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프로골퍼 박인비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25 13: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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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신화 깬 ‘메이저 퀸’

[일요시사=사회팀]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을 받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관심이 뜨겁다. 박인비는 올 시즌 메이저 챔피언십 3회 연속 우승을 포함해 6번 우승을 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녀가 있기에 한국 골프의 날씨는 맑다.




한국 선수 최초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박인비(25·KB 금융그룹).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 선수들이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올해의 선수는 아무도 없었기에 더둑 관심을 끌고 있다. 한때 슬럼프에 빠진 적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박세리의 최연소 우승기록을 갈아 치우고 결국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수가 됐다.

세계가 인정하는
‘올해의 선수상’

‘침묵의 암살자’란 별명을 갖고 있는 박인비는 지난 18일 멕시코 과달라하라 골프장에서 끝난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합계 11언더파 277타로 4위에 오르며 공동 5위에 자리한 경쟁자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의 추격을 제치고 시즌 마지막 대회였던 CME그룹 타이틀홀더스 결과를 떠나 올해의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한국에서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이룬 게 영광이다. 정말 좋다. 사실 올해 목표가 올해의 선수상이었다. 그랜드슬램보다 더 하고 싶었던 타이틀이었기 때문에 더 많이 애정이 간다.”

LPGA투어 사무국이 해마다 주는 5개 상 중에서 가장 가치가 큰 ‘올해의 선수상’. 그리고 시즌 평균 최저타수를 달성한 선수에게 주는 ‘베어트로피’, 최고 신인에게 돌아가는 루이스 서그스 롤렉스 ‘올해의 신인’, 일종의 모범상 성격의 ‘헤서 파’ ‘윌리엄 앤드 뮤지 파월 상’, LPGA 발전을 위해 후원을 아끼지 않은 기업에 주는 ‘커미셔너상’ 등 5개 분야에 걸친 시상을 하고 있다. 그중 ‘올해의 선수’는 그해 선수들의 투어 대회 성적에 포인트를 줘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일종의 시즌 최우수선수(MVP)에 해당된다. 

수상자를 정하는 방식을 보면 각종 대회 1위부터 10위 선수에게 점수를 차등 배점한다. 투어 챔피언은 30점, 준우승한 선수는 12점을 얻는다. 3위는 9점, 4위는 7점을 받는 식으로 순위가 낮을수록 배점도 낮아져 10위는 1점을 챙긴다. 단, 5대 메이저대회 순위별 배점은 일반 투어 대회의 두 배다. 박인비는 올 시즌 메이저대회에서 3승(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 US여자오픈)을 거둬 180점을 획득한 데 이어 투어 대회 3승(혼다 타일랜드 대회, 노스텍사스 슛아웃, 월마트 NW 아칸소 챔피언십 대회)으로 90점을 보탰다.


여기에 ‘톱10’ 입상 포인트 27점을 추가하고 총 297점을 쌓았다. 1966년에 제정된 이 상의 역대 최다 수상자는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이다. 소렌스탐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이 상을 5년 연속 수상하는 등 총 8차례나 수상했다. 그 다음으로는 케이티 휘트워스(미국·7회), 낸시 로페즈(미국), 로레나 오초아(멕시코·이상 4회) 순이다. 박인비의 수상으로 아시아 출신은 2010∼2011년 청야니(대만), 1987년 오카모토 아야코(일본)에 이어 네 번째다.

‘한국 군단’은 박세리(36·KDB산은금융그룹)를 시작으로, 박지은(34), 신지애(25·미래에셋), 최나연(26·SK텔레콤) 등이 상금왕, 신인왕, 평균최저타수상(베어트로피) 등을 수차례 수상한 바 있지만 한 시즌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것은 박인비가 처음이다. 특별하고 의미 있는 위업이다.

한국인 최초 LPGA 올해 선수로 선정
올 시즌 메이저 챔피언십 6번 우승

한국여자골프는 1998년 박세리를 시작으로 15년 넘게 LPGA투어에서 세계무대를 제패했지만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했다. 당대 최고의 골프스타에게만 주어져 ‘상 중의 상’이라 불리는 ‘올해의 선수상’에서는 항상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올해의 선수상. 지난 18일 박인비는 한국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올해의 선수’를 확정했다.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열린 로레나 오초아 인비테이셔널에서 4위를 차지해, 공동 5위로 대회를 마감한 경쟁자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를 눌렀다.

박세리 뛰어 넘은
한국 골프의 자랑

LPGA투어 25승을 달성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박세리도 이루지 못한 한국골프의 큰 쾌거다.


그녀의 피나는 노력이 보상해준 결과지만 그 이면에는 남다른 가족사랑이 있었다. 올해 2월 태국에서 열린 혼다 LPGA 타일랜드 대회에서 시즌 첫 우승을 신고한 박인비는 “할아버지 앞에서 우승해 매우 쁘다”는 말로 운을 뗐다.

할아버지 박경준(81는 박인비에게 골프를 처음 권했고 여전히 최고의 후원자다. 노령의 할아버지에게 다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기회에서 박인비는 우승을 일궈냈고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렸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4월 열린 시즌 첫 메이저대회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생애 두 번째 메이저대회 정상에 오른 순간에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박인비는 2007년 LPGA 무대에 뛰어든 후 이듬해인 2008년에 US여자오픈 최연소 우승기록을 썼다.

하지만 이후에 찾아온 시련은 매서웠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0개가 넘는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심리적 압박에 시달렸고 골프가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중압감을 누르고 얻어낸 메이저 2승의 순간, 박인비는 부모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꼭 우승하고 싶은 대회였다. 오늘이 부모님 결혼 25주년 되는 날이라 더욱 기쁘다.”

중요한 사람이 더 있다. 2011년 8월 약혼식을 올린 프로골퍼 출신 남기협 씨. 박인비는 자신을 ‘짐꾼’이라 표현하지만 막강한 지원군이라며 “약혼자는 긴 슬럼프에서 탈출하게 한 일등공신이다. 내 편이 있다는 게 든든했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둘은 내년 10∼11월 사이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그녀는 “골프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은 특별한 웨딩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인비는 2011년 프로골퍼 남기협 씨와 약혼했다. 둘은 투어 생활을 함께 하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4월 박인비가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을 때는 함께 연못에 빠지는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했다. 남씨와 약혼 이후로는 스윙 자세도 약혼자와 함께 상의하며 만들어 가고 있다. 약혼자 역시 프로골퍼 출신으로 박인비와 잘 맞는다고 전해진다. 특히 골프에 대해 즐겁게 대화하고 풀어갈 수 있다는 건 선수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인 선수
최초 타이틀

박인비의 스윙은 독특하다. 정통, 교과서적인 스윙과는 거리가 멀다. 천천히 클럽을 들어올렸다가 짧게 내리치는 스윙을 한다. 스윙이 예쁘거나 좋지 않지만 박인비에게는 딱 맞는 스윙이다.

그녀의 스승인 백종석(52) 코치는 박인비의 스윙을 한 마디로 ‘프리 암’(Free Arm)’ 스윙이라고 정의했다. 백 코치는 “박인비의 스윙은 팔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스윙이다. 일반적으로는 몸을 위주로 하는 바디 턴 또는 팔을 위주로 하는 암 스윙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박인비는 두 가지 장점을 하나로 섞은 스윙이다”라고 말했다. 팔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건 향성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팔을 잘 던진다. 특히 어프로치 할 때 더 효과가 좋다. 팔의 감각을 이용해 공을 자유롭게 보내다 보니 훨씬 더 정교하다. 테크니션보다 감각을 앞세운 ‘필’(feel) 스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비결은 ‘숙성된 스윙’이다.“박인비의 스윙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미국에 와서 데이비드 레드베터, 부치 하먼 등 많은 스윙코치를 만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줬다. 또 나와 함께 한 5년 동안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그런 과정 속에 자기 나름의 노하우, 그리고 투어의 경험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스윙이 완성됐다. 음식처럼 지금 박인비의 스윙은 완성을 넘어 숙성의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맛있는 단계다.”

2년 연속 상금왕까지 도전
내년도 눈부신 활약 기대

박인비는 초등학교 시절 수의사가 꿈이었다. 동물을 워낙 좋아했다. 그러던 그녀가 골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박세리 덕분이었다. 1998년 박세리가 한국 선수 최초로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장면을 본 후 골프에 빠져들었다.골프광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올해 81세인 할아버지 박경준 씨는 3대가 함께 골프하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박인비 아버지 박건규(51)씨도 스무 살 때부터 골프를 쳤다.


‘3대 골프’를 원하던 박씨는 박세리의 US오픈 우승 직후 딸 손을 잡고 골프연습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박인비는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다. 남들보다 늦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골프채를 잡았지만 2년 만에 국가대표 주니어 상비군에 뽑혔다. 박건규 씨는 “한국 부모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골프를 시키고 싶지 않았다”며 2001년 죽전중 1학년 때 딸을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보냈다.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레슨을 받았지만 잘 맞지 않는 느낌이 들자 박인비는 중학교 졸업 후에 라스베이거스로 옮겨 부치 하먼으로 코치를 바꾸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골프에 재능을 보인 박인비는 14세인 2002년 US여자주니어 골프선수권 우승을 비롯해 미국 아마추어 대회에서 9차례나 우승하는 등 아마추어 무대에서 적수가 없었다. 세계 골프계는 “골프 천재가 탄생했다”며 박인비를 주시했다. 박인비는 2007년 LPGA투어 생활을 시작해 투어 2년차인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쓰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순탄할 것 같았던 프로 생활은 곧 기나긴 슬럼프로 이어졌다. 

‘세리 키즈’ 선봉에 설 듯했던 박인비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총 57개 대회에 출전했지만 우승은 한 차례도 없었다. 박인비로선 끝도 없는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필드의 초록색만 봐도 겁에 질렸다. 당시 대회에 나가는 것이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급기야 2009년 겨울 박인비는 아버지에게 골프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돌파구는 일본에서 찾았다. 일본 진출 첫 해인 2010년 우승 두 번, 준우승 여섯 번을 했다. 2011년에도 2승을 거뒀다. ‘일본만 가면 잘되고 미국만 오면 왜 안 되냐’는 생각을 할 때인 2012년 7월, 박인비는 마침내 에비앙 마스터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시련의 터널을 지난 박인비는 강해져 있었고 옆에는 가장 강력한 ‘비밀 병기’가 함께 있었다. 바로 ‘약혼자’다. 박인비는 2011년 8월 KPGA투어 프로 출신인 남기협 씨와 약혼하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인비는 “오빠가 골프선수 출신이라 내가 언제 기분이 안 좋고 좋은지 다 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늘 즐겁다”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 그녀의 부활을 만든 독특한 템포의 스윙도 남씨와 함께 완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유명하다는 코치한테 다 레슨을 받아봤다. 그런데 공감이 잘 안 되더라”고 말한 박인비는 “그런데 오빠하고는 잘 맞았다. 올해는 바뀐 스윙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설명했다. 박인비는 지난해 2승에 상금왕과 최저타수상을 수상하며 부활을 알렸고, 2013년 메이저 3연속 우승과 함께 시즌 6승을 기록하며 새로운 골프 여제 탄생을 알렸다. ‘올해의 선수’. 명실상부한 ‘세계최강의 자리’는 한국 골프 팬들과 관계자들의 오랜 바람이었다.

박인비 역시 “한국 선수 중에 올해의 선수가 없다는 점은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최강’,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 가운데 ‘올해의 선수’가 없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때문에 박인비는 이 상을 수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한국의 자존심을 더욱 드높이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하는 골프계의 슈퍼스타다.
“슈퍼스타의 인생을 살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사실 골프만 열심히 치다 보니 이런 자리에 온 것이지 않나. 내가 잘 하는 거라곤 골프 치는 것밖에 없고, 다른 분야에 대해선 아직도 배울 게 많다. 이런 상황에서 골프도 계속 잘 쳐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다. 내년에는 조금 더 성숙해져서 더 좋은 모습 보여주겠다.”

2016년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2013 올해의 선수상’ 확정 후 “한국인 가운데 ‘처음’이였기에 이 상에 대한 욕심이 컸다”고 말한 그녀는 “한국 골프사에 의미있는 일을 하게 된 것 같아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많은 걸 느꼈고 많은 걸 배웠다. 이제 나의 새 목표는 커리어 그랜드슬램(한 시즌 메이저 대회에서 4승을 거두는 것) 달성”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과제는 그랜드슬램 달성과 올림픽 출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박인비 선수는?]

▲2002년 US여자주니어골프선수권대회 우승
▲2006년 프로 전향
▲2008년 LPGA투어 US여자오픈골프대회 우승(메이저)
▲2012년 LPGA투어 사임다비 말레이시아 우승, 에비앙 마스터스 우승
<2013년>
▲LPGA투어 혼다 타일랜드 우승
▲LPGA투어 나비스코챔피언십 우승
▲LPGA투어 노스텍사스 슛아웃 우승
▲LPGA투어 웨그먼스 LPGA챔피언십 우승
▲LPGA투어 월마트 NW 아칸소 챔피언십 우승
▲LPGA투어 US 여자오픈 우승
-메이저 3연승
(통산 LPGA투어 9승, 메이저 4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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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