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일가 ‘모자 분쟁’으로 그동안 터진 재벌가의 ‘골육상쟁’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돈이 피보다 진했던 재벌그룹 일가의 재산 다툼은 빈번했다. 세대교체의 통과의례로 비춰질 정도로 국내 내로라하는 재벌가들이 대부분 홍역을 치렀다. 과거 볼썽사납게 엉겨 붙은 로열패밀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때 그 가족들의 관계를 유형별로 정리해 봤다.
재산다툼 등 가족불화 “대부분 세대교체 전후 심화”
녹십자· 한진·금호 ‘진행형’…범현대가 ‘대치형’
재벌가의 ‘혈족 전쟁’ 결말은 ‘현재 진행형’ ‘묘한 대치형’ ‘극적 화해형’ ‘슬픈 비극형’ 등 4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우선 현재까지 날 선 공방전이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경우 최근 고 허영섭 회장의 유산을 둘러싸고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녹십자일가를 비롯해 한진그룹, 금호아시아나그룹, 종근당, 오양수산 등이 대표적이다.
녹십자는 장남과 어머니가 맞섰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허 회장의 장남 성수씨는 지난달 “아버지의 상속 과정에서 자신만 배제됐다. 유언장이 거짓으로 작성됐다”며 어머니 정모씨 등을 상대로 유언효력정지 등 가처분 신청을 냈다. 허 회장이 지병으로 타계한 지 불과 10일 만에 벌어진 ‘골육상쟁’이다. 크게 당황한 녹십자 측은 “이번 가처분 신청은 경영권과 상관없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원만히 해결할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업계에선 유산을 놓고 벌이는 모자간 작은 신경전이 나아가 경영권 다툼으로 비화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화·롯데 ‘극적 화해’
한진가의 ‘형제의 난’도 현재진행형이다. 고 조중훈 창업주가 2002년 세상을 뜨자 유산배분 절차를 밟던 한진일가 2세들의 싸움이 시작했다. 주인공은 장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차남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3남 고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 4남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이다. 이들은 장남-3남과 차남-4남이 각각 편을 나눠 갈등을 겪었고 급기야 법정다툼으로 번졌다.
한진가 형제들은 유언장 진위, 정석기업 주식 양도, 면세점 납품권, 선친 기념관 건립, 김포공항 주유소 등을 두고 소송과 항소를 반복해 왔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박삼구 명예회장과 박찬구 전 회장간 혈투가 2라운드로 접어든 형국이다. 두 형제는 그룹 지주사 격인 금호석유화학 지분을 매집한 동생 박찬구 전 회장의 ‘쿠데타’에 형 박 명예회장이 ‘동반 퇴진’이란 초강수를 꺼내드는 일진일퇴를 주고받았다.
‘쫓겨난’ 박 전 회장은 침묵으로 일관하다 지난 8월 대형 로펌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자신의 금호석유화학 대표이사직 해임 조치에 대해 법적 대응 의사를 밝혀 조만간 두 형제가 법정에서 만날 가능성이 커졌다. 오양수산도 사정이 비슷하다. 오양수산 일가는 2007년 고 김성수 회장이 타계한 뒤 상속지분 처분을 놓고 가족과 장남 김명환 전 부회장간 전면전을 벌여 법정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 법정공방이 일단락됐지만 갈등의 불씨가 남아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른바 ‘묘한 대치형’이다.
범현대가는 2001년 ‘왕회장’고 정주영 창업주가 타계하자마자 ‘왕자의 난’과 ‘숙부의 난’ ‘시동생의 난’등의 분란을 겪은 뒤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대부분 법적 문제가 끝났으나 이 과정에서 공중에 뜬 옛 현대 계열사들을 두고 현대기아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 KCC그룹 등이 대치 중이다. 범현대가인 한라그룹 일가는 고 정인영 명예회장의 장·차남인 몽국-몽원씨가 1997년 주식 소유권 분쟁 뒤 지금까지 벽을 쌓고 있다.
이 다툼은 2005년 몽원씨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마무리되는 듯싶더니 크고 작은 민사 소송이 잇달아 제기, 형제의 우애를 완전히 갈랐다. 대성그룹 일가인 고 김수근 창업주의 장남 김영대 대성산업 회장과 차남 김영민 서울도시가스 회장, 3남 김영훈 대구도시가스 회장 등도 2001년 김 창업주의 작고 당시 지분 다툼을 벌인 이후 등을 돌려 아직까지 발길을 끊고 있다.
이들은 2006년 김 창업주의 부인 고 여귀옥씨가 타계하자 어머니의 유산상속을 놓고 또다시 갈등을 빚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대성가 형제들은 지난 9월 유산정리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전혀 왕래가 없다고 한다. 2004년부터 5년간 이어지며 ‘진흙탕 싸움’의 진수를 보여준 동아제약 일가의 강신호 회장-장남 문석씨간 경영권 분쟁은 문석씨가 사실상 백기를 들면서 종지부를 찍었지만 식구들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이다.
대림그룹과 대한전선그룹 일가도 오래 전 법적 분쟁이 이미 종결됐지만 앙금이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 대림가는 대림통상 경영권을 놓고 ‘배다른’ 삼촌과 조카 사이인 이재우 대림통상 회장과 이부용 전 대림산업 부회장이 맞붙은 ‘숙질간 전쟁’을 벌여 그 뒤로 서로 모른 척하고 있다. 대한전선가는 고 설경동 창업주가 후처의 자녀인 3남 고 설원량 회장에게 그룹의 적통을 물려주자 이복형제들이 반발하면서 갈라섰다.
반면 극적으로 화해한 재벌가도 있다. 한화가는 1981년 고 김종희 창업주의 타계후 승연-호연 형제의 경영구도에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1992년 분가 과정에서 경영권 다툼이 돌출됐다.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 형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상대로 재산권 분할 소송을 제기한 것. 무려 30여 차례나 공판이 열리는 등 지루하게 흘러간 이 송사는 결국 1995년 모친의 칠순 잔치를 계기로 두 형제가 손을 잡으면서 종결됐다.
두 형제는 함께 김 창업주의 선영을 찾는 등 이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내고 있다. 롯데그룹도 형제간 불화로 쑥대밭이 된 적이 있다. 1996년 서울 양평동 소재 롯데제과 부지 소유권을 놓고 신격호 회장과 그의 동생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 한바탕 싸움을 벌인 것. 하지만 형제가 조금씩 양보하는 선에서 4개월 만에 분쟁을 끝냈다. 신준호 회장은 자주 신격호 회장을 찾아 ‘형님 대접’을 해주고 있다.
두산, 비극으로 끝나
단순 불화가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난 사례도 있다. 두산가 형제들 얘기다.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2005년 ‘형제의 난’으로 두산가에서 퇴출당했고 형제들 사이에서 ‘왕따’로 외롭게 지내다 지난달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