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고득점이 취업의 필수조건으로 자리 잡으면서 ‘토익 광풍’도 사그라질 줄 모른다. 토익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일컫는 ‘토폐인’들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런 가운데 부정 행각으로 토익점수를 대폭 올린 학생들과 커닝을 도운 일당이 무더기로 적발됐다.
좁쌀만 한 이어폰과 무선진동기 등 첨단기기로 중무장하고 고사장에 들어간 학생들은 많게는 600점까지 점수를 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토익 광풍이 몰고 온 씁쓸한 세태를 취재했다.
지방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취업준비를 하고 있던 A(25)씨. 그는 취업을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낮은 토익점수를 꼽았다. 1년여 간 토익공부에 매달렸지만 점수는 언제나 200점대를 맴돌 뿐이었기 때문이다.
무선이어폰, 진동기 등 이용 토익 부정행위로 수백 점 올려
토익 고사장 조건, 응시생들 옷차림까지 토익점수에 영향
이는 웬만한 기업에 원서도 내지 못할 점수다. 많은 기업들이 ‘토익 700점 이상’을 입사조건으로 내걸고 있는데다 900점 이상 고득점자도 수두룩한 것이 현실인 탓에 토익점수는 늘 A씨의 발목을 잡는 원흉이었던 것.
그러나 토익점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A씨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었다. 자주 찾는 인터넷 토익카페에 올라 온 글 하나가 그에게 손짓했던 것. A씨는 ‘토익 고득점 보장’이라는 제목의 그 글에 무심코 자신의 연락처를 남겼고 부정행위의 덫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고득점 보장합니다”
연락처를 남기기 무섭게 전화를 건 이는 김모(42)씨. 김씨는 A씨에게 가족 중 경찰이 있는지를 물은 뒤 점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커닝’. 부정행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던 A씨는 취업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뒤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토익 시험이 있던 5월31일, A씨는 몇 가지 준비물을 구비하고 집을 나섰다. 쌀알보다 작은 크기의 무선 자기장 이어폰과 목걸이 모양의 안테나, 수신기 등이 그것이다. 철저하게 준비를 마친 A씨는 서울의 한 고사장으로 갔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된 오전 10시, A씨의 귀에 몰래 숨겨 둔 이어폰에서 “1번은 a, 2번은 b”라는 정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A씨는 귀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해 답을 적어 내려갔고 무사히 시험을 모두 치렀다.
A씨에게 정답을 송신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김씨. 철두철미한 커닝의 비결은 김씨가 들고 있던 무선 진동기였다. 그 진동기는 A씨와 같은 고사장에 들어간 박모(31)씨가 손 안에 숨긴 무선기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박씨는 문제를 풀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김씨에게 답을 전송했다. 정답이 a이면 한 번, b이면 두 번을 누르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이를 들은 김씨가 A씨의 귀로 정답을 불러주면서 커닝이 이뤄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A씨는 처음으로 500점대의 토익점수를 획득했다. 300여 만원을 들여 단숨에 300점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A씨처럼 부정한 방법으로 토익점수를 올린 응시자는 모두 28명. 이들은 대부분 인터넷 카페에서 김씨 일당과 연결이 되어 200~300만원의 돈을 주고 토익점수를 올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달 23일 토익 응시자 28명으로부터 5000만원 가량을 받고 부정행위를 한 혐의(업무방해)로 김씨와 박씨를 구속했다. 또 부정 응시자 28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와 박씨가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강원도 원주교도소였다. 김씨는 박씨가 미국에서 27년간 거주해 영어에 능통하고 한때 영어강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토익 응시자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돈을 벌자”고 제안했다. 이미 토익 부정행위로 돈을 번 경험이 있는 김씨는 부정행위를 할 방법을 박씨에게 전수해줬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나온 이들 일당은 인터넷 카페에 ‘토익 고득점 보장’등의 글을 올려 수험생들을 유혹했다.
김씨는 응시자들에게 휴대전화를 숨기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팔뚝 안쪽에 휴대전화를 고정시킨 다음 긴 소매 옷을 입고 휴대전화가 있는 자리만 구멍을 뚫는 방식이다. 이들 일당은 또 수험생이 갑자기 큰 폭으로 점수가 뛰게 되면 토익위원회 측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점수가 500점 이상인 수험생들을 주로 선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첨단기기를 이용한 부정행위도 불사하지 않는 ‘토익 광풍’에 씁쓸한 시선이 모이고 있다. 실제로 토익 응시생들이 토익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광풍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들은 토익 고사장의 조건과 상태를 매달 체크하고 조건이 맞는 고사장이 있다면 지방까지 내려가 시험을 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특히 요즘과 같은 여름철에는 에어컨의 유무가 토익고사장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관건이다.
1년째 토익을 치고 있다는 대학생 유모(23)씨는 “에어컨이 잘 나오거나 주변에 소음이 없는 고사장은 접수가 시작됨과 동시에 마감되기 마련”이라며 “토익 접수기간을 놓치는 바람에 지방에 있는 고사장을 신청해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게 생겼다”고 말했다.
“짧은 치마 왜 입어?”
또 토익시험이 있는 날이면 웃지 못할 각종 후기들이 카페 게시판을 도배한다. 남자 응시생들이 가장 많은 불평을 쏟아내는 것은 “왜 토익시험을 치러 오면서 짧은 치마와 짙은 화장을 해서 집중을 못하게 하느냐”는 것. 일부 응시자들은 남자 수험생들이 시험을 못 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야한 차림새를 하고 온다는 음모론을 펼치기도 한다.
여자 수험생들은 이에 대해 “토익시험은 일요일에 있어 시험을 본 뒤 바로 결혼식장 등에 갈 일이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옷차림과 화장에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많다”며 남자 수험생들의 음모론에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감독관의 발자국소리나 숨소리가 거슬려 시험을 망쳤다거나 듣기평가 도중 유행가가 겹쳐 나와 집중을 할 수 없었다는 등의 후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웃지 못할 풍경과 부정행위는 취업난이 존재하는 한 끊이지 않고 연출될 것으로 보여 씁쓸함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