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7주년 특집> 윤창중 사태로 본 ‘변태천국’ 자화상④당하는 남자들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5.21 11: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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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다 말도 못하고 '끙끙'

[일요시사=경제1팀] 30대 48%, 20대 32%, 40대 12%, 50대 1%. 연쇄성폭력범들이 범행을 저지를 당시의 연령을 분석한 것이다. 이들 중 65%는 미혼인 상태였으며 절반은 '무직'이었다. 직업도 나이도 모두 제각각이지만 교집합은 하나, 남성이라는 점이다. 여성 성범죄자들은 없는 걸까. 성범죄자 99%는 남성이다. 1%는 여성이라는 얘기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모(27·남)씨는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매너로 회사 안에서 인기가 높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듯하지만 정작 김씨는 요즘 회사 출근이 두렵다. 미혼의 여성 상사 A씨 때문이다.

출근이 두렵다

A씨는 출근 첫날부터 김씨에게 "우리 막내 탱탱하네"하면서 엉덩이를 만지고 엘리베이터에서는 "운동해?"라며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김씨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수치스러웠지만 '찍힐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다. 하지만 그 뒤에도 음담패설이나 노골적인 스킨십은 늘어만 갔고 그런 A씨의 행동을 제지하는 직원들은 없었다. 김씨는 요즘 퇴사를 고민하고 있다.

박씨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상습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받고 있다. 박씨에 따르면 1주일에 한두 번은 여사장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 거부의사를 밝혀도 보고 경찰에 신고도 생각했지만 주위 시선이 부담스럽다. 주변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네가 좋아서 하는 일 아니냐" "나도 그 회사 들어가고 싶다" 등이 전부였다. 박씨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남자가 어떻게…'라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 같다고 한다.

직장인 4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40.5%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 성별로는 여성이 72.6%였으며 남성도 27.4%를 차지했다. 10명 중 4명이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고 그 중 1명은 남성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남성 피해자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술에 취한 여성 상사가 남자 부하직원의 허리를 껴안는가 하면 심지어 입맞춤까지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며 "이처럼 남성 성폭력 피해자가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도 사회인식 때문에 남성들이 피해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 자체에 대한 수치심보다 '여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더 창피해 한다는 것이다.

법 제도도 문제다. 최근까지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더라도 여자에게는 강간죄를 적용할 수 없었다. 강간죄는 형범 제297조에 따라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하여 '부녀'를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든 뒤 간음을 함으로써 성립했다. 남성이 부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남자만이 여자를 강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강간죄 대상을 부녀로 한정한 것은 남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고 오는 6월19일부터는 강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변경해 앞으로는 여자가 남자를 강간하는 것도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바로 성폭력의 피해자는 항상 여자라는 사회적 통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듯 최근 상대방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음에도 성폭력 피해자인 것처럼 허위 고소하는 이른바 '꽃뱀'이 급증하고 있다. 성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두려움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 20대 여성의 경우, 인터넷 채팅에서 만난 남성들과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은 뒤 이들 남성들 강간 혐의로 고소했다가 지난 1월 구속 기소됐다. 또 학원을 운영하는 40대 여성은 9000만원을 빌렸다가 사기 혐의로 고소를 당하자 돈을 빌려준 남성을 유혹해 성관계를 가진 후 남성을 고소했지만 검찰 수사에서 무고로 밝혀졌다.

여상사가 만져도 찍힐까봐 침묵
성폭행 누명쓰고 인생 망치기도 
6월부터 여성도 강간죄로 처벌

이런 경우 남성들은 검찰수사 과정에서 결백이 드러나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지난 7일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무혐의 처분으로 풀려난 30대 남성 B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한 것이 대표적이다.


B씨는 일면식도 없는 16세 C양이 자신을 성폭행범으로 지목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B씨는 "C양을 전혀 알지 못하고 성폭행 장소라는 모텔에 가본 적도 없다"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체포 이틀 만에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경찰은 B씨를 기소의견으로 서울남부지검에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수사 과정에서 B씨의 결백이 드러났다. 가출 뒤 친구들과 빈집털이를 한 혐의로 수배 중이던 C양이 임신을 하자 어머니의 추궁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 C양은 우연히 주운 휴대전화에 저장된 B씨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이 통화내역과 전화번호를 근거로 B씨를 성폭행범으로 신고한 것이다.

결국 B씨는 혐의없음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이미 다니던 직장에서는 권고사직을 당했고 새 직장에도 출근하지 못해 합격이 취소됐다. 또 C양의 어머니로부터 합의금 요구에 시달리며 정신적 고통도 컸다. B씨는 지난해 1월 C양 모녀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C양의 진술이 비교적 구체적이었고, B양의 조사 과정에 참여한 아동행동진술분석전문가가 'C양 진술의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고 보고했다"며 "B씨를 수사한 수사기관의 판단이 합리성을 긍정할 수 없는 정도의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법원은 앞서 B씨가 C양 모녀를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였지만 C양 측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손해배상금을 낼 능력이 안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물에 빠진 여성을 구한 남성이 성폭행범으로 몰린 사연, 성폭행 피해여성을 구하려다 피의자에게 상해를 입혀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준 사연 등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았더니 내 봇짐 내라'는 격의 황당한 사연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을 보더라도 절대 도와주면 안 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다.

무조건 피의자?

성폭력을 당한 남성, 억울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린 남성 등 남성 피해자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남성이 입소할 수 있는 피해자 보호시설은 한 곳도 없으며 성폭력 상담기관 또한 '여성을 위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남성이 도움을 청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 사이 성폭력에 울고, 주위 시선에 울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또 우는 남성 성폭력 피해자들은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성범죄 용어 정리]

[성폭력] 

성폭행, 성추행, 성희롱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 성의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


[성폭행] 

성폭력 유형 중 하나. 강간과 강간미수를 의미. 3년 이상의 유기징역

[성추행] 

강제추행. 성욕의 자극, 흥분을 목적으로 일반인의 성적 수치, 혐오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체의 행위. 키스를 하거나 상대의 성기를 만지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

[성희롱] 

업무, 고용 기타관계에서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하여 성적 언어나 행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 등을 조건으로 고용상 불이익을 주는 행위.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지만 피해자가 사업주에게 가해자에 대한 부서전환과 징계 등의 조치 요구 가능. 가해자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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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