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드러난' 롯데 상납고리 실체

얽히고설킨 비리사슬…신동빈 회장 충격 받았다

[일요시사=경제1팀] 재계서열 5위. 롯데그룹이 사상 최악의 ‘뇌물 스캔들’에 휩싸였다. 납품업체로부터 청탁 뒷돈을 받았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검찰수사는 주력계열사 핵심 CEO를 넘어 그룹 전체를 흔드는 모양새다. 롯데는 망연자실한 표정. 가뜩이나 ‘윤리경영’을 강조해온 그룹 이미지에 ‘뇌물 기업’이라는 오명이 붙었다. 공교롭게 롯데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뇌물에 연루된 전력이 있다.

지난 1일 롯데그룹이 발칵 뒤집혔다. 롯데홈쇼핑 납품비리를 수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부장 서영민)는 이날 납품업체로부터 거액을 받아 챙기고, 회사 돈을 빼돌린 혐의로 롯데홈쇼핑 전ㆍ현직 임직원 4명을 구속했다.

뇌물 뿐 아니라
자금 횡령까지

비리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중소 납품업체로부터 청탁을 댓가로 뒷돈을 받은 뇌물 사건, 다른 하나는 회삿돈을 빼돌린 횡령 건이다.

뒷돈을 챙긴 뇌물 사건의 주요 인물은 이모 전 이사와 상품기획자 정모 전 팀장이다. 이 전 이사는 2008년 12월∼2012년 10월 약 4년간 각종 생활용품을 중간 유통하는 업체 5곳으로부터 방송출연 횟수와 시간을 편성하는 데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9억원을 받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정 전 팀장은 2008년 12월∼2010년 1월 약 2년간 유통업체 한 곳으로부터 고급 승용차 한 대를 포함해 2억7000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가족, 친인척 등 명의로 차명 계좌를 만드는 수법으로 뇌물 통장을 관리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이들이 받은 뒷돈의 규모가 20억원이 넘는다고 보고 있다.


횡령사건에 연루된 인물은 롯데홈쇼핑 총무·관리 파트에 있는 이모 방송 본부장과 김모 고객지원부문장이다. 이들은 롯데홈쇼핑 본사 사옥 이전 과정에서 인테리어업체로부터 4억9000만원 가량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2010년 롯데홈쇼핑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양평동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 본부장 등은 당시 임대 중이던 건물의 인테리어를 원상 복구하는 과정에서 업체에 비용을 과다지급한 뒤 차액을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회사자금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이 챙긴 횡령 금액은 용역·공사 대금 청구건을 포함해 총 6억5000만원에 달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롯데 홈쇼핑 비리는 몇몇 부정한 직원의 단순 비리로 치부되는 듯 했다. 이후 사건의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검찰이 이 본부장 등이 횡령한 돈의 용처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수 억원의 돈이 롯데그룹 최대계열사인 롯데쇼핑을 이끌고 있는 신헌 사장 계좌에 흘러들어간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구매 담당자의 납품 비리가 회사 차원의 구조적인 비리사슬로 엮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 ‘뇌물 사건’ 후폭풍은 ‘롯데 그룹 상납고리’와 맞물려 일파만파로 번지는 분위기다.

최고위 임원
비리사슬 몸통?

신 사장은 이번 사건이 벌어졌던 2008∼2012년 사이 롯데홈쇼핑 대표이사로 재직한 바 있다. 사정기관과 업계에 따르면, 신 사장은 당시 이들이 횡령한 돈의 상당액을 현금 뿐 아니라 신용카드 형태로 받아서 썼다. 외형상으로는 업무추진비 명목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신 사장 신용카드에 연결된 계좌가 이 본부장 명의의 통장 등 횡령한 돈이 들어있는 ‘비자금 창구’였다고 보고 있다.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대부분 상납 경로의 시작이 김 부문장에서 비롯됐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 본부장이 경영지원 부문장을 지낸 2009∼2011년 당시 총무팀장이었던 김 부문장에게 업체에게 납품단가를 10∼15% 과다 지급하게 만든 뒤 그만큼 되돌려 받는 수법으로 회삿돈을 빼돌리라고 지시했고, 이를 비밀 계좌에 보관토록 했다는 것이다.

‘뇌물 스캔들’롯데홈쇼핑 전현직 임원 구속
신동빈 회장 측근 신헌 사장까지 ‘일파만파’

이 본부장은 이후 비자금이 마련된 비밀 계좌에서 현금을 꺼내 수시로 신 사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횡령한 자금이 들어있던 이 본부장 계좌의 신용카드도 신 사장이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또 뒷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이 전 이사도 사내에서 ‘신 사장 라인’으로 분류된 대표 인사로, 별도로 신 사장에게 뒷돈 일부를 상납했는지 조사 중이다. 이어 신 사장이 임직원들로부터 건네받은 돈을 그룹 내 다른 고위층이나 정관계 인사에 로비 명목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여부도 살펴보고 있다.

사정기관 한 관계자는 “신 사장이 애초에 횡령을 전제로 임직원들과 공모한 것인지, 신 사장이 또 다른 이해관계자에게 상납했는지 여부가 향후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라며 “롯데홈쇼핑 현직 임원과 롯데백화점 현직 사장까지 연루된 조직적인 횡령사건으로 번지고 있어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회장 최측근
도대체 왜…

롯데그룹은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내부에서는 창사 이래 최악의 스캔들이 터졌다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신 사장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져있다.

롯데홈쇼핑 대표였던 신 사장이 자신보다 먼저 임원이 된 노병용 롯데마트 사장, 선배인 소진세 롯데슈퍼 사장 등을 제치고 2012년 2월 롯데쇼핑의 백화점부분 사장 자리를 꿰찬것도 신 회장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신 사장은 취임 후 ‘젊고 패션이 강한 백화점’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며 소통경영, 현장경영, 윤리경영 등을 강조해왔다. 특히 직접 고객들 앞에서 마술쇼를 기획하는 등 뛰어난 소통능력과 함께 ‘스타 CEO’기질을 보여왔다.

그렇기 때문에 신 사장의 뇌물 스캔들 연루는 그룹 내부에서 더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고 있다. 신 사장 역시 그룹 비자금 조성에 이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나돌고 있다.

롯데그룹의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는 반응도 있다. 롯데그룹은 비정규직 직원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직원 평균 연봉이 3801만원에 그쳐 10대 그룹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롯데 임직원들이 낮은 연봉을 벌충하기 위해 납품업체에 손을 벌리는 것을 서로 묵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신 사장이 지난해 받은 연봉도 8억9400만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타 대기업에서 신 사장 위치에 있는 임원들의 연봉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분석이다.


게다가 롯데그룹의 비리 검증 시스템은 전통적으로 약한 편이다. 롯데는 내부 비리를 적발하는 감사팀장을 부장급이나 초임 임원으로 급을 낮춰놔, 비리를 적발하더라도 소신 있게 대처하기 힘든 구조를 취해왔다.

재계 한 관계자는 “롯데그룹은 애초부터 감사시스템을 내부 고위층 외압에 취약한 구조로 만들어 놨다”면서 “이런 구조가 비리를 키우고, 뇌물 문화를 장착시켰다”고 지적했다.

‘돈이면 다 돼’
영화같은 로비전

사실 롯데그룹 내 뇌물 비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번처럼 윗선과의 조직전인 상납구조가 드러난 적은 없지만, 꾸준히 ‘뇌물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켜왔다.

우선 롯데그룹은 2006년 우리홈쇼핑을 인수한 뒤 이듬해 롯데홈쇼핑을 출범시켰으며 인수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당시 롯데는 태광그룹과 우리홈쇼핑 인수전쟁을 벌이면서 정·관계 핵심 인사들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롯데슈퍼는 공무원과 민원인들을 돈으로 매수해 불량식품 사건을 무마시키려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롯데슈퍼는 지난해 7월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을 판매하다 적발되자 행정처분 무마 조건으로 공무원과 민원인들에게 금품을 건넸다 적발됐다.


‘하청업체→임원→사장’ 상납구조
꼴찌 연봉·부실 감사시스템 지적

롯데건설은 그룹 ‘뇌물 비리’에 정점을 찍었다. 2011년 자금 유동성이 불안한 건설사로 지목되자 공격적인 수주전에 나섰고, 재개발 사업 추진 중 뒷돈 거래를 펼쳤다. 당시 롯데건설은 은평구 응암제2구역 주택재개발 공사를 따내기 위해 홍보용역 업체를 동원해 조합원들에게 87억여원의 금품을 뿌린 혐의를 받았다.

2009년에는 영화 같은 로비전을 벌이다 적발됐다. 대형건설공사 공사수주를 받기 위해 입찰 심의평가위원을 상대로 억대의 금품 로비를 벌인 것이다. 당시 롯데건설로부터 로비자금을 받은 현장소장들은 입찰일 직전에 설계 설명 등을 명목으로 평가심의위원 후보자들을 접촉해 선물공세를 펼쳤다.

이후 입찰 당일 새벽에 공사관계자 수 백명을 후보자 집 앞에 대기시킨 뒤 후보자가 위원으로 선정돼 집을 나서면 곧바로 따라붙어 고액의 뇌물을 건네기로 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짜고 이를 실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2007년에는 뇌물을 주고 분양가 수백억을 부풀렸다 덜미가 잡혔다. 당시 롯데건설은 서울 청계천 일대의 롯데캐슬 재개발 건축 현장에서 전 현직 조합장에게 수 억원의 뇌물을 주고 공사비를 수 백억원이나 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평당 분양가는 58만원이나 올랐고,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들의 몫이 됐다.

롯데그룹의 잇단 뇌물 스캔들에 재계 한 관계자는 “갑을 관계가 명확한 우리 사회의 특성이 뇌물 비리를 고착화 시킨 것 같지만, 무엇보다 ‘돈이면 다 된다’는 물신주의가 기업 내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뇌물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우리사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재수 없이’ 걸린 피해자들만 양산하는 식의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롯데홈쇼핑 급성장 비결
‘갑질’로 덩치 2배 키워

‘뇌물 스캔들’에 연루된 롯데홈쇼핑이 지난 5년간 두 배 가까이 덩치를 키워 온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기간은 상납 의혹에 휘말린 신헌 롯데쇼핑 사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시절과 맞물려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롯데홈쇼핑은 지난해 개별 기준 연매출 7732억원을 기록, 5년 전 연매출 3067억원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매출 규모가 확대됐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452억원에서 738억원으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이후 신 사장이 롯데홈쇼핑 대표로 취임된 이후, 폭풍성장이 가속화됐다. 신 사장 취임 당시 3067억원이던 매출은 이듬해 4341억원으로 42%가량 성장했고, 2011년에는 636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7732억원의 연매출을 달성하며 매년 약 2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영업이익도 두 배 가까이 커졌다. 2008년 452억원을 기록하던 영업이익은 2011년 959억원을 기록했다. 이듬해 738억원으로 다소 줄었지만, 매년 10~15%를 기록하며 양호한 수익성을 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이번 롯데그룹의 갑질이 롯데홈쇼핑 5년 성장 스토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됐다”며 “공격적 마케팅과 채널 확보라지만, 그 이면엔 납품업체들의 눈물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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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