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산소탱크’ 박지성

‘꿈의 무대’ 이번엔 기필코 밟는다!


‘산소탱크’ 박지성이 꿈의 무대에서 주연으로 떠올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입단 후 4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서 시원한 골을 선보인 것. 그는 지난 6일 아스널과의 준결승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퍼거슨 맨유 감독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박지성이 보여준 활약에 답했고 다가올 결승전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란 것을 시사했다. 박지성은 이로써 항간에 떠돌던 ‘위기설’을 깨부수고 당당히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위기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한 방’을 보여준 그의 축구인생을 되돌아봤다.

챔피언스리스 준결승에서 선제골 넣어 팀 승리 견인
준결승 두 경기 골 넣어 골 결정력 부재 말끔히 해소
퍼거슨 감독, 강한 믿음 보이며 결승전 출장 가능성 시사
위기마다 발휘되는 진면목 또 한 번 나타나 축구팬 열광

“박지성이 맨유 이적 후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이번 결승전에서 박지성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일 아스날과의 경기 후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박지성은 활약상에 비해 가장 과소평가를 받은 선수다. 올 시즌 맨유가 치른 중요 경기들을 보면 박지성은 항상 그 경기에 있었다”라며 다시 한 번 박지성이 팀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에 대해 역설했다.

두 경기 연속 골 행진
돌아온 ‘박지성’ 알려

퍼거슨 감독이 유례없이 박지성에 칭찬을 쏟아 부은 데는 이유가 있다. 부상 없이 올 시즌을 소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던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박지성 부활에 서막을 알린 것은 지난 2일 미들즈브러와의 프리미어리그 정규리그 경기였다. 이날 박지성은 루니의 패스를 받아 환상적인 왼발 슛으로 골을 터트리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공간을 찾아내는 움직임이 돌아왔다는 것은 골 소식보다 더욱 값진 소득이기도 했다.

지난 6일 런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그의 진가는 또 다시 발휘됐다. 이날 아스널과 2008-2009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원정경기에 선발로 나온 박지성은 전반 8분 선제골을 뽑아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반 90분을 모두 뛴 박지성의 이날 경기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호날두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반 16분에는 호날두의 힐패스를 루니에게 연결하며 쐐기골을 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박지성은 경기장 곳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날랜 몸놀림을 보여줬다. 맨유 선수 중 유일하게 선발출전한 모든 필드 플레이어와 패스를 주고받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경기를 주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을 올린 것은 2005년 7월 맨유 입단 후 처음이며 PSV에인트호벤(네덜란드) 소속이던 2005년 5월5일 AC밀란(이탈리아)과 2004-2005 시즌 4강 2차전(3-1 승)에서 선제골을 넣고 나서 4년 만이다. 올 시즌 4골, 맨유 유니폼을 입은 뒤로는 개인 통산 12호 골을 기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같은 눈부신 성과에 언론과 축구팬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영국 스포츠전문채널 ‘스카이스포츠’는 경기 후 “박지성의 골이 사실상 맨유의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며 박지성에 평점 8점을 부여했다.
맨체스터 일간지 <맨체스터 이브닝뉴스> 인터넷 판은 촌평을 통해 박지성의 가치를 인정했다. 신문은 “박지성이 카를로스 테베스와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제치고 선발로 출전한 것은 놀랄 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8분 만에 침착하게 선제골을 터트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루니에게 멋진 패스를 내줘 팀의 세 번째 골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경기장에서 맨유의 경기를 생중계한 맨체스터의 라디오 방송국 ‘Key 103’ 역시 박지성의 활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맨유의 전설’ 미키 토마스와 해설자 휴 페레이의 입에서는 전후반 90분 내내 박지성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전반 8분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자 “박지성의 골은 이곳 에미레이츠 경기장에서 1430㎞ 떨어진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며 “지난 경기에 이어 저런 엄청난 골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라고 중계했다.

후반 16분, 박지성의 발끝에서 시작돼 루니에서 호날두로 연결된 득점포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박지성과 루니가 날카로운 패스로 호날두의 골을 넣었다.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들은 경기 종료 직전 박지성이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이자 “박지성이 90분이 거의 다 지나간 지금 이 시간에도 엄청나게 뛰어다니고 있다”며 극찬했다.

내친 김에 결승전까지
퍼거슨 감독 믿음 이어지나

이처럼 자신의 믿음에 골로 보답한 박지성에 대해 퍼거슨 감독은 ‘꿈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박지성이 뛸 수 있으리란 것을 시사했다. 오는 28일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결승전에 박지성을 출장시키겠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던 것. 만약 박지성이 이날 경기에 출전한다면 아시아선수로는 최초로 꿈의 무대에 서게 된다.

박지성은 지난해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쉽게도 출전이 무산된 경험이 있다. FC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에서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첼시와의 결승전에는 대기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 당시 박지성은 출장이 무산된 데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퍼거슨 감독도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올해 박지성이 보여준 모습은 퍼거슨 감독이 지난해와는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박지성에게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골 결정력 부재’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산소탱크’라는 별명에 걸맞게 좌, 우, 중앙에서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보이고 있고 빠른 스피드와 골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진 그가 골 결정력에서는 늘 부족한 면을 보였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다.

박지성 본인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꼭 출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서슴없이 보였다. 박지성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두 골로 결정력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앞으로 꾸준히 보여줘야 한다”라며 “(결승전은) 나뿐 아니라 모두가 뛰고 싶은 경기다. 나도 뛰고 싶다. 일단 작년에 경기장에 설 수 없었기에 이번엔 경기장에 서고 싶다. 꼭 결승전에 나서고 싶다”고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처럼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꿈의 경기 출장을 눈앞에 둔 박지성. 축구선수로서의 그의 인생 역시 한 방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꾸준히 나아간 결과물이다.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재학 당시 축구를 시작한 그는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였다. 그러나 축구선수를 하기엔 왜소한 체격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콤플렉스였다. 각종 보양식을 챙겨 먹었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가벼운 훈련만 할 정도였다.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명지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2000년 올림픽 축구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당시 올림픽 대표팀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 또 그해 일본 J리그에 스카웃을 받고 연봉 5000만 엔과 주전급 대우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토 퍼플 상가에 진출했다.

그리고 2002년, 박지성은 운명의 스승을 만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가 바로 그다. 월드컵 4강 진출에 크게 기여를 한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유럽행 제안을 받았고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박지성은 연봉 100만 달러를 받고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PSV에인트호벤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선수생활이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부상으로 인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들쭉날쭉한 플레이를 펼쳤던 것. 이 때문에 홈팬에게조차 야유를 받을 정도에 이르렀고 플레이가 위축되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위기에 강한 박지성은 부상 치료 후 서서히 실력을 끌어 올려 발군의 기량을 보이기 시작했고 팀내 주요 선수로 발돋움했다. 이에 야유를 보냈던 에인트호벤 팬들이 ‘위숭 빠르크’라는 박지성 응원가까지 만들면서 달라진 그에게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맨유는 2005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AC 밀란에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PSV 에인트호벤 소속이었던 박지성은 AC밀란과의 4강 2차전 홈경기에서 불과 전반 9분 만에 순간적인 돌파를 통해 선제골을 기록했고 이것이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박지성 영입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박지성은 2005년 6월 맨유와 계약을 맺고 2005년 7월4일 입단식을 가진 뒤 등번호 13번을 배정받으면서 공식 입단했다.
그리고 2005년 7월23일, 홍콩에서 열린 홍콩 프로 선발팀과의 친선경기로 맨유 입단 후 첫 공식 경기를 가졌고 7월26일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 현대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 골을 넣었다.

입단 당시만 해도 기대의 시선 이면에 후보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시선도 함께 받았던 박지성은 첫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게 됐다.
그러나 계속된 부상이 그의 질주를 가로막았다. 2006년 9월10일 토트넘 홋스퍼FC와의 경기에서 얻은 부상으로 수술을 했고 2007년에도 무릎 부상으로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 3월, 박지성은 풀럼FC와의 원정 경기로 돌아와 폴 스콜스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받아 넣으며 2007-2008시즌 첫 득점을 기록했다. 또 그해 4월6일, 미들즈브러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웨인 루니에게 결정적인 동점골 어시스트를 함으로써 맨유를 패배의 위기에서 구출했다.

특유의 성실함
위기극복 도와


같은 해 4월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다시 선발 출장한 박지성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맨유는 4강에 진출했고 박지성은 아시아선수로는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얻었다.
그리고 준결승전 두 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결승을 이끌었으나 결승전에 출장하지는 못했다. 이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올해 결승전에서 그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의 순간을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 그리고 축구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극복한 박지성. 그의 발끝에 국민들의 시선과 희망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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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