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정치권 '공공의 적' 전락 막전막후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4.26 17:4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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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미워도 말려줄 시누이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 "우얄꼬?"

[일요시사=정치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유일하게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으로 정권연장에도 성공했다. 이 전 대통령만큼은 역대 최초로 뒤끝 없는 퇴임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이유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에선 무슨 연유에선지 'MB죽이기'가 한창이다. 도대체 어찌된 사연일까? <일요시사>가 추적해봤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권력의 정점이다. 하지만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퇴임 이후 삶을 살펴보면 권력무상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말 그대로 '권불십년(權不十年)'이었다. 불행하게도 단 한명도 끝이 좋은 대통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죽이기
박근혜 살리기

초대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쫓겨나 하와이로 망명해 그 곳에서 숨을 거뒀고, 역대 최장기간 집권하며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측근에게 피살당해 사망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나란히 감옥에 갇혀 전과자 신세가 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리와 관련된 수사를 받다 결국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나마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은 특별한 수난사가 없었지만, YS는 IMF(국제통화기금)사태를 초래한 주범(?)으로, DJ는 대북송금사건으로 퇴임 이후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특히 이들 전직 대통령들은 임기 말 소속정당인 집권당으로부터 '퇴출'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격어야만 했다.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유일하게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이다. 게다가 같은 당적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받으면서 이 전 대통령이 역대 최초로 뒤끝 없는 퇴임을 맞이할 것이란 기대는 커졌다. 그런데 최근 정치권에선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른바 '이명박(MB)죽이기'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6일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 상임위ㆍ특위 간사단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4대강사업 감사과정에 야당 추천 인사를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정조준한 정치권 "서서히 조여간다"
4대강에 빠지고, 국정원에 갇히고 '사면초가'

여의도 정치권과의 소통 강화 차원에서 이뤄진 이날 회동에서 박 대통령은 민주당 간사단이 4대강사업 국정조사와 관련해 "야당 추천 인사도 포함해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진행했으면 한다"고 제안하자 "국민적 의혹이 있는 만큼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윤관석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에 대해 "야당 추천 인사를 어디에 포함시킬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하진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참여시킬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누리당은 이미 야당 측에 4대강사업과 관련한 국정조사를 약속한 바 있다. 4대강사업은 이 전 대통령의 최대 역점사업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이 전 대통령이 아직 임기 중에 있던 지난 1월 감사원은 4대강사업이 '총체적 부실'이라는 감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17일에는 이미경 민주통합당 의원이 이 전 대통령의 고려대 동기이자 현대건설에서 함께 근무했던 김태원씨가 운영하는 태아건설이 이명박정부에서 4대강사업을 비롯해 경인아라뱃길 등 관급공사를 5000억원 이상이나 수주했다며 특혜의혹을 제기해 4대강사업을 둘러싼 잡음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처럼 최근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이 4대강사업을 공격해 오고 있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를 방어하기는커녕 오히려 길을 열어주며 이 전 대통령과 선 긋기에만 전념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재 정치권의 분위기대로라면 향후 이 전 대통령은 4대강사업과 관련해 직간접으로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해 보인다.


4대강 봇물 터지고
국정원 독박 쓰고

지난 18일에는 경찰이 대선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직원들에 대해 기소의견으로 검찰송치를 결정해 이 전 대통령을 긴장하게 했다.

국정원 직원 김모(29·여)씨와 이모(39)씨, 일반인 이모(42)씨 등은 지난해 8월부터 대선 직전까지 인터넷에서 특정 대선후보를 겨냥해 악성댓글을 올리는 등 대선 정국에 개입해 국가정보원법을 위반(정치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다만 경찰은 애초 주요혐의로 거론됐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철저히 이 전 대통령만을 겨냥한 수사결과였다.

국정원법 위반의 경우는 이명박정부 하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이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전가되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의 경우는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 대통령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었다.

경찰은 "이들이 올린 게시글에서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발견하지 못해 선거운동에 이르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유독 대선기간 집중적으로 글을 남긴 이들에게 단순 정치관여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것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지난 대선과 관련한 공직선거법 공소시효는 오는 6월19일 만료된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해서는 이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까지 된서리를 맞았다. 지난달에는 원 전 원장의 출국설과 관련, 검찰이 이례적으로 신속한 출국금지 조치를 내려 정치권을 놀라게 했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정부에서 국정원장으로 4년 동안이나 재임했다. 그는 매주 이 전 대통령을 독대할 정도로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만약 원 전 원장의 정치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 전 대통령도 그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게다가 여야는 지난 2월26일 이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한식세계화사업에 대한 감사요구안'을 의결하기도 했다. 한식세계화사업은 이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윤옥 여사가 직접 '한식세계화추진단'의 명예회장을 맡을 정도로 애착을 갖고 추진한 사업이다.

권력의 맛
짧고 쓰다

여야는 감사요구안을 통해 "한식세계화 지원사업의 집행 부진, 연도 말 사업내역 변경 집행 등 사업의 적정성 및 타당성과 관련해 농림수산식품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한식재단 및 농림수산식품기술기획평가원을 대상으로 한 감사를 요구한다"며 "한식세계화사업 전반에 대한 감사를 통해 과정상의 적법성과 타당성을 살펴 유사사례가 재발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감사요구안은 재적의원 202명 가운데 찬성 189표, 반대 7표로 통과됐다. 새누리당 의원들도 감사요구안의 통과를 적극 찬성한 것이다. 이 전 대통령으로서는 '권력무상'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꼈을 법 하다.

한식세계화사업의 주요감사 사항은 ▲한식세계화 지원 사업예산 연례적 집행 부진 사유 ▲예산 운용 및 사업 효과성에 대한 감사 ▲2011년 한식재단의 ‘뉴욕 플래그십 한식당’ 개설비 50억원 예산 내역 미이행 사유 등이다.




그렇다면 정치권은 왜 MB죽이기에 나선 것일까? 전문가들은 여야 모두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민주당의 경우는 지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은 이 전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현재 민주당의 최대 계파는 다름 아닌 친노(친노무현)다.

민주당이 이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엔 일종의 복수심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정권 내내 사실상 억압을 받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일부 야권 인사들은 이 전 대통령을 반드시 단죄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직선제 이후 최초로 당적을 유지한 채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점이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결국 청와대와 새누리당에도 타격을 입혀 야권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다.

박근혜가 야당 먹잇감으로 이명박 던져줬다?
힘 잃은 MB, 뼈저리게 느끼는 '권력무상'

청와대와 새누리당에게는 더욱 복잡한 이유가 있다. 정치권 안팎에선 최근 인선 실패와 공약 후퇴 논란 등을 겪으며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박근혜정부가 이 전 대통령을 '야당의 먹잇감'으로 내던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를 통해 여론의 시선을 분산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으로서는 이미 대선기간 이 전 대통령과 충분히 선 긋기를 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을 희생양으로 내세운다고 해도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을 감싸주려다 '동반책임론'에 휘말릴 경우 정권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퇴임 후 왕성한 대외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 강남에 개인사무실을 준비하고 4대강 자전거 종주를 계획하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이 박 대통령보다 앞서 방미 일정을 잡은 것을 놓고는 박 대통령이 무척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는 전언이다. 

갈 곳 없는 MB
벼랑 끝에 선 친이

일각에선 새누리당 내 친이계(친이명박계)의 힘을 빼기 위한 다목적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 새누리당에서는 친이계로 분류되는 인물이 10여명 정도 있다. 이들은 사사건건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며 박 대통령에겐 눈엣가시로 여겨지고 있다.

새누리당이 아슬아슬한 과반을 유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친이계가 세력화할 경우 소수의 인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전 대통령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친이계의 힘을 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이 여러 가지 사안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면 당분간은 친이계가 정치 전면에 나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던 이 전 대통령은 이제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속절없이 휘둘리는 신세가 됐다. 격랑 가운데 일엽편주(一葉片舟) 신세가 돼버린 MB의 운명은 과연 어찌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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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