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서울 최대 슬럼가' 가리봉 가보니…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1 10:4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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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만 지면 주폭 조선족 ‘어슬렁어슬렁’

[일요시사=사회팀]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은 한국 안의 작은 중국이라 불린다. 그만큼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자치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중국어 간판이 즐비한 거리가 가리봉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금은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가리봉동의 곳곳을 둘러봤다.




가리봉동은 영등포구 대림동, 금천구 가산동과 독산동, 경기 안산 원곡동 등과 함께 조선족 동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구로공단 자리 사이에 자리 잡은 가리봉동은 과거 1964년 수출무역단지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청년들이 먼저 터를 잡은 곳이다. 이후 90년대 접어들어 구로공단 내 업체들이 생산시설을 이전하면서 한국 노동자들이 자연스레 빠져나갔다. 그리고 92년에 맺은 한·중 수교로 인해 조선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금도 빽빽이 붙어있는 쪽방에서 생활하며 실낱같은 꿈을 꾸고 있다.

옹기종기 조선족
집단 거주 지역

지난 5일,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유명한 가리봉동의 민낯을 확인하고자 서울 지하철 7호선에 올랐다. 가리봉동과 가까운 남구로역은 지하철역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북한말 같은 조선족들의 대화소리와 이해 못할 중국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날이 선 목소리였다. 중국 본토로 착각할 정도였다.

기자는 남구로역 3번 출구를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나와 가리봉종합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삼거리부터 공단 오거리까지 300m에 걸쳐서 이른바 ‘조선족거리’ 혹은 ‘연변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시장으로 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다양한 일자리가 덕지덕지 게시돼 있는 직업소개소였다. 조선인을 모집하는 구인광고가 부착돼 있었다. 주로 업종과 지역, 구인자의 성별·나이·비자, 급여, 숙식 제공 여부 등이 요약돼 있었다. 용접, 가정부, 간병, 전자제품 조립, 벽돌 제조, 타이어 분쇄, 비닐 세척 등이었다. 월급은 대개 150만원 안팎이었다. 소개소에는 보통 하루에 30∼40명 정도가 찾아온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재외동포 체류자격(F-4)을 얻기 위해 제조업과 농축산업 분야를 선호한다. 사실상 무기한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개소 옆에는 쭈글쭈글하게 널린 빨간 수건들이 있었다. 미용실 수건이었다. 허름해 보이는 미용실 안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주변에 스치는 사람들은 인상이 강했다.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들이었다. 그들의 옷차림에서 ‘멋’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행과 먼 옷차림 때문이었다. 기자의 넥타이가 어색할 정도였다. 여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체감 없이 하얗게 분칠한 여자의 얼굴, 남자의 짧은 머리칼과 단단하게 솟은 광대뼈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시장으로 내려가는 길 상가에는 작은 여관들이 밀집해 있었다. 허름한 간판과 계단을 보니 여관의 연식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부가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 여관 계단에 올랐다. 그런데 허름한 옷차림의 남성 3명이 계단 위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순간 당황한 기자에게 한 남성이 말을 걸었다. “여기는 왜 올라왔어?” 말투를 보니 조선족임이 틀림없었다. 기자는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가리봉동 구경하러 왔다”고 대답한 뒤 계단에서 내려왔다. 왠지 모를 오싹함이 온몸을 감쌌기 때문이다.

여관 건물을 나와 다시 시장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시장 진입로에는 낯선 건물이 있었다. 알고 보니 경찰청 마크가 붙어있는 서울구로경찰서 가리봉파출소의 방범 제1초소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주폭 척결 모두 함께 나섭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순간 최전방에서 경계 근무를 했던 군 시절이 떠올랐다. 시장에 초소가 있다니,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만큼 위험지역이라는 것.

과거와 미래 공존…신 차이나타운 형성
어두컴컴한 골목 끼고 벌집촌 덕지덕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에 찾아갔지만 거리에는 기동순찰 중인 경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제1초소 기준으로 좌측에는 ‘중국동포타운신문사’가 있었다. 이 신문사 앞에서 가방을 메고 있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니 일자리를 구하기 위함이라고.

무채색 상하의에 운동화나 등산화 차림은 여느 일용직 노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갖고 다니는 가방은 작업복과 세면도구로 부풀어 있었다.

이들을 지나 시장 진입로에 들어섰다. 80∼90% 정도가 중국어 간판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색 간판이 마치 연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먼저 생소한 중국식 메뉴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길거리 음식을 보니 확실히 중국인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꽈배기도 팔뚝만한 크기였다.


길 양쪽으로 ‘연길명태어옥’ ‘동북삼성반점’ ‘두만강식당’ ‘도문반점’ ‘압록강반점’ ‘아리랑분식’ ‘아리랑커피숍’ 등 조선족들의 고향인 중국 연변의 지명을 딴 음식점들의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주변 상가 건물에는 ‘중국 노래방’ ‘상해 노래방’ 등 대략 스무 곳의 노래방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방 주변에는 한낮에도 구수한 조선족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은 중국어 문화권’이라고 알리는 것 같았다.

중국 냄새나는 시장골목을 쭈욱 걷다 보면 골목 입구에 ‘가리봉종합시장, 동포타운, 어서 오십시오’라는 간판을 볼 수 있다. ‘동포’라는 표현에서 이곳의 성격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시장 내부에는 중국어로 표기된 식품들이 있었지만 여타 시장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이 지역에는 모두 137개의 중국관련 상업시설이 분포하고 있다. 현황을 보면 음식점이 50개로 가장 많았고 노래방 17개, 식료품점 16개, 주점 및 다방 12개, 여행사 10개, 직업소개소 8개, 의류잡화점 10개, 환전소 2개 등 다양한 업종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외국인 지원센터, 교회, 신문사 등 다수의 관련 시설이 입지해 있다. 이 시설들은 한국계 중국인들이 음식료품 구입, 유흥, 취업, 쇼핑 등 다양한 문화·생활서비스를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조선족 이동 따라
슬럼화된 가리봉

시장을 둘러본 뒤 시장과 연결된 골목길로 향했다. 이렇게 따라 올라가니 그 유명한 ‘가리봉 벌집촌’이 나오는 언덕길이 나왔다. 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이곳, 매우 좁아 보였지만 이들의 보금자리라고. 그런데 아직도 욕실이 없는 방이 있다. 여전히 공동화장실을 쓰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생활이 불편한 건 여전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0만원 내외의 저렴한 방값에 조선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 이들의 문화는 벌집촌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주로 구로공단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벌집’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80년대 후반 산업구조조정으로 구로공단 내 많은 업체들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자 가리봉동은 남아 있던 벌집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유입됐다. 이후 90년대 말부터 조선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조선족의 밀집거주지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낮은 임대료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기존에 가리봉동에 형성되었던 건설관련 일용직의 인력시장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도 한몫했다.

주택가는 비교적 한산했다. 낮이라 대부분이 일하러 나간 탓인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그저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여인들의 모습이 속속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방 있음’ ‘개조심’ 문구를 지나쳐 다른 골목길로 발길을 옮겼다. 어떤 골목길에는 ‘구로구민이 뽑은 행복한 골목길’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행복한 골목길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부적합해 보였다. 버려진 쓰레기와 가구 등으로 가득했기 때문. 표지판 옆에는 ‘보증금 100, 월세 25만원 016-751-****’ 등 각종 찌라시도 부착돼 있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는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건장한 청년도 앞만 보고 걷기에는 무리가 있는 지역이다.

골목길 접어들면
등골 오싹

다소 위험해 보이는 골목길 곳곳을 촬영하던 도중 한 노인이 다가왔다. “뭐 정보 얻으러 왔어?”라고 말했다. 마치 취재 중이라는 걸 눈치챈 듯 보였다. 조선족이 많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한 번 둘러보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가 여기 살면서 자식들 대학까지 보냈다고. 동네는 이래도 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어. 근데 자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하면서 이 동네에 살았던 게 부끄럽다고 하는 거야. 어렸을 땐 그런 말 안했는데 이제 머리가 큰 거지….”

‘가리봉’이라는 촌스러운 지명과 조선족의 동네라는 인식 때문에 자식들에게 불평불만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인 가리봉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노인과 대화를 마치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왔다. 남부순환로 105길을 경계로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가산디지털단지 패션아울렛이 보인다. 수백 미터 차이로 20세기와 21세기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가리봉동에서 가산디지털단지를 바라보니 마치 과거에서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가리봉동은 많이 낙후돼 있다. 때문에 우범지역이 생각보다 많다. 거리 하나하나가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영화촬영도 많이 한다고. 그리고 흔히 여성들에게 ‘밤 길 조심하라’고 하는데 가리봉동은 정말 주의가 필요하다. 남성과 동행 없이는 진입하기 어려운 길들이 있다.

구로공단과 함께 원주민 이전
빈자리에 조선족들 삼삼오오
수십년째 멈춰 있는 시계태엽

‘가리봉’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주위의 ‘작은 봉우리’가 이어져 마을이 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과, 어원이 ‘고을’과 같은 의미인 ‘갈’ 또는 ‘가리’에서 유래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가리’는 갈라졌다는 뜻인데, 구로구의 전체적인 땅 모양이 바지가랑이처럼 갈라진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조선 말기까지는 경기도 시흥군 동면 가리산리였다. 이후 가리봉리로 바뀌었다.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가리봉동의 ‘가’ 자와 독산동의 ‘산’을 따서 가산동이라고 하였다. 75년 다시 가리봉동과 독산동으로 나뉘었고, 80년 구로구 신설로 편입됐다. 가리봉동의 북쪽과 동쪽은 구로동과 접해 있고, 서쪽과 남쪽은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금천구 가산동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과거 60만평 규모로 조성된 구로공단은 국내 공업단지 제1호였다. 7∼80년대 ‘한강의 기적’도 바로 이곳에서 태동했다. 하지만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섬유나 봉제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제품을 주로 생산하다 보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매가리가 빠졌다. 결국 구로공단이 해체되면서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선족들이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연변타운’을 형성했다. 이렇게 되다 보니 가리봉동은 자연스레 중국동포들의 모임 장소로 기능했다.


여전한 ‘벌집촌’
여기서 어떻게…

이들이 본격적으로 가리봉동에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2년부터다. 정부가 자진 신고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6개월∼1년의 출국준비 기간을 부여한 것이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사실상 미등록 외국인노동자에게 희망의 씨앗이었다.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을 준 것으로 이해돼 음지에 숨었던 조선적으로 양지로 나오게 됐다. 늘어난 조선족 때문에 한국인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중국인을 무시하는 한국인의 태도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기본 질서를 해치는 조선족들의 습관이 충돌하면서 양측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조선족 집결지의 대명사였던 가리봉동은 최근 들어 그 이름이 바래지고 있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면서 돈을 벌어 주거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은 이곳 가리봉동을 떠나 대림, 신대방, 신림, 낙성대, 건대입구 등 지하철 2호선 주변을 따라 뿔뿔이 흩어졌다.

이러한 조선족의 인구 유동에는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돼 재개발된다는 소식도 한몫했다.

가리봉동 앞 남부순환로 건너편으로 가산디지털 3단지, 동쪽으로는 구로디지털 1단지가 들어서 옛 구로공단 지역은 이미 IT산업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반면 가리봉동은 여전히 슬럼지역 딱지를 떼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아있다. 동시대지만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가리봉동은 2003년 균형발전촉진지구, 2008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면서, 더 이상 개보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물리적 쇠락이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발 사업이 지연되면서 임대용 방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탈법적인 수선도 진행 중이다. 특별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류 사회와의 단절 양상은 뚜렷하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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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