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아 전성시대’ 제2막 풀스토리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6.17 12: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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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끈적 ‘인의 장막’…죽지않고 ‘살아있네’

[일요시사=경제1팀] ‘모피아’라 불리는 옛 재무부 관료 출신들이 박근혜 정부 출범 100일만에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금융권 알짜자리를 이들이 속속 접수하면서 모피아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것. 금융 공기업과 금융단체는 물론 주요 민간 금융회사까지 거의 싹쓸이 수준이어서 관치금융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국내 재무 관료들은 다른 정부 부처 관료들과 격을 달리한다. 굳이 이들에게 ‘모피아’라 는 꼬리표가 따라붙는 이유다. ‘모피아’(MOFIA)는 재무부 출신 인사를 지칭하는 말로, 재정경제부(MOFE·Ministry of Finance & Economy)와 범죄조직인 마피아(MAFIA)의 합성어다. 끼리끼리 정부 고위직과 금융회사 주요 자리를 독식한다고 붙은 별칭이다.

한 번 모피아는
‘영원한 모피아’

이질적인 용어의 절묘한 화음 속에서도 유독 모피아 출신들은 기수 중심의 독특하고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해병대를 능가한다고 해서 ‘한 번 모피아는 영원한 모피아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다.

모피아의 대부로는 여전히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꼽힌다. 이 전 부총리는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과 함께 촉발된 IMF 관리체제에서 금융권 및 재벌 구조조정을 수행하는 등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분류된 인물이다. 그는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에서도 경제부총리를 거치며 시장을 중시하는 모피아의 대부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경제의 정책과 감독을 좌지우지하던 그에게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 이 전 부총리는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 내 사람 챙기기로 주변 인사들을 매료시키며 인재풀을 확대시켰다. 이른바 ‘이헌재 사단’은 200여명의 모피아 출신이 정·재계와 금융계에 포진해 끈적끈적한 인적 고리를 만들었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현직 중에는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계보를 잇고 있다. 기획재정부 내에서는 은성수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과 국제통화기금(IMF)에 파견된 윤종원 전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 전 부총리와 신 위원장 등 현직을 연결해주는 매개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다.

역대 정권은 대부분 초기 인사에서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모피아 출신’을 배제했다. 대신 대학 교수나 민간인을 발탁했지만, 정권 중반 이후에 재무 관료들을 중용하는 방향으로 기울곤 했다.

임영록·임종룡 귀환…금융권 수장 잇단 입성
거래소·신보 이사장에 최경수·홍영만 거론

정치권 출신의 전직 고위 인사는 “정권 초기 때마다 모피아는 일종의 ‘부패 권력’ ‘기득권 세력’ 등으로 치부되면서 통치권자들이 멀리하곤 하지만 집권 1년만 지나면 다시 찾게 된다”며 “서로 간에 밀고 당겨주는 묘한 화음 앞에서는 통치권자도 당할 수가 없다”고 털어 놨다. 

부활하는
‘패거리 금융’

박근혜 정부에서도 반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권 초기 전면에서 밀리는 듯하던 모피아들이 출범 100일이 지나고, 금융권 기관장이 물갈이 되는 틈을 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새다.

KB금융 회장에 임영록 전 기획재정부 2차관이 내정된 지 하루 만에 기재부 1차관 출신의 임종룡 전 국무조정실장이 NH농협금융 회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KB금융 회장 내정자는 행정고시 20회, 농협금융 회장 내정자는 행시 24회로 금융정책을 주로 맡았던 경제관료 출신이다.


이에 대한 금융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특히 민간 금융회사인 KB금융 회장 자리는 늘 민간의 몫으로, 모피아가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과정에서 신 금융위원장은 “관료도 능력과 전문성이 있으면 금융지주 회장을 할 수 있다”면서 임 내정자에게 힘을 실어줘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농협금융 회장 자리도 마찬가지다. 직전까지 행시 14회인 신동규씨가 맡았지만, 이번에는 농협 내부 출신에서 나오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막판에 이를 뒤집어 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임 전 실장을 내정한 것은 금융당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적지 않다.

정부 산하 기관과 각종 금융 공기업을 독식하던 모피아가 급기야 민간 금융회사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금융계 안팎에선 모피아들이 금융당국과의 소통이 원활하다는 장점을 토대로 알짜 보직을 싹쓸이 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현상은 금융지주를 넘어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최근 선임된 금융 관련 협회 7곳 중에서도 순수 금융인 출신인 박종수 금융투자협회 회장을 제외하면 모피아 일색이다.

국제금융센터 원장에는 행시 26회인 김익주씨가, 여신금융협회장에는 행시 23회 김근수씨가 선임됐다. 김 신임 국제금융센터 원장은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장, 무역협정 국내대책본부장 등을 거쳤고, 김 신임 여신금융협회 회장도 기재부 국고국장 출신이다.

이 자리에는 당초 모피아가 아닌 다른 공공기관 임원이 거론됐으나 “(낙하산으로) 나가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른 기관에 자리를 줄 수 없다”는 모피아의 논리에 밀렸다.

모피아들의 득세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한국거래소 이사장 자리에는 최경수 전 현대증권 사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최 전 사장은 행시 14회로 재정경제부 국제심판원장, 세제실장을 거쳐 조달청장을 지냈다. 7월 중 결정될 신용보증기금 차기 이사장에는 홍영만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이 거론된다.

상명하복 익숙
‘그들만의 리그’

모피아가 금융권에 낙하산으로 계속 자리를 틀 수 있는 건 선후배간 밀고 끌어주기식의 끼리끼리 행태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전ㆍ현직 모피아들은 다양한 사적 모임을 통해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이 속에서 절묘하게 권력을 유지해나간다.

모피아는 검찰에 버금갈 정도로 철저한 선후배 상명하복을 자랑한다. 더욱이 이른바 인맥을 형성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전통의 명문학교, 즉 경기고와 서울ㆍ경복고와 서울상대ㆍ법대 등으로 국한돼 있고 지역별로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기에 수직적 인맥 구조는 더욱 심해진다.

현직 한 관료는 “전직에 있음에도 현재 돌아가는 관계와 민간 금융회사의 인사 구도까지 훤히 꿰뚫고 있어 깜짝 놀랐다”며 “그들의 인적 호흡은 한마디로 ‘장막’에 비유할 수 있다”고 표현했다.

‘대부’이헌재 이어 김석동·신제윤 계보
200여명 인적고리…곳곳서 막강한 영향력


또 다른 관료 역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헌재 사단’ 역시 모피아의 네트워크 속에서 힘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며 “때로는 정치적 연줄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배가 잘 나가야 나도 산다’는 말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때로 민간 출신 인사에 대한 구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민간 출신의 한 고위인사가 들어오자 관료들 간에 일종의 따돌림 현상이 벌어지기는 사례도 있었다.

‘관치금융’
반발정서 확대

물론 모피아의 금융계 진출을 비판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대부분 업무능력이 탁월하고 일의 추진력과 돌파력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모피아 특유의 ‘끌어주고 밀어주는’ 단결력을 통해 어떤 일이든 매끄럽게 잘 처리하는 데 선수들이라는 것도 장점이다.

한 금융당국의 관계자는 “이번에 발탁된 관료 출신들의 면면을 보면 스펙(학력·경력)과 경험 면에서 민간 출신보다 나은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피아가 금융계로 세력을 확장할수록 ‘관치’에 대한 우려도 커지기 마련이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최근 성명서를 통해 “금융당국 수장이 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해 전직 고위관료 출신 인사를 민간 금융회사 회장으로 선임하라고 사외이사들을 압박하는 행위는 명백한 관치금융”이라고 비판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도 “모피아들이 퇴임 후 낙하산을 당연히 여기는 데는 자신들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선민의식도 자리잡고 있다”고 꼬집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의사 결정에 익숙하고 시장이나 민간의 논리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장기적으로 한국 금융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금융감독원이 이장호 BS금융지주 회장에게 ‘장기 집권’의 문제를 거론하며 특정한 사유 없이 자진사퇴를 종용한 것도 ‘관치금융의 부활’에 대한 금융권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BS금융지주는 정부가 단 한 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은 민간 금융회사다. 금융당국의 압박에 이 회장 측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경남은행 인수를 마무리 지은 뒤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정부가 단 한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은 KB금융 인사에 종횡무진 개입했다”며 “정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BS 금융 회장까지 바꾸라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역시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번 인사와 흘러가는 흐름을 보면 정치색이 강하게 드러난다”며 “회장 교체에 따른 금융계열사의 연쇄 인사이동이 불가피한 만큼 향후 명확한 인사검증시스템을 거쳐야 이와 관련한 잡음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모피아 대부’이헌재는…
위기관리 대가? 관치금융 화신?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초대 금융감독위원장과 두 차례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이다.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와 “관치금융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양립하는 인물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이 전 부총리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동안 ‘천재’ 소리를 들었고, 1968년 행정고시(6회)에 수석 합격했다. 재무부 금융정책과장 시절인 1972년 8·3사채 동결조치를 입안했고, 1974년 1차 석유파동 당시 외환문제 해결에도 참여했다. 1979년 율산그룹 파동에 휘말려 공직에서 물러났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에 임명돼 20년 만에 공직에 복귀했다.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3년여간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지휘해 ‘금융계의 황제’ ‘구조조정 전도사’ 등으로 불렸다. 시중은행이 망할 수 있으며, 대기업도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경제부총리로 복귀한 이 전 부총리는 정보기술(IT)과 사회간접자본(SOC)에 10조원을 집중 투자하는 ‘한국형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단기간에 주택과 토목공사를 늘려 반짝 효과만 내게 하고 근본 처방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전 부총리는 부인의 토지거래 관련 위장전입 의혹을 받자 2005년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법무법인 김앤장 고문을 거쳐 사촌동생인 이윤재 전 청와대 비서관이 운영하는 코레이에서 이사회 의장을 맡아왔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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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