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현대판 청백리' 김능환 전 중앙선관위원장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3.11 15: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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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명예 버리고 떠난 아름다운 뒷모습

[일요시사=경제1팀] 동네 편의점에서 만난 아저씨가 대법관이라면?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다. 얼마 전 퇴임한 김능환 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아내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퇴임 시 공언했던 대로 소시민의 삶으로 돌아간 것. 이런 신선한 행보에 정치권과 누리꾼들은 일제히 찬사를 보내고 있다.




대법관을 지낸 김능환 제17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퇴임 후 일상이 화제가 되고 있다. 퇴임 첫날인 지난 6일 부인이 운영하는 편의점에서 일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전 위원장은 이날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서울 상도동 한 아파트 상가 1층에 위치한 편의점 계산대에서 손님들의 물건 값을 계산했다. 짙은 청색의 등산 점퍼와 펑퍼짐한 갈색 바지, 연보라색 목도리 등 영락없이 '동네 편의점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공짜 사탕'건네고
물건값 깎아주기도

김 전 위원장은 할머니와 함께 껌을 사러 온 꼬마에게 '공짜 사탕'을 건네고 막걸리를 계산하는 노인에게는 돈을 깎아주기도 했다. 취재차 편의점을 방문한 기자들이 구입한 음료수를 자신의 신용카드로 계산하기도 했다. 편의점을 방문한 손님들은 김 전 위원장을 편하게 대했다. 손님이 없을 땐 도올 김용옥 선생의 책을 읽는다.

김 전 위원장이 편의점 일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4월 부인이 편의점을 차린 뒤 그는 주말에 시간을 내 편의점 업무를 틈틈이 배워왔다.

부인 김문경씨도 김 전 위원장과 함께 물건을 진열하고 창고 정리를 했다. 김 전 위원장이 지난해 7월 대법관을 퇴임하자 김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편의 퇴직금으로 편의점과 채소 가게를 냈다. 채소가게는 편의점 바로 옆에 붙어 있는데, 겨울이라 채소 가게는 운영하지 않고 있다. 채소가게 이름은 김 전 위원장의 아이디어로 부인의 영문이름 이니셜을 따 'K·M·K 야채 가게'로 지었다. 채소가게는 이달 말 쯤 다시 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 5일 과천 중앙선관위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여러분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서 있다"며 "그동안 선관위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거나 발전한 게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이 노력한 결과일 것"이라고 말했다. 선관위의 공을 직원들에게 돌린 것이다.

또한 그는 선관위를 떠나면서까지 앞으로의 선관위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김 전 위원장은 선관위에 ▲선거관리와 관련하여 조사권을 보다 더 엄정하게 행사할 것 ▲모든 선거절차에 유권자의 참여를 확대하여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관리가 이뤄지도록 할 것 ▲정치관계법률과 제도를 합리적으로 개선할 것 ▲유권자의 선거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투표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등을 당부했다.

퇴임 첫날부터 평범한 소시민 일상 화제
부인 편의점서 일…영락없는 동네 아저씨

앞으로 거취에 대해서는 "당분간 공직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며 "아내의 가게를 도우며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은 김 전 위원장이 부인이 운영하는 한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해 신선한 충격이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영일 부대변인은 "김 전 위원장의 모습에서 참다운 공직자의 모습을 본다"고 밝혔다. 허 부대변인은 "박근혜 정부의 많은 장관 후보자들이 '전관예우'로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신선한 충격"이라며 "함량 미달의 장관 후보자들 속에서 군계일학 같은 김 전 위원장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1951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김 전 위원장은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17회에 합격, 육군 법무관을 시작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80년 전주지법 판사와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서울가정법원, 서울지방법원 부장 판사를 거쳤다. 2006년에는 법관 최고 영예인 대법관으로 임명, 2011년 2월부터는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재직했다.

취임 이후 지난해 19대 총선과 18대 대선 등 가장 중요한 선거를 무난하게 치러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지난 대선 정국에서는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서운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중립 입장을 유지해 주목을 받았다.


"가장 뛰어난 법관"
노 전 대통령 극찬

지난해 4월 19대 총선에서는 친박계 현기환 전 의원에게 공천헌금 3억원을 전달한 혐의로 새누리당 비례대표 현영희 의원을 지난해 8월 검찰에 고발했으며 9월에는 총선에서 불법 정치자금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홍사덕 전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대선을 불과 6일 앞둔 12월13일에는 당시 박근혜 후보의 불법 선거운동 사무실로 의심되는 서울 여의도 오피스텔을 급습하기도 했다.

김 전 위원장은 대선이 끝난 지난 1월 사의를 표했으나 후임 선관위원장이 정해질 때까지 자리를 지켜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김 전 위원장은 '청백리'로 유명하다. 위원장 재직시절 김 전 위원장은 곧잘 '선비'에 비유되곤 했다. 항상 "아래 직원과 똑같이 하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위원장실에 난방이 켜져 있으면 "직원들은 추위에 고생하는데 나만 특별대우 하지 말라"며 난방을 끄게 했고 직원들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는 "내가 다 뜻이 있다"며 개인 카드로 결제했다.

매달 직위보전비로 받은 400여만원은 모아 직원들 격려금에 쓰곤 했다. 명절이나 큰 선거를 치른 뒤 회식비로 쓰게 하거나 어버이날,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 격려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인 김 전 위원장은 2006년 대법관 청문회 때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동네에 책방 하나 내고 이웃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면서 살고 싶다"고 밝혔었다.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위원장은 '가장 뛰어난 법관'이라고 극찬한바 있다.

"고위직 출신이 이럴 수가…"
정치권·누리꾼 일제히 찬사

2011년 10월 재·보선 때는 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 후 선관위 직원이 직무유기죄로 기소되자 김 전 위원장이 변호사 선임비용 800만원을 사비로 지원한 사실이 뒤늦게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그는 "직무유기죄로 기소됐는데 국가 예산으로 변호사 선임 비용을 대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못하게 해 직원들 사이에서 "너무 가혹하다"는 얘기가 돌았지만 알고보니 김 전 위장이 몰래 변호사비를 지원했던 것이다. 총무부서를 통해 돈을 전달하면서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전 위원장의 재산은 지난해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대법관 중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꼴찌는 이번에 신임 중앙선관위원장으로 임명된 이인복 대법관(4억9760만원)이다. 김 전 위원장의 재산은 9억5617만원으로 송파구의 30평형대 아파트 한 채와 전세권 하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퇴임식에서는 자신의 쏘나타 승용차를 직접 몰고 선관위 청사를 떠나기도 했다. 임직원들에게는 "세금을 들여 공로패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선관위 관계자에 따르면 김 전 위원장은 선관위 직원들이 공로패를 만들어 전달하려 하자 "선관위 예산에서 비용을 대는 것 아니냐"며 "국민 세금으로 왜 그런 일을 하느냐"며 만들지 못하게 했다.

김 전 위원장은 박근혜 정부의 초대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전 위원장은 "대법관 출신이 행정부의 다른 공직을 맡는 게 적절치 않다"며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선관위 공보실을 통해 "중앙선관위는 헌법기관 중의 하나로 모든 공직선거를 관리하는 자리이자 현직 대통령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늘 감시해야 하는 자리"라며 "어떻게 그런 자리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의 지휘를 받아 행정부를 관할하는 총리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느냐"고 밝혔다.

후배 법관들이 꼽은
'법조계의 모범인'


김 전 위원장은 대법원 선임·수석 재판연구관 등을 두루 거치며 민·형사, 조세, 행정 등에 대해 전문적 법률지식을 갖췄고 함께 근무한 후배법관들이 본받고 싶은 '법관의 모범'으로 꼽는다.

1982년 고교 교사 9명이 좌경의식화 교육을 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된 '오송회' 사건에서 6명에게 선교유예, 3명에게 징역 1∼4년의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등 국가보안법 적용에 관대한 시각을 보였다.

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 김현장씨가 "보호관찰처분 연장을 취소해 달라"며 법무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재범 위험성이 없다"며 원고승소 판결했다.

2001년 국가가 노태우 전 대통령 동생 재우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는 "재우씨가 형에게서 받은 돈으로 구입한 아파트 등을 국가에 내놓겠다고 검찰에 약속하고도 나중에 시효가 지났다며 거부한 것은 신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120억원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같은 해 반국가단체 구성 등 혐의로 기소된 이른바 '영남위원회' 사건과 관련해 8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재직할 때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낸 특별사면 정치인들에 대한 사면심의자료 공개청구소송 파기환송심에서 대통령의 사면권이 정치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국민의 비판 대상이 돼야 한다며 정보공개판결을 내렸다.


연구실적 부진을 이유로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던 서울대 미대 조교수 김민수씨가 낸 교수 재임용 거부처분 취소소송 파기환송심에서는 "연구실적 심사는 주관이 반영돼 결론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 실적 2편이 동시에 기준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사위 의결에 따라 재임용하지 않은 학교 측 처분은 현저히 타당성을 잃었다"며 "2편이 기준을 통과할 때까지 실적을 제출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김씨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2005년에는 미국에서 태어나 이중 국적을 갖게 된 손모씨가 '병역의무가 생겼다고 해서 국적 포기를 제한한 것은 부당하다'며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낸 항소심에서 "이중국적 병역 의무자가 만 18세가 되기 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병역 의무를 지게 됐다면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국적을 포기할 수 없다"며 이중 국적 병역 의무자의 국적포기 제한조치는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공직 생각 없다"했는데
정부·정계 러브콜 잇따를 듯

울산지법원장 재직 시절에는 법원 내 연구모임인 '민사집행법연구회' 회장을 지내며 법관과 법원직원들의 대표적 실무지침서인 <법원실무제요 강제집행편>과 <주석 민사소송법> <민사집행법> 등을 공동 집필했다.

병역문제에서도 깨끗하다. 김 전 위원장 본인은 법무관으로 만기전역했고 2남 가운데 큰아들도 공군 사병으로 전역했다.

33년간의 공직생활을 뒤로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한 김 전 위원장의 모습을 접한 국민들은 "퇴임 후 행보가 아름답다" "퇴임공직자의 모범이 될 만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등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자연스레 행정안전부에서 추진 중인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를 공개하는 방안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행안부는 또 그간 윤리위원회의 취업심사 대상에서 제외했던 변호사·회계사 등 자격증을 소지한 공직자들도 심사 대상에 포함시키기로 하고 관련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이는 최근 박근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청문회 과정에서 전관예우 관행이 논란이 되는 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이를 줄이기 위해 마련된 조치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4급 이상 국가·지방직 공무원은 퇴직 후 2년 동안은 퇴직 전 5년간 몸담았던 부서의 업무와 관련이 있는 민간기업에 취업할 경우,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행안부가 마련한 개정안은 심사결과를 공개하고 같은 퇴직공직자라도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세무사 등 자격증을 가졌을 경우에는 심사 대상이 아닌 현행 예외 조항을 없애자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은 현재 전순옥 민주통합당 의원 등 11명 등이 발의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돼 있다. 행안부는 유정복 신임장관이 임명되는 즉시 태스크포스를 꾸려 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대형 로펌 거부
"당당한 퇴임길"

김 전 위원장은 지금이라도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1억대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대형 로펌이나 컨설팅 회사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고위 법관이든 관료든 공직을 떠나기가 무섭게 돈과 명예를 찾아가는 요즘, 김 전 위원장 만큼은 지금의 소박한 삶처럼 조금은 다른 길을 가주기를 바랄 뿐이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김능환은?>

▲충북 진천 출생
▲경기고-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제17회 사법시험 합격
▲전주지방법원 판사
▲서울고등법원 판사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울산지방법원 법원장
▲대법원 대법관
▲제17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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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