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전격사퇴 양건 전 감사원장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09.02 14:3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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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떠난 자리에 ‘소문만 주렁주렁’

[일요시사=사회팀] 양건 전 감사원장이 이임사에서 무거운 표정으로 ‘역류와 외풍’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감사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양 전 감사원장의 사퇴 배경을 둘러싼 의혹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양건 전 감사원장이 지난달 26일 퇴임했다. 헌법상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보장된 감사원의 최고 책임자가 임기 4년 중 1년7개월을 남겨두고 하차한 것이다. 이번 사퇴에 야당의원들은 청와대 압력설을 주장하고 있다. 양 전 감사원장이 이임사를 통해 내뱉은 말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감사원의 직무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위협하는 모종의 ‘외압’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떠나며 남긴 말
청와대로 불똥?

양 전 원장은 이임식에서 사퇴배경으로 사실상 ‘외풍’을 언급해 향후 이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상당할 전망이다. 국가 최고 감사기관의 수장이 독립성과 중립성을 흔드는 외압을 견디지 못해 중도하차했다는 것으로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양 전 원장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감사원에서 진행된 이임식에서 “이제 원장 직무의 계속적 수행에 더이상 큰 의미를 두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개인적 결단”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부 교체와 상관없이 헌법이 보장한 임기 동안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그 자체가 헌법상 책무이자 중요한 가치라고 믿어왔다. 이 책무와 가치를 위해 여러 힘든 것들을 감내해야 한다고 다짐해왔다”고 밝혔다. 이어 “재임 동안 안팎의 ‘역류와 외풍’을 막고 직무의 독립성을 한 단계나마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물러서는 마당에 돌아보니 역부족을 절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진사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역류와 외풍’을 언급하면서 되레 의혹을 증폭시켰다.

양 전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그가 임기를 지켜낼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음을 강하게 보여줬다. 헌법기관인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과 직무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는 뉘앙스를 풍겼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사퇴 과정에서 청와대 등 권력 핵심부와의 갈등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개인적 결단임을 강조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뒷맛을 남겨 정치권에 파문이 일고 있다. 떠나는 감사원장의 입에서 ‘외풍’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쉽게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임기 1년7개월 남기고 돌연 하차
이례적…배경 두고 갖가지 추측

정리해보면 양 전 원장은 헌법에 보장된 4년의 임기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지만 감사원을 뒤흔드는 압력으로 인해 독립성을 지키는 데 한계를 느꼈고 감사원장으로서의 직무수행에 회의를 느껴 자진사퇴를 결심하게 됐다는 게 이임사의 요지다.

양 전 원장은 이임식을 마치고 감사원을 떠나기 전 정원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주차장 광장에서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했다. 이임식 직후 취재진이 몰려가 ‘역류와 외풍’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었지만 기자들의 질문에 입을 굳게 닫았다.



그는 이임식에 앞서 감사원 1급이상 간부들과의 티타임에서 “감사원 독립성은 제도상 문제가 있다. 대통령 소속이어서 직무상 독립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다. 어떡하라는 말이냐. 구조적 모순이라고 생각한다”며 독립·중립을 지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 같은 언급은 자신의 재임기간 감사업무나 인사 등에 관한 압력을 비롯한 정치적 외풍이 적지 않았음을 강하게 풍긴 것으로 감사원의 직무독립성, 정치적 중립성이 상당히 훼손되는 일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양 전 원장은 정치적 외풍이나 독립성 훼손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4대강 감사 번복에서 부각된 감사 방향에 대한 문제나 감사위원 임명 등을 둘러싼 청와대와의 이견, 감사원 내부에서의 고립화 등이 사퇴의 배경임을 강하게 시사했기 때문이다.


청 “개인적 선택”
야 “실체 밝혀야”

양 전 원장의 외풍 발언이 전해지자 정치권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는 양 전 원장의 사퇴는 개인적 선택이라며 외풍 논란에 선을 그었다. 4대강 사업 감사 결과 번복에 대한 정치적 부담과 그로 인한 감사원 내부 갈등 때문에 양 전 원장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정현 홍보수석은 지난달 28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새 정부에서는 양건 원장의 임기를 보장하기 위해 유임을 결정했다”며 “자신의 결단으로 스스로 사퇴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청와대는 외풍 발언을 두고 불쾌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개인적 결단’이라고 말했으면서도 마치 외부의 압력 때문에 물러나는 것처럼 외풍을 운운한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양 전 원장의 외풍 언급과 관련해 “양 전 원장 사퇴 이유로 이런저런 추측성 언론 보도들이 나오고 있지만 청와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야당은 “감사원에 압력과 외풍이 있었다는 것이 명명백백해졌다”며 박근혜정부의 외압 의혹을 제기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대통령 직속의 헌법 기관장이 ‘외풍’이라고 말한, 그 외풍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며 “(감사원은) 대통령 직속의 헌법기관이기 때문에 청와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청와대가 독립성이 보장된 헌법기관의 인사에 압력을 행사했고, 또 4대강을 둘러싼 신·구 정권간의 권력암투와 야합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임사 ‘역류·외풍’표현
정·관계 후폭풍 ‘만만찮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지난달 26일 기자들과 만나 “이이제이하고 토사구팽하는 것도 문제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겠다는 박근혜 대통령께서 헌법을 어기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말했다. 헌법에 보장된 감사원장의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박 의원은 이날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에 출연해서도 “양건 원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분”이라며 “제가 법사위에서 4대강 감사원 감사를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하다가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감사를 해서 ‘4대강이 잘못됐고 대운하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건 이이제이한 것이고 당신은 토사구팽 된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이이제이하고 토사구팽 당한 양건 원장이나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께서 헌법을 어긴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병완 정책위의장도 “양 전 원장의 사퇴는 4대강 감사 결과 발표에 대한 새누리당 친이계 반발의 희생양이자,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인사의 감사위원 임용이라는 외풍에 불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 의장은 “박 대통령이 나서서 정치적 외풍에 의한 헌법기관의 독립성 훼손 등 비정상적인 국가기관 운영 실태에 대해서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개혁안 마련에 대해서 야당대표와 자리를 같이할 것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야당 의원들도 성명을 통해 “감사원장의 중도 사퇴는 그 자체가 문제다. 사퇴 자체가 위헌이며, 사퇴를 하도록 행사한 압력 역시 위헌”이라며 “박근혜정부는 감사원을 정권의 시녀로 만든 이명박 정권을 넘어, 친이-친박의 당내 야합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강력 비난했다.

반면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은 구두논평에서 “감사원이라는 곳이 불가피하게 외압이나 외풍이 있을 수밖에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인사가 감사원장으로 가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공정하게 감사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라며 “그런 기본적인 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퇴하겠다는 것 자체가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양 전 원장에게 화살을 돌린 것이다.

감사원 향해
개혁 소용돌이


현재 정치권에서는 양 전 원장의 사퇴 이유로 4대강 정치감사 논란에 따른 친이계의 압박, 청와대와의 인사갈등설, 감사원 내부갈등설 등이 제기되고 있다.

양 전 원장의 애매한 이임사로 인해 그의 사퇴 배경이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단 장훈 중앙대 교수의 감사위원 임명 제청을 요구하는 청와대와 갈등을 빚은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장 교수는 박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인수위에서는 정무분과 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이같은 경력이 감사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됐다고 판단한 양 전 원장이 청와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있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영호 감사원 사무총장은 지난달 27일 오후 감사원 기자실을 방문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양 전 원장은(장 교수가) 인수위 출신이고 대선에서 (박 대통령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이니까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해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며 “양 전 원장이 인사 쪽에서 상당히 독립성을 갖고 싶어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해 청와대와의 인사 갈등설을 사실상 인정했다.

감사원 내부에서는 양 전 원장의 후임 인선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인선이 길어질 경우 업무 공백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즉각 후임 인선에 나선다는 방침이지만 9월 초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순방이 예정돼 있는 데다, 정기국회마저 파행 조짐을 보이고 있어 한두달 내 임명은 어려운 상황이다. 감사원장 임명에는 국회 표결과 동의가 필요하다.

정치권서 ‘청와대 압력설’급부상
4대강 문제?…인사·내부 갈등설도


당장 감사원 주변에서는 양 전 원장이 그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해 온 감사들이 표류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감사원은 대형공사 및 인허가 비리, 부실저축은행, 공공보건 의료체계 감사 등 서민생활과 밀접한 부분의 감사를 올해 안에 처리한다는 계획이었다. 감사원은 “일단 정해진 감사 계획에는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양 전 원장의 후임 인선이 길어질 경우 감사 일정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감사원 바깥에서는 감사원을 향해 개혁의 소용돌이가 몰아칠 조짐이다. 민주당은 이미 감사원 개혁을 골자로 하는 감사원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태로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는 입장이다. 개정안에는 감사원의 ▲비공개 정보수집 제한 ▲직권남용 시 처벌 ▲세출세입 등의 국회 보고 의무화 등을 담고 있다. 감사원의 독립성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감사원법을 제출한 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감사원장이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국회 보고를 법제화하는 등 국회의 민주적 통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직속의 헌법기관인 감사원을 국회 기관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친이계를 중심으로 코드감사·보복감사를 막기 위해 감사원 개혁에 동의하고 있어 어쨌든 이번 정기국회에서 감사원 개혁을 둘러싼 공방은 불가피해 보인다.

다음 감사원장은?
후임 하마평 무성

양 전 원장 사퇴 후 후임 감사원장에는 고위 법조인 출신 인사들이 거론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마친 뒤 부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편의점 아저씨’로 일하다 최근 법무법인 율촌 행을 택한 김능환(62·사법연수원 7기) 전 대법관과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으로 박 대통령을 보필했던 안대희(58·7기) 전 대법관, 국내 최대 법률회사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장 겸 공익법률센터장을 맡고 있는 목영준(58·10기) 전 헌법재판관이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공직 부패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일명 김영란법)’제정을 추진했던 김영란(57·11기) 전 대법관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민주당이 감사원장 사퇴를 두고 청와대 외압설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인데다 감사원장의 국회 청문회 등을 거쳐야 하는 만큼 청와대는 후임 결정에 신중을 기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당분간 감사원은 성용락 수석 감사위원 대행체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양건 전 감사원장은?

▲함경북도 청진 출생
▲경기고 졸업
▲서울대 법학 학·석·박사
▲텍사스대 비교법학 석사
▲한양대 법학과 교수
▲미국 워싱턴대 법과대학원 객원연구원
▲대검찰청 검찰제도개혁위원회 위원
▲한양대 법과대학 학장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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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