에도 박 대통령은 남 원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측에서 가이드라인을 정하자 남 원장도 거침없었다. 그는 이날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진 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A4 용지 1장 남짓한 대국민사과문을 들고 국정원 본원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박 대통령의 사과 발언보다 1시간 앞선 시각, 남 원장은 "증거서류조작 혐의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리게 된 것을 머리 숙여 사과한다"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국정원장으로서 참담하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남 원장이 썼던 '뼈를 깎는 개혁', '환골탈태' 등의 표현을 박 대통령도 똑같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의전 구조상 표현이 중첩된 것을 미뤄봤을 때 청와대와 국정원의 사전 교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내부적으로 남 원장의 유임을 결정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의중이 남 원장에게 전달됐고, 이를 확인한 남 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왜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 원장을 감싸고도는 것일까.

남 원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전사'라고 부른다. 국정원장에 취임한 후 "나는 전사가 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한 그다. 남 원장은 쉽사리 남들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아부를 하는 스타일도 아니다. 오히려 남 원장은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나친 원칙주의 탓에 주위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한다는 소문이 적지 않다. 주변에 적도 많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그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등을 돌리면서 종국에는 계급장을 떼야했다.

지난 2004년 있었던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하면 남 원장은 육군 장성 진급비리 괴문서 사건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되자 전역지원서 제출로 맞섰다. 직을 걸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여러 사정을 고려해 남 원장의 사표를 반려했다.

'간첩사건 증거조작' 사실상 면죄부…경질론 선긋기
청와대-국정원 기자회견 앞서 사전 교감설 '솔솔'

그러나 남 원장은 노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군 수뇌부들을 초청한 골프대회에는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사석에서 참여정부의 국방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국방부 문민화와 군 검찰 독립 등의 사안을 성토한 이른바 '정중부의 난'에 남 원장이 연루되기도 했다. 물론 남 원장은 해명 과정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남 원장은 육군 장성 진급비리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책임을 진다"며 군을 떠났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자괴감을 갖는다"던 그였다. 이로부터 10년 뒤 남 원장은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남 원장의 선택은 10년 전 과거와 달랐다. 지금 그는 전방위 사퇴압박을 정면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남 원장의 '노욕'인 것일까.

정권 지킨 공신
토사구팽 어려워

복수 관계자는 남 원장이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남 원장은 증거조작 파문이 불거졌을 때부터 거취 문제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는 수사결과 발표 직후에도 청와대 쪽에 사의 표명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재신임했다.

남 원장의 유임 배경을 놓고 여러 가지 설이 불거졌다. 가장 유력한 설은 '공신설'이다. "정권에 큰 공을 세웠는데 어떻게 취임 2년 차에 토사구팽을 할 수 있겠냐"는 설명이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16일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남 원장이 (과도 있지만) 그동안 공도 많았다"며 "임기를 잘 마쳤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 원장은 박근혜정부가 중대한 기로에 설 때마다 파격 행보로 청와대를 도왔다.

일례로 국정원은 지난해 국가기밀문서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언론과 정치권에 공개했다. 당시 여권은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를 남 원장이 NLL 국면으로 단박에 전환한 것이다.


또 남 원장은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진행과정에서 부하 직원에게 진술 거부를 지시하거나 출석에 불응토록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정상적인 수사를 방해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뒷조사에 가담한 것으로 확인된다. 정보를 수집한 컨트롤타워는 청와대였지만 국정원이 외곽에서 지원했다는 게 정설이다. 박근혜정부의 눈엣가시였던 채 전 총장을 쫓아낸 1등공신이 남 원장인 것이다.

더불어 남 원장은 이석기 진보당 의원이 연루된 이른바 RO 사건으로 공안몰이에 성공했다. 만약 이번 유우성 사건까지 랑데부가 됐다면 야권의 지방선거 패배는 한층 가시화될 터였다. 증거조작 파문은 남 원장 입장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였겠지만 그간 국정원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돼 왔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였다.

관련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이 정보에 의존한 통치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직 청와대 출신 한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보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보고받은 정보에 좌지우지 될 때 공무원들의 사기는 저하되고 정상적인 업무 처리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입장에서 정보를 쥐고 있으면 공무원들을 다루기 쉽다. 정적이 되면 언제든 치명적인 정보로 상대를 쳐낼 수 있는 까닭이다. 채 전 총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공무원들은 '윗선'의 눈치를 보게 된다. 또 정보의 맛을 본 대통령은 조직 장악에 필요한 정보를 갈구하게 된다. 이럴 때 가장 신뢰받는 기관이 정보를 다루는 국정원이란 것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워낙 의심이 많은 스타일이다보니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VIP(대통령)와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춘 남 원장을 해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즉 오랜 청와대 생활로 '정보가 갖고 있는 힘'을 알고 있는 박 대통령 입장에서 핵심 권력기관을 믿지 못할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때문에 오히려 국정원 측에서 박 대통령과 관련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남 원장과 자칫 틀어졌을 경우 남 원장이 노 대통령을 대화록 공개로 공격했던 것처럼 박 대통령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겠냐는 추측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둘의 관계는 원만한 것으로 보인다. 한 국정원 관계자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 원 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은 충성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코드가 달랐던 '노통'과는 달리 '박통'과는 합이 잘 맞는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지방선거 앞두고
공안사건 터질까

올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형 공안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관측도 남 원장의 유임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난해부터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아직 정확한 실체는 나오지 않았지만 RO 사건에 버금가는 파괴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복수 사정기관 관계자는 "서울중앙지검과 기무사가 국정원을 돕는 형태로 수사팀을 꾸려 시기를 조율 중"이라고 확인했다. 피의사실이 공표되면 또 한 번의 '공안 광풍'이 몰아칠 것으로 보인다. 수사 책임자인 남 원장의 역할이 누구보다 중요한 이유다.

지난 한 해 동안 남 원장은 정치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여의도 사정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올 초 기자와 만나 "정치를 남재준이 다 했다"고 했을 정도다. '남재준 해임론'도 한 주 사이 쏙 들어갔다. 키를 쥐고 있는 국회 상임위 개최도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박근혜정부의 호위무사인 남 원장. 호위무사의 죽음은 곧 '높은 분'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야권은 어찌 보면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angeli@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