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 고 김태련 3주기 추모식<현장스케치>

‘낭만파 야인’의리 죽지 않았다!

돈 앞에선 의리가 없다. 선·후배간 우정도 사라진 지 오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 심장을 겨누기 일쑤다. 그저 ‘밥그릇’에만 혈안이다. 요즘 조폭 얘기다. 사시미(회칼), 쇠파이프, 도끼 등 이른바 ‘연장’이 난무하는 비열한 조폭 세계엔 이제 더 이상 ‘낭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1950∼60년대 주먹계를 쥐락펴락했던 ‘낭만파 야인’들이 회자되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1세대 주먹계 원로들과 전국 전·현직 보스들이 뜻 깊은 자리에 모여 화제다. ‘형님’들이 모인 경기도 한 야산의 현장을 담아봤다.

양주시 선영에 전국구 주먹계 원로·현역들 추모 행렬
봉사 삶 살다간 고인 뜻 받들어 매년 사회시설에 온정

 
지난 2일 오전 11시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공원묘지. 주차장 입구에 검은색 정장 차림의 건장한 청년들이 도열한 사이로 대형 세단들이 줄지어 도착했고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어느새 200여 명에 달했다. 수북이 쌓인 낙엽에 닿을 듯 말 듯한 바바리코트에 축 늘어뜨린 목도리. 그리고 세월이 그린 주름에도 매서운 눈초리는 여전했다. 영락없이 <야인시대>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형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아우도 잘 지내는가.”

계파 불문 전국서 참석
환갑에도 형님에 깍듯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형님’에겐 깍듯했다. 여기저기서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땅에 머리를 꽂는 인사법 또한 그랬다. 실존하는 협객인 ‘마지막 야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06년 작고한 ‘낙화유수’고 김태련씨의 3주기 추모식을 맞아 선영을 참배하기 위해서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추모식엔 미망인 이부자 여사 등 유가족을 비롯해 김씨가 몸담았던 이정재의 ‘동대문사단’과 유지광의 ‘화랑동지회’는 물론 김두한의 ‘종로파’, 이화룡의 ‘명동사단’ 등의 핵심 멤버들이 총출동했다. 낭만과 의리로 똘똘 뭉쳐 이른바 ‘협객’으로 불렸던 1세대 주먹계 원로들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두목급 현역들도 대거 참석했다.

왕년에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큰형님’들의 2세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이 모인 것만으로도 주먹계 전체가 술렁일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원로는 “살아 있는 형님도 배신하는 요즘 주먹계 세태에 고인이 된 선배의 묘소를 돌본다는 게 쉽지 않지만 평소 낙화유수 큰형님을 존경하고 의지하던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배들이 모두 모였다”며 “전국의 어떤 행사도 큰형님의 추모식만큼 계파와 나이를 뛰어넘어 이렇게 모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종로파…명동사단…’
핵심 멤버들 모여

김씨의 선영 앞에서 이들은 모두 고개를 떨궜고, 구슬픈 추도문이 야산에 울려 퍼졌다. “낙화유수 큰형님, 아우들 왔습니다. 형님 떠난 세상이 오늘 유난히 쓸쓸해 보입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립습니다. 형님….”

이날 추모식을 주관한 조병용 대한연합상사 회장은 “(낙화유수) 형님은 법보다 주먹이 앞섰던 시대적 배경으로 주먹계에 이름을 올렸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주먹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며 “은퇴 이후엔 학원폭력 근절과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20여 년 동안 헌신했다”고 설명했다.

추모식을 치른 후 이들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선영 인근의 아동보호시설인 광명보육원. 김씨가 생전 고집했던 ‘사랑·나눔·실천’의 뜻을 받들자는 취지에서 매년 이곳을 방문해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경기 불황 여파로 도움의 손길이 뚝 끊겨 어느 때보다 을씨년스런 보육원에 반가운 손님들이 방문한 것이다. 보육원 관계자는 “매년 때마다 잊지 않고 방문해 아이들의 쓸쓸한 겨울을 훈훈하게 해주고 있다”며 “사실 처음 유명한 분들이라고 해서 조금 겁도 났지만 막상 만나보니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분들 같다”고 전했다.

2006년 11월2일 뇌출혈로 별세(향년 75세)한 김씨는 1950∼60년대 낭만파 주먹계를 쥐락펴락했던 동대문사단의 돌격대장을 맡았다. 회칼과 쇠파이프가 아닌 주먹 대 주먹의 맞대결을 펼친 뒤 싸움에 깨끗이 승복하는 미덕을 지녔던 이 시대의 주먹들을 가리켜 ‘낭만파’라 불렀다. 김씨는 당시 김두한과 쌍벽을 이루던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인 유지광 계보의 좌장이었다.

동대문사단은 머리가 있는데다 깔끔함을 유지해 다른 주먹패와는 차별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동대문사단의 보스 이정재는 휘문고보를 나왔으며 유지광은 단국대 법대를 졸업했다. 이들은 군사정부의 재판을 받고 죽을 때까지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김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울대 상대(52학번) 출신의 깔끔한 매너와 명석한 두뇌로 ‘인텔리 주먹’으로 통했다.

175㎝의 큰 키와 100kg의 육중한 체구를 자랑했던 그는 말끔한 외모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떨어진 꽃잎이 물에 떠내려 간다’란 뜻의 낙화유수란 멋들어진 별명도 서울대 상대 시절 유유자적하게 산다고 해서 여학생들이 붙여줬다고 한다. 그는 1951년 부산 피난 시절 단국대 출신 장윤호를 만나면서 주먹세계로 뛰어들었다.

낙화유수는?‘야인’이정재·유지광 이어 ‘동대문사단’ 보스
서울대 출신 ‘인텔리 주먹’‘원펀치’로 유명


1962년 이정재가 군사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후계자인 유지광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구속되면서 김두한의 ‘종로파’, 이화룡의 ‘명동사단’과 함께 ‘동대문사단’을 이끈 실질적 보스가 됐다. 싸움실력도 대단했다. 유도와 태권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체중이 실린 ‘원펀치’로 유명했다. 그의 주먹 한 방에 어지간한 주먹들이 모두 쓰러졌다는 후문.

또 ‘발을 손처럼 사용했다’는 말도 후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5·16 직후 정치깡패로 군사재판 법정에 섰던 김씨는 석방후 군사정부로부터 전라북도 군산시장과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제안 받았으나 “군사정권에 협력하기 싫다. 쿠데타 정권을 도우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협객의 길과 다르다”며 거부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이때 그가 진술한 내용은 주먹세계에서 어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절대 깡패가 아니다. 협객이다. 법을 어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래도 약한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았다.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향해서만 주먹을 날렸다. 사람에 따라 내가 걸어온 길을 비난할 수 있지만 그래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협객의 길을 걸어왔음을 자부한다. 다시 태어나도 협객의 길을 걷겠다.”

이후 주먹계에서 은퇴한 김씨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선행을 베풀었다. 세상을 떠나기 5년 전부터 당뇨 증세로 100kg의 몸무게가 60kg으로까지 줄었을 정도로 고생했지만 봉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씩 투석을 하는 와중에도 양로원과 고아원을 돌면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노후를 바쳤다.

“서민 등 약자 노터치”
은퇴 후 여생 봉사로

2002년부터는 정의사회실천모임 고문으로 활동하며 원로 주먹들과 함께 범죄추방운동을 벌였다. 틈나는 대로 소년교도소를 방문해 “한때 잘못으로 이곳에 왔다고 좌절하지 마라. 이를 악물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교화활동에 힘을 쏟았다.특히 김씨는 자식들에게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2004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택을 비롯해 전 재산을 사회복지센터 건립기금으로 내놓았다.

이렇게 불우한 이웃을 도우며 생을 마감한 김씨의 유지에 따라 후배들은 경기도 의정부, 광주 등 외진 곳에 위치한 보육원과 양로원 등을 정기적으로 찾아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있다. 조 회장은 “약한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의리를 지키고 협객으로의 도리를 다한 한 세기에 한 번 나오기 힘든 분”이라며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했고 남을 돕는 일도 자신의 공적을 알리기보다는 묵묵히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닌 큰형님이 주먹들 사이에선 협객의 표본이 되고 있어 후배들도 뜻을 받들고자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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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