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위, 한국 국적 이탈 사연

바빠서? “이젠 위성미가 아니랍니다”

골프선수 미셸 위(한국명:위성미)가 한국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드러나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행전안전부의 관보에 따르면 미셸 위는 지난 2월21일 법무부 장관의 허가 하에 한국 국적을 이탈했다. 이탈사유는 ‘외국 국적 선택’이다.

바쁜 일정으로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 못해
한국인 미셸 위? 국적 포기 비난 이유 없다

국적 이탈은 해당자가 해외에 거주할 경우에만 신청이 가능하고 하와이 태생인 미셸 위와 같이 ‘선천적 복수 국적자(부모가 직장근무, 유학 등의 이유로 출생지주의를 채택한 외국에 체류할 때 태어났거나 국내 다문화가정에서 출생한 자녀)’의 경우 재외공관이 이탈신고를 접수하면 외교통상부 장관을 통해 법무부로 송부되는 방식이다.

‘자랑스런 한국인’
내면의 불편함

이로써 미셸 위에게 ‘위성미’라는 이름은 지워지게 됐다. 물론 남자는 병역문제로 인해 국적 이탈에도 나이제한이 있는 등 까다롭지만 여자는 자유롭게 국적 재취득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셸 위가 굳이 국적을 포기한 배경에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23년 동안 한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포기한 이유는 2011년 1월1일 발효된 국적법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개정된 국적법에 의하면 미셸 위처럼 선천적 복수국적자는 만 22세가 되기 전에 국적을 선택하도록 돼 있다. 즉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미셸 위는 그 시기를 놓쳐 미국과 한국 중 한쪽 국적만을 선택해야 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만약 미셸 위가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 절차를 밟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만 22세가 되기 전 국내에서 외국 국적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서를 쓸 경우 복수국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새 국적법이 여지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바쁜 일정 관계로 절차를 밟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미셸 위는 한국 국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국적을 포기하면 주 무대인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를 뛸 때 수시로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등 활동에 상당한 제약이 우려됐다.

2005년 10월6일. 전 세계가 한 소녀를 주목했다. 16세 골프천재 미셸 위의 프로전향 기자회견. 나이키와 소니의 후원을 받는 1000만달러 소녀의 탄생이었다. 183cm의 키에 뛰어난 미모, 한국계 미국이민 2세의 성공스토리, 2003년 US 여자 아마추어 링크스 챔피언십 최연소 우승에 빛나는 뛰어난 실력. 글로벌 스포츠자본이 탐낼만했다.

미셸 위는 스타성을 완비한 LPGA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언론도 부응했다. 미셸 위의 뛰어난 상품성에 주목한 언론은 그녀가 아니카 소렌스탐의 뒤를 이어 골프여제로 성장해주길 바랐다. 특히 데뷔 이후의 잇따른 남자대회 출전, 성적부진, 매너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언론은 경험부족과 학업부담을 내세워 팬들에게 기다림을 요구했다.

2007년 스탠포드대학 입학은 미셸 위 셀러브리티의 정점이었다. 하버드와 예일에 주눅 든 한국에서 스탠포드대생 미셸 위는 골프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한국적 셀러브리티의 명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엔 미셸 위와 관련된 모든 것이 기사화됐다.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것도 뉴스였고 방송에서 튀어나온 “야마 돈다”는 비속어도 뛰어난 한국어 실력의 증거였다.

국적,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
언론의 애국주의와 상업주의


혹자는 빼어난 미모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또 스탠포드라는 타이틀에 매력을 느꼈을 수도, 300야드 가까이 되는 호쾌한 드라이브샷에 감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셸 위 인기의 기저에 같은 한국인이라는 핏줄의식이 작동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런데 그렇게 열광했던 미셸 위가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9만220명의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10만6588명의 한국인이 외국 국적을 취득했다. 국경 없는 글로벌시대가 아니라 국적 없는 글로벌시대인 듯하다.

국적 변경의 이유도 다양하다. 정치적 신념, 국제결혼, 취업 등이 일반적 이유이다. 재력가들은 조세부담 경감을 위해 국적을 변경하기도 한다. 스포츠세계에선 올림픽 출전을 위해 새로운 조국을 택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다양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의 도피용 국적세탁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적변경은 새로운 기회와 꿈을 향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국가가 발전할수록 국가단위, 기업단위, 개인단위의 국제네트워킹이 활발해지며 개방사회로 진입하기 때문에 국적변경은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일상화될 것이다.

국제연합(UN)은 이미 1948년 12월에 채택한 세계인권선언 15조에서 ▲모든 사람은 국적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자신의 국적을 바꿀 권리를 부인 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다. 국적 선택의 권리는 기본적 인권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미셸 위는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서 안 되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

미셸 위는 LPGA에서 원래 미국 국적이었다. 중계방송의 리더보드엔 미셸 위의 이름이 성조기와 함께 표기된다.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은 성공한 재미교포 골퍼 미셸 위가 아닌 ‘자랑스러운 한국인, 우리 선수 위성미’를 고집했다. ‘재미교포 미셸 위’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미셸 위’가 좀 더 먹히기 때문이다.

히트상품 ‘미셸 위’ 개발을 위한 언론의 코드는 미모와 학벌, 그리고 한국인이었다. 미셸 위의 한국에 대한 기억, 한국인으로서의 정서, 한국음식에 대한 기호는 모두 뉴스화 됐다. 전쟁과 가난에 한 맺힌 시절, 국민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자는 애국주의 저널리즘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프레임이 군부독재의 국가주의 저널리즘을 거쳐 히트상품 판매를 위한 상업주의 프레임으로 진화된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는 미셸 위의 인터뷰 내용이 배신의 증거인양 자주 인용된다. 지금도 미셸 위는 스스로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고 성장한 미셸 위가 한국계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

빅토르 안 선택한
쇼트트랙 황제

나이키와 소니가 미셸 위에게 각 500만달러씩 모두 1000만달러를 투자할 당시, 미셸 위는 불과 16세였다. 조기 발굴, 물량공세, 철저한 독점, 글로벌 마케팅으로 이어지는 미국식 스포츠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찌감치 ‘돈의 맛’을 안 미셸 위가 프로에서 배운 것은 골프만이 아니었다.

2005년 남자대회인 일본프로골프투어 카시오월드오픈이 미셸 위를 초청하기 위해 지불한 비용은 200만달러. 자가용 비행기에 경호비용까지 모두 포함된 액수이다. 2006년 국내서 열린 SK텔레콤오픈 출전도 적지 않은 초청비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니까 기꺼이 자원해 참가했다고 생각했다면 순진한 착각이다. 엄청난 초청비용 이외에도 미셸 위는 건설회사 신영과 30억원짜리 광고계약을 맺었다.

미셸 위에게 한국행은 고수익창출의 마케팅행사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마케팅을 비난할 수 없듯이 미셸 위의 한국마케팅 역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비난해야 한다면 미셸 위의 비즈니스를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고국방문’으로 포장한 언론의 상업주의이다.
감동적인 고국방문을 그대로 믿었다면 미셸 위 팬들의 순진함도 귀책에서 벗어나긴 힘들듯 하다.
미셸 위의 한국 국적 포기 배경에 대한 분석이 분분하다. 스폰서 확보를 위해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일부에선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서 작성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2011년 발효된 국적법은 선천적 복수 국적자에게 만 22세 전에 국내에서 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쓸 경우 복수 국적을 인정한다.

미셸 위가 이 서약서를 쓸 시기를 놓쳐 한국 국적을 포기하게 됐다는 얘기이다. 배경이 어떠하든 명확한 것은 미셸 위가 미국과 한국 국적을 두고 택일해야 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LPGA 골퍼로서, 재미교포 2세로서 당연한 선택일 수도 있다.


빅토르 안(안현수)과 신의손 당예서 등의 귀화가 미셸 위와 비교된다. 올림픽 출전과 더 좋은 환경이 공통적인 귀화의 배경이지만 선수 개개인의 속사정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당예서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무려 8년이라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대한한공 탁구부 훈련 파트너로 한국에 온 것이 2000년. 19살 한창 나이였다.

당예서는 자신의 꿈을 위해 2007년 귀화시험 합격까지 20대 청춘을 무명의 훈련 파트너로 묻어야했다. 빅토르 안의 귀화는 좀 더 처절하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카드였기 때문이다.

국적, 국가가
부여한 의무?

세계쇼트트랙의 황제로 군림하면서도 빅토르 안은 언제부터인가 국가대표로 뽑히지 못했다.
전 소속팀이었던 성남시청이 해체되면서 황제는 하루아침에 청년실업자로 전락했다. 빙상연맹과 척을 진 안현수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동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안현수는 자신을 원한 러시아를 택했다.

1000만 달러 소녀 미셸 위의 한국 국적 포기는 아쉬울 것이 없는 선택이다. 철저하게 상업화된 LPGA 골퍼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래서 단지 귀화선수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빅토르 안과 당예서를 미셸 위와 함께 거론하는 것은 왠지 불편하다. 빅토르 안과 당예서의 귀화엔 미셸 위에게는보기 힘든 한국적 현실의 고뇌와 삶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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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