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100만 시대다. 최근에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초보 백수부터 백수생활이 몸에 밸 대로 밴 베테랑 백수까지 그 유형도 가지가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얀 손’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오늘 하루도 어떻게 돈 안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것이 모토인 활동적인 백수, 돈 안 들고 마음편한 집이 최고라는 은둔형 백수 등 나름대로 틀을 갖추고 생활하는 이 시대의 백수들. 그들을 만나 백수생활의 노하우와 고충에 대해 들었다.
실업자 100만 시대 들면서 백수들 생활 노하우도 늘어나
돈 안 들이고 외식, 몸만들기에 피부관리까지 하며 백수생활
대학 졸업 후 2년여 간 직장생활을 하다 1년 전부터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이모(30)씨.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듣는 실업자 신세지만 나름대로 백수의 삶을 즐기고 있다. 처음 직장을 뛰쳐나올 땐 ‘설마 갈 곳 없을까’라는 자신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에는 ‘정말 갈 곳이 없구나’란 것을 절감했고 쉬는 기간을 재충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다.
때문에 이씨의 백수생활은 나름대로 원칙과 체계가 있다. 밤새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컵라면으로 요기하고 집에 들어와 잠을 자는 전형적인 백수의 생활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에 눈을 떠도 특별히 갈 곳 없는 이씨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는 나태한 생활은 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부모님의 눈치가 보일뿐더러 무계획적인 삶이 몸에 밸 것이 두렵기 때문이란다.
쿠폰은 백수생활 필수품
발품 팔면 ‘화려한 백수’
식사도 규칙적으로 한다. 요리가 취미인 이씨는 적은 돈으로도 그럴싸한 밥상을 차리는 방법을 터득해 가족들에게 대접을 하며 점수를 딴다. 외식할 때도 최소한의 비용을 들인다. 백수시절 초기엔 집 근처 대형 할인마트에 시식코너에서 한 끼 식사를 때우곤 했지만 지금은 되도록 쓰지 않는 방법이다. 대신 틈틈이 인터넷을 뒤져 무료식사쿠폰이나 할인쿠폰을 모아 두고 외식을 하고 싶을 때 요긴하게 쓰고 있다. 운이 좋으면 값비싼 뷔페 이용권이나 패밀리레스토랑 쿠폰을 찾을 수 있어 이와 관련된 사이트는 늘 그의 레이더망 안에 있다.
또 하나 이씨가 자주 찾는 외식장소는 각종 이벤트를 여는 식당이다. ‘20분 안에 다 먹으면 공짜’라는 조건이 붙은 식당 등 노력을 기울이면 돈이 없어도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그가 노리는 음식점이다. 건강관리에도 부쩍 신경을 쓴다. 실직 초기,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늘여갔던 술과 담배로 순식간에 건강이 악화된 경험이 있었던 이씨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최대한 몸에 나쁜 것들은 피하고 있다.
발품 팔아 각종 이벤트 참여하고 품평회 참석 제품까지 얻어
많은 백수들 방안서 취업사이트 뒤지며 폐인생활 하기도
대신 집 근처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며 체력을 키우고 몸매를 다듬는다. 한 달 동안 헬스장을 이용하는 데 드는 돈은 단돈 1만원. 사설헬스장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취업을 위해서도 꾸준히 몸매관리를 한다. 외모관리는 취업에도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씨는 “취업시장에서 내 경쟁상대 가운데는 파릇파릇한 20대도 많은데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고 토로했다.
틈틈이 문화생활도 즐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이씨는 영화표도 제 돈 내고 사지 않는다. 각종 업체에서 하는 경품 응모행사에 참가하는 등 공짜로 영화표 정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도 하루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집 근처 구립도서관이 이씨의 단골 아지트. 이곳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 도서를 읽고 취업공부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은 0원. 밥값도 비교적 싼 편이라 식사해결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단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장소로도 도서관은 요긴하게 쓰인다. 여자친구 역시 자신과 같은 취업준비생이기 때문에 나란히 앉아 데이트 같은 공부를 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것. 이처럼 알차게 시간을 활용하는 이씨지만 두려운 시간은 언제나 그를 찾는다. 그중 하나는 목돈이 드는 일이 생길 때다. 결혼적령기인 이씨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결혼청첩장이 날아든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를 조여 오는 것은 축의금에 대한 부담감. 3~5만원 정도의 적은 돈이지만 그 돈이 모였을 때는 목돈이다.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는 등 소소한 것에 드는 돈도 무시하지 못해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도 불참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단다. 이씨는 “인간구실도 못하면서 몇 만원 아껴 뭐하냐는 생각도 들지만 날이 갈수록 비어가는 통장잔고를 보면 배부른 생각일 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은 이른바 ‘백조’로 불리는 여성 실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직장을 잃은 지 2년이 되어 간다는 최모(28·여)씨도 그중 하나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입사한 최씨는 3년 전 직장을 나와야 했다. 해고를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사정상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직장에서 나온 최씨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여성복 인터넷쇼핑몰을 차렸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홍보 부족 등으로 그마저도 접어야 했다. 이후 보험회사 영업사원에 도전했지만 인맥도, 경험도 없던 그녀에게 영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결국 백조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공짜로 피부관리까지
자기관리도 부지런히
2년여 간 백수생활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도 적지 않다. 특히 여자인 최씨에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치장하고 꾸미는 데 드는 돈이라고. 돈이 없다고 해서 자신을 꾸미는 일을 멈추기에는 너무 젊은 그녀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 최소한의 돈으로 자기관리를 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무료마사지 이벤트 등을 찾아다니며 공짜로 혹은 아주 적은 비용으로 피부 관리 등을 받는 것이다. 물론 발품을 팔아 틈새정보를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필수다. 동사무소나 구민회관 등에서 하는 피부마사지 강의 등에도 찾아다니며 저렴하게 피부 관리를 하는 비법을 배우기도 한다.
몸매 관리도 부지런히 한다. 헬스클럽 등에 다니는 대신 몇십원에서 몇 백원이면 컴퓨터에 다운 받을 수 있는 체조나 요가 등의 비디오를 보며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실직자들이 모이는 인터넷카페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산행을 해 체력을 키우기도 한다. 이 모임은 사람들을 만나는 장이 될 뿐만 아니라 각종 취업 정보를 알 수 있게 해 줘 자주 참석하게 된다고 한다.
백수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간 죽이기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노하우를 쌓는 것도 내공이 필요하다. 최씨가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택한 것 중 하나는 서울 시내 곳곳을 탐방하는 일. 지하철요금만 있으면 구경할 수 있는 곳들이 그녀가 자주 찾는 곳이다. 박물관, 고궁 등 문화재가 있는 곳들과 삼청동, 인사동 등 볼거리가 많은 장소가 그곳이다. 동네 책방 주인들과 친목을 도모해 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루일과는 이력서 쓰기
장판신세 백수도 수두룩
최씨는 “가끔 주인들이 가게를 비울 때 자리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그럴 땐 용돈도 벌고 책도 마음껏 볼 수도 있어 일석이조”라고 귀띔했다.
용돈벌이를 하는 방법은 또 있다. 각종 기업들이 하는 소비자 품평회에 참석해 소정의 돈도 받고 제품도 받는 것이 그중 하나. 최씨가 자주 참석하는 것은 화장품 품평회라고 한다. 새로 나온 화장품을 누구보다 먼저 써 보는 재미가 있는데다 제품까지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모든 백수들이 이씨나 최씨처럼 알찬 생활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이들은 방안에 갇혀 인터넷 취업사이트를 수백 번씩 들락거리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약 6개월 전 실직하고 실업급여로 살아가고 있는 김모(29)씨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씨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컴퓨터 앞.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가장 먼저 접속하는 곳은 취업사이트다. 김씨는 새로 등록된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자기소개서에 등장하는 업체 이름만 바꾸면 이력서 작성은 완성되고 그렇게 작성된 볼품없는 이력서는 수많은 인사담당자들에게 보여지고 또 버려지게 되는 것. 그러나 면접을 보러오라는 회사는 100군데에 1~2군데뿐이라고. 그마저도 악덕기업으로 소문나 구직자들이 기피하는 회사나 다단계업체가 전부다. 김씨는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습관적으로 입사원서를 내고 혹시 올지 모를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라며 “나태한 생활이 몸에 굳어지기 전에 일자리를 찾아야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3년간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가 몇 달 전 고향집으로 내려간 정모(27·여)씨도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백수생활을 보내고 있다.
서울에 머무르며 취업준비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졸업 후 긴 공백 기간은 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줄어들게 만들었다.
어쩌다 면접을 보게 되면 면접관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졸업한 뒤 몇 년 동안 뭐했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간들을 포장하기엔 너무 공백 기간이 길어 취업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정씨는 “취업을 못해 백수가 됐는데 백수로 지낸 시간들이 또다시 취업의 발목을 잡게 됐으니 암담하다”며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