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파도남' 채동욱 신임 검찰총장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4.12 15: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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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눈높이서 깨끗한 칼 휘두른다"

[일요시사=사회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자 국민들로부터 가장 부패한 조직으로 불리는 검찰이 쇄신의 계기를 마련했다. 바로 채동욱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한 것. 낙하산 총장이 아닌 검찰 내부로부터 추천된 인사기 때문에 채 총장이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한 채 검찰 개혁을 완수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파도 파도 미담만 나왔다"는 채 총장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121일간의 공백 끝에 '채동욱 시대'가 열렸다. 박근혜정부는 첫 검찰총장으로 채동욱 신임 총장을 선택했다. '독이 든 성배'란 우려 속에 채 총장은 지난 4일 취임 일성으로 "오욕의 시대에 반드시 종지부를 찍겠다"고 역설했다.

검 내부평가 '굿'
"신망 두터운 리더"

채 총장은 지난 2월 사상 처음으로 구성된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에서 김진태 전 대검 차장, 소병철 대구고검장과 함께 검찰총장 후보자로 추천받았다. 검찰이 직접 후보자를 낸 건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검찰 내부의 기대도 높았다. 과거 대통령이 낙점하던 총장과는 그 출발부터 달랐다는 얘기다.

세 후보자가 경합하는 형세 속에 채 총장의 인선을 처음부터 예상했던 이는 많지 않다. 가장 먼저 주목받은 건 김 전 차장. 그는 7인회 핵심 멤버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과의 인연으로 가장 유력한 총장 후보로 거론됐다.

더불어 김 전 장관이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정홍원 국무총리, 황교안 법무부장관 등이 연이어 인선되면서 총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김 전 차장 체제가 그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 관계자는 김 전 차장의 취임 가능성을 낮게 내다봤다. 친불교 성향의 김 전 차장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황 장관의 코드가 맞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다수 언론에서는 소 고검장도 유력한 총장 후보로 예측했다. 새 정부 인사의 지역 안배 차원에서 호남 출신인 소 고검장이 총장에 오를 것이란 추측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 검찰 소식통은 "그건 검찰 조직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소 고검장은 15기로 만약 소 고검장이 총장이 된다면 선배 기수인 14기 검사는 모조리 사퇴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검찰 조직에 큰 공백이 생길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결국 이들 외에 남은 한 명의 후보자는 채 총장이었다. 채 총장은 다른 후보자들보다 검찰 내부 평가가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채 총장에 대한 인물평을 부탁하자 한 관계자는 "검란사태 당시 지휘부 중 가장 먼저 전면에 나서 한 전 총장을 끌어내릴 정도로 신망이 두텁고 상황 판단에 능한 지휘자"라고 소개했다.

황 장관과의 사이도 김 전 차장보다 덜 껄끄러웠다. 김 전 차장은 황 장관보다 기수는 낮지만 나이는 많았던 것에 반해 채 총장은 기수도 낮고 나이도 어렸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검찰 관행도 깨지 않으면서 황 장관과의 궁합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은 채 총장이었다. 채 총장은 탁월한 업무조정과 친화력 있는 리더십으로 능력 면에서도 합격점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진태·소병철 제치고 박근혜정부 첫 총장
오랜만에 착한 청문회 "파도 파도 미담만"


채 총장을 선택한 청와대의 전략은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지난 2일 국회에서 열린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채 총장은 '파도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무난히 검증을 통과했다.

'파도남'은 박범계 민주통합당 의원이 "청문회 보좌진들에게 (채 총장에 대해) 봐주지 말고 한 번 파보라고 했더니 파면 팔수록 미담만 나온다"고 말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간 고위공직 후보자들에게서 보였던 각종 부패 의혹이 채 총장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것. 법사위 소속 여야 의원들은 대체로 채 총장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렸다.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박지원 민주통합당 의원은 "채 후보자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인사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도덕성을 갖고 있다"면서 "인사청문회가 아니고 칭찬회 같아서 어색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도 "오늘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자의 업무 능력을 위주로 청문회를 했던 것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채 후보자는 그동안 자기 관리를 충분히 잘 해왔다"고 호평했다.

또 정 의원은 "채 후보자의 재산신고 사항을 보니 권력기관의 고위공직자답지 않게 부인의 재산이 거의 없다"며 그의 도덕성을 추켜세웠다.

채 총장은 검찰 내에서도 '깨끗한 검사'로 통했다. 특수부 검사로 대기업 사건을 주로 담당했으면서도 정치적·금전적 거래를 하지 않았다는 것. 한 관계자는 "채 총장이 현대자동차 비자금 파문 때 중수부 수사기획관을 했는데 그때 생긴 별명이 '재계의 저승사자'였다"며 "만약 그때 떡값을 받았다면 이번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었겠느냐"고 설명했다.

이처럼 검찰 안팎의 칭찬 속에 채 총장에 대한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됐다. 그리고 지난 4일 채 총장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별관 4층에서 취임식을 열고 "외부의 압력과 유혹도 검찰총장인 제가 방파제가 되어 모두 막아내겠다"며 검찰 내부의 쇄신을 주문했다. 검찰 개혁의 기치를 내건 '채동욱호(號)'가 닻을 내건 것이다.

훈훈한 청문회
미담만 전해져

채 총장은 서울 출신이지만 검찰 내에서는 범호남권으로 분류된다. 세종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8년 서울지검 검사로 법조계에 첫 발을 들였다.

1995년에는 독일연방법무부에 파견돼 통일법을 연구했으며, 부산지검 동부지청과 서울지검 의정부지청에서 형사부장, 대검찰청 마약과장, 서울지검 특수2부장, 대검 수사기획관, 부산고검 차장, 전주지검장, 법무부 법무실장, 대전고검장, 대검 차장, 서울고검장 등을 역임했다. 대검 중수과장·중수부장을 지내지 않아 ‘정통’특수통은 아니지만 서울지검 특수2부장과 대검 수사기획관을 지내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서인지 채 총장은 현직 중 '특수통의 최고 좌장'으로 불린다. 또 조직 관리에서는 '덕장(德將)', 업무에는 '맹장(猛將)'으로 불릴 만큼 선후배 간 신망이 두텁고 업무적으로는 굉장히 치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풍부한 수사경험과 탁월한 상황 판단력은 채 총장의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채 총장은 굵직한 정·재계 사건을 도맡아 왔는데 대기업 관련 수사에서도 일정 부분 성과를 내는 등 법과 원칙에 충실했다는 인물평이 대부분이다.

채 총장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 수사에 참여한데 이어 서울지검 특수2부장 시절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변칙 증여 사건, 김운용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의 공금유용 사건 등을 이끌었다.

채 총장은 굿모닝시티 분양 비리에선 정계 거물인 정대철 민주당 전 대표를 구속하는 뚝심을 보였다. 삼성 에버랜드 CB 사건에서는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 당시 허태학 사장 등을 기소해 검찰의 위신을 세웠다.

또 2006년 대검 수사기획관 때에는 현대자동차 비자금 의혹과 론스타 외환은행 헐값매입 의혹을 지휘했고, 2010년 대전고검장 시절에는 '스폰서 검사 사건' 진상조사단장을 맡았다. 당시 조은석 대검찰청 대변인은 채 총장을 진상조사단장으로 인선한 이유에 대해 "조직 내 신망과 언론의 신뢰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채 총장의 검찰 내 입지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다.

'스폰서 검사 사건'과 관련 일각에서는 "제 식구를 감싼다"는 비난이 있었다. 하지만 채 총장은 외부 여론에 맞서 묵묵히 수사를 끌고 나갔다. 이 사건으로 채 총장에 대한 검찰 내 신뢰가 높아졌음은 말할 나위 없다.

지난해 말 사상 초유의 검란(檢亂) 사태 당시 대검 차장으로 있으면서 검찰 간부들과 함께 한상대 전 검찰총장을 끌어내린 것도 이 같은 조직 내 신뢰에 기반을 둔다는 평이다.


이 때문에 채 총장은 외부적으로는 검찰 개혁의 성과를 내야하고, 내부적으로는 조직을 추슬러 사분오열된 검찰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 내·외부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채 총장에게 주어진 것.

특수통 좌장
검란서 두각

그러나 채 총장은 급진적인 개혁보다는 조직 안정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 보단 검찰 내부의 쇄신을 통해 개혁을 이루겠다는 것. 특히 채 총장이 중수부 폐지와 상설특검제 도입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채 총장을 바라보는 우려 섞인 시선이 많은 게 사실이다. 이번 인사청문회를 통해 채 총장은 기존 입장을 일부 수정했으나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청문회 당일 서영교 민주통합당 의원은 "대검 중수부 폐지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자 여야 모두의 공약"이라면서 "채 후보자는 중수부 폐지, 상설특검제 도입, 감찰 강화 등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답변 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가"라고 채 총장을 추궁했다.

그러자 채 총장은 "중수부 폐지는 반대한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히는 한편 "중수부 폐지에 따른 부패 수사의 공백이 우려된다. 보완책이 신속하게 선행돼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중수부는 폐지하되 중수부와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는 부서를 다시 만들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또 상설특검제 도입과 관련해 "상설특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 정확한 입장을 말할 수 없다"고 운을 뗀 뒤 "새로운 수사기구가 만들어진다면 법리적 문제도 없어야 하고 부작용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원론을 밝혔다.

그러면서 채 총장은 "어떤 특검이든 수사권 충돌과 갈등이 있으면 안 된다. 검찰 총장에 취임하면 갈등이 없도록 조화롭게 이끌어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 특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채 총장이 밝힌 개혁 방안은 대체로 검찰 내부 감찰 강화였다. 그는 "감찰기구를 확대 개편하고, 거기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비난이 있기 때문에 외부 인사를 대폭 영입, 외부 수사관들이 수사할 수 있는 체제를 강구하겠다”며 “감사 과정에서의 심사를 강화해 부적격으로 판단될 시 가차 없이 퇴출시키겠다”고 말했다.

이어 채 총장은 "검사나 수사관이 비리, 불법이익을 취득할 경우, 이를 박탈하는 징계부과금 제도도 적극 도입하겠다"며 "변호사 개업 제한과 관련해서는 법무부와 협의해서 방안을 찾겠다. 비리나 추문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답변했다.

개혁과 조직안정 양립 가능할까
중수부 폐지와 상설특검제 도입?

청문회장을 떠난 채 총장은 취임식에서도 앞선 입장을 반복했다.

채 총장은 중수부 폐지에 대해 "국민이 지지하는 방향으로 특별수사체제를 재편하되 부패수사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면밀하게 설계도를 그려야 한다"며 거듭 소신을 밝혔다.

그러면서 "권력형 부정부패, 시장질서를 왜곡하는 기업범죄와 자본시장 교란사범, 국가경쟁력을 침해하는 기술유출범죄 등 검찰만이 할 수 있는 분야에 수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자리에서 채 총장은 "일반 특수사건은 서울중앙지검 등 일선 특수부에서 처리하고 중·대형 사건은 규모와 특성에 따라 맞춤형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야 한다"고 검찰 운영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정치적 편향성 및 공정성 시비 우려가 큰 사건의 경우 "(특별검사가 아닌) 특임검사 제도를 확대 운영해야 한다"고 하는 등 정치권의 검찰 개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검찰의 독립성을 유지하겠다는 시그널로 해석됐다. 앞으로 채 총장은 정치권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둔 채 검찰 쇄신을 해나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위기의 검찰?
그래도 우린…

지난해 성추문 검사, 벤츠 여검사 등 잇단 비리·비위로 검찰이 전방위적 개혁 압박을 받은데 이어 사상 초유의 검란으로 한 전 총장이 후배들에게 쫓기듯 퇴임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검찰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은 아직 싸늘하다.

이를 의식한 듯 채 총장은 "깨끗하지 못한 칼이 정의의 도구가 될 수 없듯 청렴하지 못한 자는 국민이 납득하는 정의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며 국민 눈높이에 맞는 검사의 '처신'을 당부하고 나섰다. 

채 총장 본인도 외부 여론에 민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권위주의 시절, 검찰의 잘못된 기소와 처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할 용의가 있느냐"는 질문에 "총장 취임 이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할지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며 "잘못된 과거에 대한 반성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고 답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이지만 여론은 두렵다는 방증이다.

한 법조계 인사는 "국민이 원하는 검찰 개혁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검찰 조직을 추스르는 게 먼저"라며 "채 총장에게 시간을 갖고 기다려주자"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 인사의 말처럼 채 총장이 검찰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이끌어 국민이 원하는 검찰 개혁을 이뤄낼지 온 국민의 이목이 신임 총장에게 집중되고 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채동욱은 누구?

   

▲1959년 서울 출생
▲세종고·서울대 졸업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연수원 14기)
▲1995년 독일연방법무부 파견(통일법 연구)
▲2003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 부장검사
▲2004년 대전지검 서산지청 지청장
▲2005년 국가청렴위원회 및 부패방지위원회 파견
▲2006년 부산고검 차장검사
▲2006년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2009년 대전고검 검사장
▲2011년 대검찰청 차장검사
▲2012년 서울고검 검사장
▲2013년 제39대 검찰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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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