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부호 뜯어보기 3탄> 경제성장사와 함께한 ‘부호들의 일기’

“격동의 60년 세월 버틴 10대 기업은 삼성·LG·GS 뿐…”



 삼성·LG, 60년대 사세 확장 … 재계 상위그룹 점령
‘왕자의 난’으로 쪼개진 ‘현대가’ 새로운 성장으로 우뚝

국내 기업들은 지난 1945년 광복 이후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이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기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침을 거듭해야 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55년 100대 기업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기업은 7개에 불과하다. 산업트렌드가 빠르게 변하고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기업의 흥망이 갈린 탓이다. 무리하게 몸집 불리기에 나섰던 무수한 기업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반면 내실 있게 성장한 기업들은 외환위기의 높은 파고에도 세계 속에서 명성을 떨치며 성장했다. <일요시사>가 지난 60여 년간 재계의 지각 변동을 되짚어 봤다.


한국 기업의 역사는 지난 1896년 서울 배오개 고개에 둥지를 틀고 옷감 등을 내다팔던 박승직 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두산그룹 효시다. 당시 박승직은 경성 상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며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50~60년대 덩치 키워
‘재벌’ 면모 갖추다

이후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오늘날 재계 판도를 거머쥔 부호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일본에서의 학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미소 사업을 시작한 이병철(삼성 창업주), 인천의 한 쌀가게 배달원으로 시작해 사업가의 꿈을 키웠던 정주영(현대 창업주), 부친이 건네준 2000원의 사업자금으로 경남 진주에서 포목점을 설립한 구인회(LG 창업주) 등이다.

비슷한 시기 각 지역에서 태동한 기업들은 광복 직후 서울로 근거지를 옮기고 사세를 확장했다. 이양구(동양), 서성환(태평양화학), 전중윤(삼양식품), 박룡학(대농), 최태섭(한국유리), 서선하(삼흥실업) 등이다.

대구에 터를 잡았던 이병철도 1947년 동업자 조홍제(효성)와 서울로 상경해 삼성의 모태인 무역상 삼성상회를 주식회사 체제인 삼성물산공사로 바꿨다. 부산에선 김지태(조선견직), 양태진(국제상사), 장경호(동국제강), 정태성(성창기업), 김인득(벽산), 강석진(동명목재) 등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광주에는 박인천(금호), 대전엔 최준문(동아건설) 등이 터를 일궜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벌그룹이라고 불리는 백락승의 태창그룹도 이때 활개를 떨쳤다. 태창은 태창방직, 태창공업, 매일직물, 대한문화선전사, 조선기계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1950년대 초까지 국내 최대의 영향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6·25사변을 기준으로 위세가 시들해졌다.

이들이 다시 세력 확장에 나선 것은 50년대 중반이다. 삼양사를 비롯한 럭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금성방직 등이 선두를 차지했다. 삼성·삼호·개풍·대한산업·동양 등도 ‘재벌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이 중 삼성그룹은 1950년대 여러 계열사를 설립하며 미래 글로벌그룹으로의 성장 발판을 다졌다. 1953년 이병철은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했던 설탕을 국내 생산하기 위해 제당사업을 벌였고 이때 설립된 것이 제일제당이다. 이어 1954년에는 의복에 대한 국산화를 추진하며 제일모직을 설립, 1958년에는 안국화재를 인수해 보험업에  뛰어들었다.  

이외에도 조선방직을 인수하며 단번에 국내 최대의 면방직 업체로 부상한 삼호그룹, 국내 최대의 시멘트 공장을 거느렸던 개풍그룹 등이 삼성그룹과 재계 순위를 다퉜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번성했던 그룹을 살펴보면 삼성, 삼호, 개풍, 대한, 럭희(현재의 LG), 동양, 극동해운, 한국유리, 동림산업, 태창, 삼양사, 화신, 대한제분 등이다.

그러나 이 중 일부그룹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당대를 풍미하며 이름을 날렸던 개풍(이정림), 대한(설경동), 삼호(정재호), 화신(박흥식), 태창(백낙승) 등이다. 특히 태창그룹은 창업주 백락승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백남일이 회사를 이어받았으나 5·16 군사정변 직후 백남일이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일본에 귀화하면서 사라졌다.

한강의 기적 견인하며
고속성장 ‘쭉~쭉~’


반면 삼성그룹과 럭희그룹(LG그룹 전신)은 1960년대에 들어 사세 확장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삼성그룹은 1963년 동방생명보험을 인수한데 이어 1964년 동양방송, 1965년 중앙일보를 연달아 설립하며 언론업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1969년에는 차후 삼성그룹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게 되는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화학사업과 플라스틱 가공업으로 주목받던 럭희그룹도 1958년 국내 최초의 전자공업사인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하면서 1960~70년대 국내 가전 시장 장악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금성사는 1959년 국내 최초의 라디오 개발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선풍기, 자동전화기, 자동 전화교환기, 냉장고, 흑백TV, 에어컨, 세탁기 등을 잇달아 개발 판매하면서 국내 전자전기 부문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1960년대 말에는 호남정유(현 GS칼텍스)가 정부로부터 제2정유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되면서 럭희는 최정상의 그룹사로 급부상했다.

건설로 일어서 자동차 등으로 사세를 확장한 현대그룹의 성장도 눈부셨다. 현대그룹은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포드와 어렵사리 계약을 하고 현대 최초의 승용차 코티나를 선보였다. 그후 포니로 세계에 자동차를 수출하게 되고 현대자동차는 지금까지도 세계로 뻗어가는 원동력을 얻게 된다.

1960년대 건설·자동차·전자·화학 등이 기업 성장의 축으로 성장했다면 1970년대부터는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중화학공업이 재계판도를 크게 바꿔 놨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기업집단 중 삼호, 삼양, 개풍, 동아, 동양, 화신, 한국글라스가 상위 10위권에서 밀려났고 대신 현대, 한국화약, 동국, 효성, 신동아, 선경, 한일합섬이 진입했다.

특히 삼성 이병철 회장과 동업 관계를 청산한 조홍제 회장이 일으킨 효성, 국내 최초의 철강 전문기업으로 거듭난 동국제강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그룹들이다. 이와 함께 해태, 삼환, 국제, 선경(현 SK그룹), 벽산, 두산, 코오롱그룹 등이 큰 성장을 했다.

반면 한때 위세를 떨치던 삼호그룹과 화신그룹은 이 시기에 공중 분해됐다. 또 상위 10대 그룹에 자리하진 못했지만 1974년 등장과 동시에 ‘재계 신데렐라의 탄생’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재벌 반열에 올랐던 율산그룹은 창업 후 5년 만에 사라지는 아픔을 겪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신군부가 주도했던 중화학 투자 조정 과정에서 성장 한계에 부딪힌 기업들이 쇠락한 반면 첨단산업에 눈길을 돌려 사업구조를 획기적으로 바꾼 기업들이 부상했다.



상위 10대 그룹 중에는 동국, 대한, 신동아, 한일합섬이 밀려나고 대우, 쌍용, 한진, 대림 등이 새로 진입했다. 이외에도 동아, 한일합성, 동부, 한화, 금호, 대성, 삼미, 한보, 진로, 기아그룹 등도 고속 성장하며 재벌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1970~8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육성 정책을 등에 업고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뤄냈던 국내 유수 기업들은 1990년대에 들어 험한 산을 만나게 된다. 1990년대 말 들이닥친 외환위기. 이는 국내 역사상 유례없는 파급효과를 퍼트리며 재계 판도를 바꿔 놓았다.

특히 1995년 재계 랭킹 3위를 기록했던 대우그룹은 1999년 잠시 삼성그룹을 제치고 재계 2위에까지 올랐지만 복잡한 채무관계로 결국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공중 분해됐다. 당시 6위까지 올라갔던 쌍용그룹도 무리하게 진출한 자동차산업 탓에 몰락하게 됐고 1998년 재계 10위에 위치했던 동아그룹도 워크아웃을 거쳐 파산신고에 이르렀다.

1998년 현대차그룹으로 흡수된 기아그룹은 1995년 8위까지 올랐으나 부실 경영으로 이듬해 상위 30대 기업에서 빠졌다. 이외에 한보, 동아, 한라, 진로, 해태, 삼미, 한일, 벽산 등 1980년대 후반부터 고속성장하며 주목을 받았던 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다.


반면 삼성그룹은 외환위기의 파고에도 성장세를 이어갔다. 1993년 출시한 애니콜 브랜드를 시작으로 휴대폰 사업을 확장해 본격적인 세계시장 점유에 나섰다. 그 결과 세계시장 14%를 점유해 휴대폰 시장 세계 3위의 위상을 기록 중이다. 2001년 이후에는 재계 순위 1위를 고수하며 사실상 ‘독주’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다.

1990년대 삼성그룹과 함께 재계 쌍벽을 이뤘던 현대그룹은 2000년대에 들어 삼성과 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1990~2000년대
‘IMF’ 넘고 질적 성장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을 겪으며 그룹이 분리수순을 밟은 것. 1987년 공정거래위원회의 30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지정이 시작된 이후 한 번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현대그룹은 내분으로 자동차그룹이 분리되면서 삼성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분리된 현대자동차그룹은 재계 2위를 기록하며 삼성의 뒤를 쫓고 있으며 현대중공업그룹, KCC그룹 등 방계 기업군도 상위 30대 기업집단에 소속되어 있어 여전히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이외에도 IMF 파고를 무사히 넘긴 SK그룹과 LG그룹이 현재 재계 ‘빅4’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지난 60여 년간의 국내 재계 흐름을 살펴본 결과 과거 정부의 지원정책만을 등에 업고 급격히 사세를 불린 기업의 쇠락은 빠르게 이뤄졌다. 1960~80년대 재계 상위 10대 그룹의 변화 폭이 큰 것도 이 같은 이유로 해석된다. 특히 1964년 당시 상위 재벌 그룹 중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룹은 삼성과 LG, GS에 불과하다.

경제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국내 재계는 여타 국가에 비해 짧은 기간 동안 고속 성장을 이룬 만큼 부침도 심했다”며 “급변하는 환경 속에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 이에 도태되는 기업들의 탈락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미래 경제 환경에 발맞춰 재빨리 경영혁신을 단행한 기업은 외환위기와 국제경기 침체라는 높은 장벽에도 성장세를 이어왔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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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