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밀려 떠나는' 강만수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4.02 1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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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킹만수'…정권 바뀌자 삼십육계 '퀵만수'

[일요시사=사회팀] 예상은 했지만 너무 급작스러웠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결국 새 정부 인사 태풍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대표적인 MB맨으로 불리며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는 지난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쓸쓸히 자리에서 내려왔다. 강 회장의 퇴장으로 MB노믹스는 이제 종언을 선언했다.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이 지난 28일 사의를 표명했다. 임기를 1년이나 남긴 상황에서 강 회장은 중도 낙마하며, 김재철 MBC사장과 함께 정권 물갈이의 신호탄이 됐다.

산업은행 민영화 등
손댄 사업마다 실패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 낙하산으로 분류됐던 그는 산은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하며 '산업은행 민영화'의 특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받은 미션은 일단 실패로 끝났다.

우선 박근혜 정부는 민영화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달 있었던 경제정책방향 브리핑에서 "4월 말쯤 발표되는 추경 예산안을 통해 세수 확충이 판가름 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앞선 정부가 2013년 예산안에 산은금융지주 매각 금액인 2조6000억원을 편성한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무리하게 추진됐던 산업은행 민영화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강 회장의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교체대상 영순위로 지목됐던 그는 'MB노믹스'의 영욕을 뒤로 한 채 쓸쓸한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입장에서 MB색채가 강한 강 회장은 함께 가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의 경질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던 것도 청와대의 의중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강 회장은 누구보다 MB와 가까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외부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산 적이 많지만 내부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은 축에 속한다.

강 회장을 아는 기자들은 그가 "공직생활 내내 당당하고 의욕적으로 일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와 대화를 나눠 본 사람들은 "강 회장이 다양한 화제에 맞게 이야기를 끌어갈 줄 알며, 워낙 아이디어가 많아 사업적으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적이 많다"고 회고했다. 강 회장의 '비상한 두뇌'가 의심할 여지 없다는 얘기다.

MB노믹스 뼈대 잡은 설계자…5년간 탄탄대로
소망교회서 이명박 만나 경제 실세로 급부상

경남 합천 출생인 강 회장은 경남고를 수석 졸업한 뒤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1969년 서울대를 졸업한 강 회장은 다음해 행정고시(8회) 재정직에 수석 합격했다. 이른바 엘리트코스를 밟은 것이다.

그의 공직 생활은 세무서에서 시작됐지만 곧 능력을 인정받고 재무부로 거처를 옮겼다. 강 회장은 세제국 사무관으로 근무하며 1977년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실무자로 이름을 올렸다. 늘 많은 프로젝트가 강 회장 앞에 몰릴 정도로 재무 분야에서 강 회장은 전문가로 정평이 났다.


그런 그가 1985년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했다. 주미국 한국대사관 재무관으로 추천된 것이다. 그는 1988년까지 미국에 머물며 국가의 녹을 먹었다.

미국 생활 중에도 강 회장의 엘리트 본능은 빛났다. 친분이 있던 IMF의 테이트 재정국 부국장의 추천서를 받아든 강 회장은 전공인 법학 대신 경제학을 선택해 뉴욕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1987년 다섯 학기(계절학기 포함) 만에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강 회장 앞에는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재무부 보험국장·국제금융국장 등을 거쳤으며, 1994년부터는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의 세제실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1995년 제14대 관세청장에 오른 강 회장은 1996년 통상산업부 차관을 꿰차며, 권력의 핵심에 접근했다. 1997년 재정경제원 차관이 된 강 회장은 2000년대 들어 잠시 공직에서 내려와 한국무역협회 상근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파워 엘리트
MB와 손잡다

지난 2004년 한나라당의 제17대 국회의원 공천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강 회장은 이 무렵부터 정치권과 끈끈한 연을 맺고 비상을 준비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IMF 사태를 직접 실무적으로 경험한 경제통이다. IMF 이후 금융시스템의 초석을 다진 것도 그다. IMF 당시 강 회장은 지원 자금 협상은 물론 금융감독·중앙은행제도 개편 등에 참여해 목소리를 냈다. 이런 강 회장을 일찍부터 눈여겨보던 이는 MB였다.

두 사람은 1981년 소망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 건 2000년이다. 강 회장이 한나라당 미래경쟁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부터다. 당시 위원장은 바로 MB였다. 서로 교감한 둘은 2005년 공적인 자리에서 재회했다. MB가 서울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2005년, 강 회장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원장으로 부른 것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주도한 청계천 복원 사업, 대중교통체제개편 등의 연구는 모두 강 회장의 손을 거쳤다. 이를 통해 강 회장은 MB의 핵심 참모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8년 이명박 정부의 첫 경제 수장으로 강 회장이 선임됐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통합된 기획재정부의 초대 장관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설계된 'MB노믹스'는 분란의 시작이었다.

MB노믹스는 서민경제를 파탄 낸 주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를 주창한 이는 강 회장이었다. 재무부 시절부터 금융시장 자율화와 개방 등을 추진하며 신자유주의 경제노선을 드러낸 강 회장은 정권 초기 고환율 정책을 고집해 수입 물가를 상승시켰다. 이는 서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이 때문에 MB와 강 회장은 '리만브라더스'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러나 강 회장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마이웨이를 걸었다. 이 과정에서 국민 정서와 다소 동떨어진 그의 튀는 어록은 연일 화제가 됐다. 유명한 건 법인세 관련 브리핑이다.


강 회장은 취임 첫 공식브리핑에서 법인세 인하와 관련 '대기업만 이득을 본다'는 지적에 대해 "대기업이 더 세금을 많이 내기 때문에 세금 경감 시 더 많은 혜택을 보는 건 당연하다"고 반박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상속세와 관련해서도 "상속세는 폐지하느냐 마느냐 보다 세율 등을 어떻게 (조정)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해 상속세 인하 가능성을 열었다. 앞선 자리에선 "앞으로 상속세를 두는 나라는 자본도피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 측의 권고를 소개하는 등 'MB노믹스'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종합부동산세 완화도 강 회장의 신념이었다. 그는 '부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각계의 지적에도 "종부세는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조세"라는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혼쭐난 고환율 정책
그래도 '마이웨이'

그는 기본적으로 주위 여론에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정권의 주요 정책 기조였던 '747 경제공약'에 관해서도 "그건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것이지 그걸 구체적으로 달성하리라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답하는 등 허를 찌르는 화법으로 유명했다.

사실 IMF 사태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있는 강 회장이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이 됐다는 것 자체가 이명박 정권의 도덕불감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란 지적이 많았다. 1998년 관가를 떠났던 강 회장의 복귀는 이래저래 불협화음을 양산했다.


2009년 1월 강 회장은 기획재정부 장관에서 퇴임했다. 하지만 강 회장에게는 다른 임무가 주어졌다.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겸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강 회장은 2011년 3월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 행장에 취임했다.

경제 관료 출신이 산업은행 책임자로 선임된 전례가 없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강 회장은 금융 산업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회장에 부임했다. 이를 두고 낙하산 논란이 계속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강 회장이 산은금융지주 회장직에 취임하자 '메가뱅크론'도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과거 기획재정부 장관 시절부터 우리금융과 산은금융, 기업은행의 합병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유출 위험성이 높아 고도의 검증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강 회장은 산은금융지주 민영화와 메가뱅크를 역설하며 경영 전선을 주도했다.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메가뱅크 성사의 한 축인 우리금융지주 인수에 실패한 것이다.

당초 강 회장의 취임을 두고 한국 금융 산업의 새판짜기가 시작될 것이란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메가뱅크는 무산됐고 부임 초반부터 기업은행·우체국·농협·SC제일은행 등의 인수설로 시장 혼란만 가중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종합금융그룹을 세워 금융시장 발전을 주도하겠다는 밑그림이 국민적 공감대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하자 그 책임은 강 회장에게 돌아갔다. 강 회장 개인으로서는 뼈아픈 대목이다.

우리금융지주 입찰 무산은 여러모로 파급력이 컸다. 인수 당사자인 우리금융과 학계로부터 '관치금융의 극치'란 뭇매를 맞은 건 그의 커리어에 큰 오명으로 남았다. 이와 동시에 산은금융지주의 민영화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우리금융 인수가 무산되면서 산은금융지주 민영화도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이 돼 버린 것이다.

낙하산 인사란 꼬리표 때문에 기업 내부 지지도 얻지 못했다. 노조는 강 회장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간부급들은 "힘 있는 회장의 취임으로 속도감 있는 변화를 예상했는데 실망스럽다"며 등을 돌렸다. 좌우로 협공을 받는 형세 속에 강 회장은 힘을 잃었다.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 회장은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서울지점 인수를 추진했다. 이때 당시 협상이 타결됐다는 언론 보도가 쏟아졌다. 그러나 결론은 협상 결렬이었다. HSBC가 내건 직원 고용승계 등의 요구를 산은금융지주는 들어줄 수 없었다. 협상 3개월 만에 산은금융지주는 손을 털고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놓친 강 회장은 이후 해외 출장을 반복하며 활로를 모색했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강 회장이 국내외를 오고가는 동안 이명박 정권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 정부가 출범하자 강 회장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탄력을 받았다. 이에 발맞춰 감사원은 강 회장의 목줄을 죄었다.

 

'박근혜 시대' 쓸쓸히 자리서 내려와
정권 물갈이 신호탄…낙하산들 긴장

지난달 14일 감사원은 '금융공기업 경영실태' 발표를 통해 다이렉트 뱅킹의 치부를 드러냈다. 다이렉트 뱅킹은 강 회장이 사활을 걸고 추진한 대형 사업이다.

강 회장은 취약한 자금 조달 구조 개선을 목표로 이 사업을 추진했는데 이와 관련 산은금융의 2012년 총자산이 전년 대비 20조원이나 증가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강 회장 역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다이렉트 뱅킹'을 치적으로 홍보하는 등 자신감을 내보였다. 지점 유지비용을 고객에게 수익으로 돌려준다는 발상은 일반 국민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감사원은 다이렉트 뱅킹이 역마진으로 손실이 나는 구조란 걸 밝혀냈다. 구체적인 액수까지 집어냈다. 예금자보험료와 지급준비금 등 관리비용을 잘못 산정해 지난해 460억원의 손해를 봤으며, 올해 말까지 예금 손실액이 1094억원, 고금리 예금상품 전체 손실은 1440억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뿐만 아니라 영업이익을 부풀려 임직원의 성과급을 최대 41억원이나 더 지급한 점, 개인금융 부문 확대를 위해 영업점을 늘리면서 59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한 점 등을 문제 삼았다. 금융권 최초의 사내대학으로 알려진 KDB금융대학교 역시 사실상 MB주도의 '일자리 기념관'이란 비아냥을 들으며 감사 대상에 올랐다.

마이다스의 손?
마이너스의 손!

돌이켜보면 강 회장은 계사년 신년사에서 산업은행 민영화나 기업공개(IPO)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민영화 추진과 함께 글로벌 성장기반을 확대하고 강한 KDB그룹문화 형성에 힘을 쏟겠다"고 의욕을 드러낸 지난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강 회장은 최근 "나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동안 (사퇴 의사를) 공공연히 밝히지 못했다"면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주요 금융지주회사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앞두고 강 회장은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누구보다 화려한 경제 엘리트의 길을 걸어온 그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강 회장을 지지했던 한 금융권 관계자는 "처음부터 감사원의 감사가 강 회장을 정조준하고 들어오는데 어쩔 수 있었겠냐"면서 "그래도 강 회장은 눈치 안보고 마지막까지 버틸 줄 알았는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강만수는?

▲1945년 출생
▲1969년 서울대학교 법학과  
▲1985년 주미국대사관 재무관
▲1994년 재정경제원 세제실 실장
▲1995년 제14대 관세청 청장
▲1996년 제3대 통상산업부 차관
▲1997년 제4대 재정경제원 차관
▲2000년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2005년 제9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원장
▲2007년 제17대 인수위 경제1분과위 간사
▲2008년 기획재정부 장관
▲2009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겸 경제특보
▲2011년 산은금융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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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내부 총질 ‘친명 전쟁’ 서막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당내 울려 퍼지던 비명(비 이재명)계 소리가 사라졌다. ‘내부 저격수’가 사라졌으니 이제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 중심으로 똘똘 뭉쳐 국회를 꽉 잡을 것이란 희망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려의 뜻을 내비친다. ‘이재명 독주’ 체제로 완성된 민주당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겠냐는 점에서다. 22대 총선서 압승을 거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큰 폭으로 물갈이에 나섰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주요 자리에 친명(친 이재명)계 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친명 위주의 인선을 단행해 원팀 민주당을 꾸리겠다는 셈이다. 공천 파동을 딛고 살아남은 친명 의원들이 일제히 한 보 전진했다. 피바람 잦아드니… 지난 21일 이 대표는 사무총장에 김윤덕 의원을 임명했다. 김 의원은 이번 총선서 전략공천관리위원회 위원을 지낸 인물로 지난 20대 대선 경선 당시 이재명 후보의 열린캠프서 활동한 바 있다. 조직사무부총장은 황명선 당선인,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전략기획위원장은 민형배 의원 등 친명계가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의 정책을 이끌 민주연구원장에는 이 대표의 ‘정책 멘토’로 알려진 이한주 전 경기연구원장이 선임됐다. 이 원장은 이 대표의 ‘기본소득’을 설계한 인물로 민주당이 제시한 ‘25만원 지원금’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률위원장에는 이 대표의 대장동 변호를 맡은 박균택 당선인이 낙점됐다. 이 밖에도 당 대표 비서실장에는 천준호 의원, 당 대표 정무조정실장에는 김우영 당선인, 교육연수원장에는 김정호 의원, 수석대변인에는 박성준 의원, 대변인에는 한민수·황정아 당선인이 자리했다. 이날 한민수 대변인은 인사 소개를 마친 후 당직 개편에 대해 “4·10 총선의 민심을 반영한 개혁 과제 추진에 있어서 동력을 형성한다는 의미가 있다”며 “신진 인사들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선은 이 대표가 국회에 입성한 후 진행된 두 번째 물갈이다. 2022년 8월 이 대표가 취임 직후 단행한 인선을 두고 ‘친명 일색’이라는 거친 비판이 터져 나왔다. 곧바로 한병도·권칠승·고민정 등 대표적인 친문(친 문재인)계 인사를 등용하면서 논란을 잠재웠지만 이번 총선서 친명이 주류를 이루면서 이들을 당에 대거 투입한 것으로 풀이된다. 22대 국회 문턱을 넘은 친문 세력은 약 스무명 안팎인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민주당 180석을 지탱하던 핵심축이었지만 총선을 거치면서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민주당 공천을 두고 ‘비명횡사 친명횡재’라는 말이 나오자 고민정 최고위원은 위원직을 사퇴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처럼 공천 피바람이 당내를 휩쓸었지만 총선 이후 이 대표를 비판하던 목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었다. 총선 결과 이후 이 대표 체제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 대표를 거칠게 비판하며 당을 떠나거나 새로운 둥지를 꾸린 이들이 줄줄이 낙선하면서다. ‘친명’ 타이틀 달고 꽃밭 안착 둥지 떠난 탈당파 줄줄이 낙선 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는 이 대표와 대립각을 세운 뒤 탈당해 새로운 당을 꾸렸다. 이번 총선서 광주 광산을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민주당 민형배 당선인에게 62.25%p로 크게 밀려 패배했다. 이 공동대표가 야심 차게 창당한 새로운미래는 지역구 한 석에 그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개혁신당과 손을 잡은 이원욱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지역구서 낙선했다. 탈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적한 ‘5선 중진’ 이상민 의원과 김영주 의원(국회 부의장)도 고배를 마셨다. 홍영표·설훈 등 다른 비명계 의원 역시 줄줄이 낙선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당을 떠나면 춥다는 걸 몸소 보여줬다”며 “소위 비명계로 분류됐던 이들이 모두 당을 떠났으니 당내 파열음이 나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부분 여의도를 떠나게 됐으니 당분간 ‘내부 저격수’로 불리는 이들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명 체제에 화룡점정을 찍을 원내대표 선출 결과에도 눈길이 쏠린다. 내달 3일, 선출을 앞둔 차기 원내대표 선거가 사실상 친명인 박찬대 의원의 독무대인 만큼 ‘친명일색 민주당’이 완성될 것이란 해석이 우세하다. 박 의원은 지난 21일, 일찌감치 출마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명 대표와 강력한 투톱 체제로 개혁 국회, 민생 국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박 의원이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자천타천으로 물망에 오른 의원들은 속속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영교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원내대표 출마 선언을 위한 기자회견을 예고했지만 돌연 취소했다. 당 대표 ‘원픽’ 이와 관련해 서 최고위원은 “(박찬대 의원 포함)2명 다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면 제가 원내대표에 당선돼도 최고위원 두 자리가 비게 된다”며 “총선에 압도적으로 이긴 이 대표 체제에 문제가 된다는 게 처음부터 고민이었는데 사전에 조율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선 김민석 의원도 “당원 주권의 화두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며 불출마를 시사했다. 인재위원회 간사였던 3선 김성환 의원과 원내수석부대표인 박주민 의원 역시 불출마 입장을 표했다. 민형배·진성준 의원도 하마평에 올랐지만 각각 전략기획위원장, 정책위의장에 임명되면서 자연스레 출마가 불발됐다. 이로써 원내대표 출마 후보군은 박 의원 한 명으로 압축됐다. 친명계 핵심인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초 10명 안팎의 후보군이 난립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물밑서 이 대표가 교통정리에 나섰다는 해석이다. 당 대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당을 좌우하는 명심에 대항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친문 인사가 끼어들 틈도 없이 빠르게 상황이 흘러갔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민주당 원내대표 겸 의장단 선출 선거관리위원회 간사인 황희 의원은 지난 24일, 선거관리위원회 1차 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당규상 민주당서 원내대표 선거는 결선투표가 원칙으로 기본적으로 과반 득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후보자가 1인일 경우 찬반 투표를 하기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원내대표 다음으로 주목받는 자리는 바로 차기 국회의장이다. 당내 우직한 이력을 가진 후보들이 기싸움이 이어가면서 명심이 누군의 손을 들어줄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민주당에서는 6선에 성공한 조정식·추미애 당선인과 5선인 정성호·우원식 의원이 22대 전반기 국회의장 출마를 밝혔다. 이들은 일제히 “기계적 중립은 없다”는 입장을 강조하며 강경 성향 의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완벽한 시나리오 먼저 정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기계적 중립만 지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민주당 출신으로서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해 보이지 않게(그 토대를) 깔아줘야 된다”고 말했다.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서 다수당의 주장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정 의원은 이 대표의 사법연수원 18기 동기로 알려졌다.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만큼 ‘원조 친명’이자 ‘친명계 좌장’으로 통한다. 이 대표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7인회’ 핵심 멤버기도 하다. 친명 후발주자인 추 당선인도 국회의장 도전에 대해 “주저하지 않겠다”며 “국회의장도 물론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립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유보된 언론개혁, 검찰개혁을 해내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히면서 강성 지지자의 호응을 유도했다. 민주당 조 전 사무총장도 “여야 합의가 될 때까지 무한정 기다릴 수 없다”며 “국회의장이 되면 긴급 현안에 대해서는 의장 직권으로 본회의를 열어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과반석을 차지한 만큼 당내 경쟁도 치열해진 양상을 띠고 있다. 국회의장 경선에 당원투표를 반영하자는 주장까지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강성 지지층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만큼 후보들은 당심을 겨냥하기 위해 명심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이재명과의 호흡’을 강조하고 나선 만큼 이 대표의 의중인 ‘명심’은 당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를 앞세운 메시지가 앞다퉈 나오면서 입법 독주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도 커질 전망이다. 국민의힘은 “너도나도 ‘명심팔이’를 하며 이 대표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하니 국회의장은커녕, 기본적인 공직자의 자질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라며 “협치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한다는 망언을 빙자한 민주당의 속내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상임위를 독식하겠다는 위헌적 발상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솔솔 올라오는 ‘대표 연임설’ 대세는 ‘명심’…친문계 주목 총선 승리 이후 일부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 “협치는 없다”는 기류가 흐르자 이를 꼬집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당내 주요직이 속속들이 친명으로 배치되는 가운데 친문에게 더 이상 핵심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여기에 이 대표의 연임설까지 불거지면서 ‘이재명호’ 민주당은 한층 견고해질 전망이다. 이 대표 임기는 오는 8월28일까지다. 이제까지 민주당서 당 대표가 연임한 역사는 없지만 당헌·당규상 이를 금지한 조항도 없다. 이 대표가 마음만 먹는다면 몇 번이고 당 대표를 연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대표는 20대 대선 패배 직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전당대회에 연이어 출마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총선 승리 직후부터 친명 의원 중심으로 “민주당에 압승을 가져다준 이 대표가 한번 더 당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면서 친·비명 간의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정성호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국회가 본연의 역할을 하고 민주당이 윤석열정권의 무능과 폭주하는 이 상황을 막아야 된다는 측면서 당 대표가 강한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며 “그런 면에서 연임할 필요성도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총선이 끝나고 이 대표를 만나 “강한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도 덧붙였다. 해남·진도·완도에 승기를 꽂은 박지원 당선인 역시 “만약 이 대표가 계속 대표를 한다고 하면 당연히 해야 한다. 연임해야 맞다”며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이 이 대표를 신임했다”고 전폭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반면 친문계 핵심으로 꼽히는 윤건영 의원은 이 대표 연임에 대해 “전당대회가 넉 달이나 남은 상황서 민주당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슈”라며 “지금은 총선서 나타난 민의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어 “당의 리더십에 관한 것은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의도 정가에 밝은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친명 체제를 두고 외부서 걱정하는 모양이지만 정작 당내에서는 후폭풍이 불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비명 의원끼리 바람을 일으키려고 해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폭풍 전야 잔잔한 미풍 일제히 이 대표의 의중만 바라보는 민주당은 친명과 찐명 그리고 ‘신명(새로운 친명)’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상황서 “당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겠냐”는 비판이 물밑으로 조용히 들려온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애초에 이 대표의 목적은 자신만의 민주당을 만드는 거였고 이번 총선을 통해 결국 이뤄냈다”며 “친명 민주당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국 이 대표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대표는 임기를 마치는 날까지 자신의 영향력 밑에 당을 두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속 타는 조국혁신당 교섭단체 구성에 난항을 겪는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앞서 조국당 조국 대표는 여러 차례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범야권 연석회의’를 제안했지만 이 대표는 만찬 회동으로 갈무리하는 데 그쳤다. 민주당 내에서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려는 조 대표가 부담스럽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캐스팅보트 역할을 쥔 것 또한 조국당인 만큼 22대 국회 개원 이후 민주당과 협상 테이블에 앉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