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옥(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이 털어놓은 정치비화

“DJP연합, DJ보다 내가 먼저 사인했다”

바쁘게 지나온 질곡의 정치사를 뒤로하고 새롭게 정치권으로 돌아온 이가 있다. 한광옥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다. 한 전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가능케 한 이른바 ‘DJP연합’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며, 초대 노사정위원장으로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청와대 비서실장, 새천년민주당 대표 등을 지내며 두 번의 정권 창출 역사의 중간에 서 있었다. 6년간의 정치적 변혁기 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지난 1월 친정인 민주당에 복당한 한 전 대표. 입 무겁기로 유명한 그를 만나 그간 말하지 못했던 정치비화를 들어봤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산  1년10개월 “뒤에 선 조정자 역할”
‘노무현 대통령’ 만든 국민경선제, 밝히지 못하는 속내


10여 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태풍의 눈’ 안에서 우리 정치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함께한 한광옥 전 대표가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8월 특별복권을 계기로 정치적 자유를 얻어 민주당에 복당한 것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 4월 재보선에서 당내 경선에 출마했다. 여의도로 돌아왔다고 끊어졌던 정치생명이 이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선으로의 복귀를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그는 경선에서 졌다. 잡음이 많았던 경선이었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나서면 승리가 확정적이라는 분석이 있었기에 그의 향후 행보를 앞서 짐작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그는 깨끗이 승복했다. 게다가 국회의원 재선거 지원유세에 나서기까지 했다.

정치적 고향 찾은 한광옥
‘민주대연합’서 DJP를 추억하다

한 전 대표는 최근 당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정동영 전 장관의 복당에 대해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는 말로 복당에 찬성표를 던졌다. 민심은 정 전 장관에게 공천을 주라고 했는데 이를 무시한 당 공천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다고 탈당을 한 게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양쪽 다 문제가 있었다. 큰틀에서 생각했어야 했다”면서 “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다. 당 정책을 대통령을 만들거나 집권당이 돼서 실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인은 당의 결정에 승복했음에도 당의 공천 배제 결정에 뛰쳐나가 무소속연대까지 꾸린 정 전 장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한 전 대표의 주장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가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건 그가 지나온 시간과 무관하지 않다. 한 전 대표는 지난 1997년 대선을 앞두고 DJP연합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한 전 대표는 “과거 DJP연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국민의 정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만큼 DJP연합이 이룬 성과가 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DJP 연합은 정권창출에 큰 역할을 했다. 경험 삼아 비춰보면 정권은 쉽게 창출되지 않는다. 조직·홍보·정책 등 야당이 집권당의 1.5배의 힘을 더 가지고 있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이 모여야 한다. 민주대연합은 집권을 위해 필요하다. 집권을 위해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이념과 정체성 등에 동조하고 동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여야 한다. 사사로운 욕심이 앞서면 안 된다. 민주당의 정체성을 같이 할 수 있었던 사람 전체를 모아야 한다.”
한 전 대표는 그간 말하지 않았던 ‘DJP’연합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DJP연합이 이뤄진 건 1997년 11월3일이었다. 1996년 5월4일 DJ와 JP의 국회 회동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뒤 1년여가 넘어서야 간신히 성과를 이룬 것이다. 12월18일 치러질 선거를 50여 일 앞둔 아슬아슬한 타협이었다.

한 전 대표는 이 DJP연합을 통해 헌정사 최초로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부총재였던 한 전 대표와 김용환 전 자민련 부총재간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10월20일까지도 줄다리기는 멈추지 않았다. 선거는 다가오고 있었고 결국 김용환씨에게 ‘선거 끝나면 합의할 거냐’고 말했다. 우리끼리 먼저 합의를 하고 DJ와 JP에게 합의문을 들이밀자고 했다.”
결국 모 호텔에서 만난 한 전 대표와 김 전 부총재는 10월25일 만들어진 합의문 초안을 마지막으로 검토한 후 사인했다. 이후 총재들에게 사후결재를 받았다.

팽팽한 줄다리기 끝 합의
타협 뒤 숨은 이야기

한 전 의원이 사무총장 시절 시작해 부총재가 됐을 때 마무리 지은 값진 성과였지만 발표는 미뤄졌다. 10월30일 MBC 후보연설에서 JP가 DJ를 밀겠다고 하고 발표를 하자는 제안이 나왔던 것. 그 외엔 비공개를 하자고 철썩같이 약속했다. 한 전 대표는 당시 ‘자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밤 9시 반이나 10시쯤 나와 김용환씨, DJ와 JP 4명이 만나 차를 한잔 마셨다. 내가 김용환씨와 먼저 나오고 DJ와 JP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일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탑 기사로 ‘DJP연합’이 보도된 것.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를 제외한 다른 언론사 출입기자들이 다 바뀌는 소동이 일어났다. 뿔난 언론에 의해 DJP연합은 형편없는 것처럼 비하됐고 지지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한 전 대표의 입장도 난처해졌다. 그러나 결국 DJ는 당선됐고 그간의 노력은 빛을 봤다.    
“합의문을 만들 때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합의문이 자민련의 내각제를 수용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는데 아무리 힘들었어도 내각제 시도는 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약속이니까. 그 점이 아쉽다.”


휴가 가려다 잡힌 발목
초대 노사정위원장의 탄생

DJ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한 전 대표의 짐은 덜어지지 않았다. DJ가 당선인 신분이 되고 대선을 거치며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지방으로 가려던 그에게 만나자는 DJ의 전화가 왔다.
삼청동 인수위원회로 간 한 전 대표는 “위기다”라는 말로 시작된 DJ의 부탁에 다시 짐을 떠안았다. 외환위기를 극복해야 하는데 외화잔고가 턱없이 모자랐다. DJ는 “IMF에 돈을 빌려오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노사문제가 안정돼야 한다”고 했다. 비상경제대책위(김용환 위원장)는 꾸려졌지만 노사정위원회의 일이 우선이었다. 그에게 노사정위원회를 꾸려 노사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있지도 않은 노사정위원회를 꾸리기 위해 경제기획원장관과 노동부장관, 전경련, 경총, 한국노총, 민주노총, 각 당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차관급 실무위원들을 배치하고 실무위원들을 보좌할 전문위원을 구성, 3층집을 지었다.
노사정위원회의 조항을 하나 만드는 것도 힘들었다. 양 노총을 설득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큰일을 하고 있었지만 환경은 열악했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노동위원회에서 방을 빌려 일을 해야 했다.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사무실 앞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회의를 가졌다. 한 달여 간 소주 한 박스를 마셔가며 대화를 나눴다.
“마지막까지도 타협이 안 됐다. 당시 합의가 될 때까지 거의 현장중계로 방송을 탔다. 7시 반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는데 8시 반이 돼서야 합의했다. 문제조항이 있었는데 합의를 해주는 사람의 ‘목’이 달아날 판이어서 쉽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가 부도나면 기업체도 부도가 나고 그럼 노동현장도 없어진다’고 직설화법으로 설득했다.”
정공법은 그만큼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다. 감정적 동질감이 없으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 도움이 됐고 결국 양측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 전 대표는 사측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해 ‘상호보완적’이라고 말한다. 상생한다고 생각하고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지금도 노사문제가 많이 일어나는데 대화가 부족하고 그로 인해 인식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사업자는 솔직해야 한다. 재무재표를 보여주고라도 노동자를 납득시켜야 한다. 불신이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은 노동관이 많이 달라져서 대화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동자 입장을 알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고용주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노동운동도 성숙해지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노사정위원장으로 대타협을 이뤄낸 데 대해 한 전 대표는 “국가에 대해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대 노사정위원장으로서의 자부심도 적지 않다.
“사회협약기구 아니냐. 풀어나가면 안 될 것 없다.”
2000년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관료도 아니고 정치인이다 보니 당정간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역할을 했다. 잘 했다고 자부한다. 1년 10개월여 동안 큰 트러블 없이 정치적 안정이 이뤄지지 않았나.”

한 전 대표는 청와대에서 지낸 기간 동안 휴가 한 번을 못 갔다. 수석들은 보냈지만 그는 가지 못했다. “당신 없으면 나라 운영이 안 되는 듯 행동한다”는 집사람의 책망도 들었다. 그러나 비서실장은 매사를 섭렵해야 했다. 부처 막후에서 갈등을 조절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전 노사관계도 막후에서 조절해서 풀어냈다. 사장과 노사위원장을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2001년 9월 당정개편으로 한 전 대표는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됐다. 대표시절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은 단연 ‘국민경선제’를 만든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후보가 나왔다. 그러나 중산층 이상은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중산층 이하까지 포함시켜 힘을 모아야 했다.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야 했다. 노무현을 띄우고 정권을 재창출해야 했다.”
그가 국민경선제를 만든 배경이다. 추진과정에 진통도 많았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진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뭣 하러 하냐”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집권을 목표로 했을 때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한 전 대표는 국민경선제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국민경선제의 진통을 겪은 이들이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라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자크’가 닫힌 것.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노 대통령’ 만든 국민경선제

그는 마지막으로 후배 정치인들에게 ‘온고지신’을 새기라고 강조했다. “과거 정치엔 질서가 있었다. 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선과 능력있는 이들, 당직이 존경받고 존경하려고 하는 풍토였다. 불만이 있어도 스스로 이해하고 질서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질서가 많이 약해졌다. 노장청의 조화를 이루고 균형감각을 가지라고 하고 싶다. 우리만 당 위하고, 우리만 능력이 있고, 우리만 개혁자라고 하면 다른 이들은 비개혁주의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한 전 대표는 “정치도 인간이 하는 것”이라면서 “도덕과 윤리 같은 것도 강조하고 싶다. 불신에서 나오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진실해야 하고 거짓말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성을 주지 못하면 허구가 판치게 되고 이는 언젠간 노출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정도를 걸으라고도 하고 싶다. 무소속 출마로 실리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30년 정치인생이 정도를 걸으라고 하더라. 정도를 걸음으로써 손해를 보는 선비정신도 보여주고 싶었다. 정치의 정도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몸소 다시 깨달았다”고 말했다.
외롭고 힘들어도 뚜벅뚜벅 걸어 후배의 귀감이 되겠다는 한 전 대표. 그는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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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