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7주년 특집> 윤창중 사태로 본 ‘변태천국’ 자화상 ①권력층 성스캔들

  • 조아라 archo@ilyosisa.co.kr
  • 등록 2013.05.21 16: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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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와 여자는 악어와 악어새?

[일요시사=정치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는 수많은 비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숱하게 많은 여자가 ‘성적 도구’로 희생됐다. 지난 역사를 보면 권력가들이 정치에서 여자를 어떻게 다루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자신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여자도 있었다. 권력과 여자의 함수 관계가 무엇이기에 ‘섹스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창간17주년을 맞이한 <일요시사>가 역사 속 굵직한 사건들을 모아봤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들은 지난 2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묘사한 <백년전쟁>은 허위사실과 자료조작으로 이 전 대통령을 인격 살인하고 있다”며 역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제작자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3명을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유족들의 고소로 <백년전쟁>을 둘러싼 역사적 진실 논쟁이 법정에서 벌어지게 됐다.

이승만 불륜 다룬 <백년전쟁>
유족에 의해 고소당해

국내 유력 보수언론은 하나같이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의 진위여부에 강한 의구심을 제기하며 비난의 날을 세웠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이 전 대통령이 스캔들 문제로 고발된 건 맞지만 기소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승만의 여자’로 거론된 주인공은 ‘노디 김’이라는 이름의 당시 미국 오벌린대 여대생이다. 이 전 대통령이 노디 김과 미국 전역을 여행하다가 샌프란시스코 경찰에 잡혔다고 한다. 당시 부도덕한 성관계를 위해 주 경계를 넘었다는 주장이 <백년전쟁>을 통해 제기됐다.

<백년전쟁>에 의하면 문제가 불거졌던 당시 이 전 대통령의 나이는 46세. 함께 여행을 했다는 노디 김은 22세였다. 이 전 대통령과 여대생이 경찰서에서 범인 식별용 얼굴사진을 찍은 것 같은 영상이 <백년전쟁>에 나온다.


‘승당’이란 애호로
애절한 맘 달래

노디 김은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19년 톰킨스 목사, 서재필, 베네딕트 등에 의해 결성된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를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노디 김은 이후 이 전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해주는 인텔리여성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노디 김은 대학 졸업 후 하와이로 돌아가 워싱턴에 머물면서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 전 대통령을 대신해 ‘한인기독학원’의 원장직을 맡게 됐는데, 이때 이 전 대통령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는 전언이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은 그녀는 정부수립 후 이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조국으로 돌아와 1953년 11월24일부터 1955년 2월까지 외자구매처장직을 맡아 일했으며, 그 후 1958년 하와이로 돌아갈 때까지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대한부인회 및 인하대학교 이사 등 요직을 역임했다.

노디 김 이외에 또 한 여인은 바로 ‘임영신’이다. 그녀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만난 한인여성이다. 전남 금산 태생으로 3·1운동 때 전주에서 만세시위를 주도, 일제감옥에서 6개월간 영어생활을 했던 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그녀는 (공주)영명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23년 말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출국 시 그녀는 관동대지진 때 일제가 한국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첩을 몰래 숨기고 샌프란시스코에 들어갔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 중인 이승만에게 전달해,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 믿고 아끼는 동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승만의 여자 ‘노디 김’ 부도덕한 성관계, 구혼 거절한 ‘임영신’ 
박정희의 궁정동 술시중 든 여자만 100여명, 안가는 24시간 대기

임영신 전기에 의하면, 그녀는 졸업 후 워싱턴에서 한인교회의 이순길 장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 전 대통령의 구혼을 받았다. 임영신은 이 문제를 가지고 십여 일간 번민했다고 한다. 지인들과 상의한 끝에 그녀는 미혼의 젊은 나이로 결혼 전력이 있는 50대의 ‘노인’과 결혼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고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전 대통령을 마음에 두었던 그녀는 이때부터 이승만이란 이름에서 승자를 따 ‘승당’이라는 아호를 지어 애용했다.


해방 후 그녀는 이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민주의원의 유엔전권대사로 미국에 건너가 눈부신 외교를 벌인 끝에 정부 수립 후 초대 상공부장관으로 기용되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술시중을 드는 여자를 옆에 두고 비명횡사한 이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젊은 여자와 술판을 벌이는 장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한 매체는 박정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여자들을 조달하는 창구기능을 했다고 보도했다. 중정은

‘마담’ 2명을 활용해 200여 명의 여성 중에서 박 전 대통령 접대여성을 선택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여자를 불러다 성 접대를 받은 곳은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5~6곳에도 이른바 ‘안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200명 항시 대기
스타급 연예인도

전 중정 안가 관리직원은 2005년 2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연회 접대여성은 어떻게 준비했나”라는 질문에 “접대여성은 한 차례 이상 넣지 않는다. 박정희 눈에 들어 혹시 임신을 하거나 박정희가 여성에 빠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라며 “박정희가 찾으면 만류해보다가 잘 안 되면 추가로 딱 한 번만 더 접대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해외순방 중이 아니면 모든 안가는 24시간 대기상태에 들어간다”면서 “하루 중 언제라도 불시에 대통령이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대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겨레21>은 고 김재규 중정부장의 명령에 따라 10·26에 가담한 박선호(사형집행, 당시 46살) 중정 의전과장의 법정진술을 옮겼다. 1980년 박 과장은 ‘박정희의 여인들’과 관련해 “지금도 수십 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명단을 밝히면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무기 로비스트 ‘린다 김’, 고위층 인사와 ‘부적절한 관계’ 드러나
학력위조 파문으로 정부 고위층과 관계 알려진 ‘신정아 스캔들’

박정희정권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약했던 유력 일간지의 기자는 같은 시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육영수 여사가 죽은 뒤로 박정희 대통령은 근혜씨 등 자식들에게 약점을 잡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문란한 여자관계”라며 “큰 행사, 작은 행사 등의 얘기가 근혜씨의 귀에도 흘러들어 가 문제가 됐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궁정동을 드나들던 수많은 여자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회성 ‘왕의 여자’가 돼야 했다.


이와는 반대로 숱한 염문을 뿌리며 정국을 쥐락펴락했던 스캔들의 주인공들도 있다. ‘무기 로비스트’로 유명세를 날린 ‘린다 김’은 1996년 문민정부의 국방사업인 ‘백두사업’ 추진과정에서 정부의 고위층을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당시 그녀는 ‘권력의 심장부’로 통했다고 한다. 세간에는 생소했던 로비스트라는 말도 린다 김 사건 이후 유행처럼 번지게 됐을 정도로 린다 김은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당시 사건은 백두사업 추진의 핵심인물인 이양호 전 국방장관과 그녀가 주고받은 은밀한 편지 내용이 검찰의 조사 결과 공개되면서 소문으로만 돌던 정부 고위층 인사의 ‘부적절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이 전 장관은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두 번 가졌다”고 고백해 ‘혼외관계’를 뜻하는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을 남긴, 말 많은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권력의 심장부로 통하는
매력적인 그녀들

결국 이 전 장관은 부적절한 사랑의 대가로 낙마와 함께 공직자로서의 도덕성에도 큰 흠집을 남긴 채 권력의 뒤안길로 홀연히 사라졌다.

린다 김 사건의 뺨을 친 사건은 참여정부에서 벌어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실세인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특별한 관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큐레이터 ‘신정아 스캔들’이 그것이다.

신정아 스캔들은 2007년 7월 당시 동국대 교수였던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 의혹에서 시작된 사건이다. 이후 신씨와 인연을 맺은 미술계·대학가·불교계 인사 등으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며 정계 로비의혹까지 불거졌다.


이 사건으로 신씨는 학력을 속여 교수직을 얻고 미술관 공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2007년 10월 구속 기소된 뒤 징역 1년6개월 선고를 받았으며 2009년 4월 보석으로 석방됐다.

 

조아라 기자 <archo@ilt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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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