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특집] '파란만장' 박근혜 60년 인생사 탐구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2.12.26 11: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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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여왕으로…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가요

[일요시사=경제1팀] '공주'가 '여왕'이 됐다. 33년 만에 '궁궐'로 돌아간다. 대통령의 딸도, 퍼스트레이디도 아닌 대한민국 최초 여성대통령 자격이다. 대통령의 맏딸이자 5선 국회의원으로 마침내 대권을 향한 꿈을 이룬 박근혜 당선인. 우리 현대사만큼이나 굴곡진 그녀의 60년 인생을 <일요시사>가 집중 조명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2월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재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당시 육군본부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과 중학교 교사 출신 육영수씨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나 2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9살이 되던 해인 1961년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2년 뒤인 1963년 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큰 영애'로 불리며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박 당선인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퍼스트레이디

박 당선인은 이 시기부터 각종 외교행사에 참석했다. 1966년 존슨 미국대통령의 방한 당시 '한국의 밤' 행사에 등장했고 1968년 9월에는 대통령 부부의 호주 방문에 동행했다. 1969년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당시 세계 최대의 유조선인 '유니버스 코리아호'의 진수식에서 샴페인을 떠드리기도 했다.

성심여중에 입학한 박 당선인은 성심여고까지 재학하는 동안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1974년 서강대 이공학부(전자공학 전공)를 4년 평균 학점 4점 만점에 3.82로 수석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그해 8월15일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한 박 당선인은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뒤 일주일도 안 돼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했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 박 당선인의 첫 일정이었다. 박 당선인은 당시 일기에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적었다. 그녀의 나이 22세의 일이었다.

1974년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은 박 당선인은 새마을운동 정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가자는 의미의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영세한 기업과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 1979년 주한미군 철수를 두고 미묘한 시점에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주한미군철수 계획이 취소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비극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머니를 잃은 지 5년 뒤 10·26 사태로 아버지를 흉탄에 잃었다. 삽교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한다고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에 비보를 전해들은 박 당선자가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전방은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요람에서 당선까지' 박근혜 당선인의 발자취
부친 서거 소식에도 "전방 이상 없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권력의 대이동이 시작되자 박 당선인은 지만, 근영 두 어린 동생과 함께 1980년 18년간 머물렀던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옮겼고, 이어 성북동 자택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신기수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았다. 박 당선인은 2년 뒤 성북동 집을 팔아 장충동에 집을 샀고, 1990년 다시 그 집을 팔고 현재 삼성동 자택으로 이사했다.

이후 18년 동안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1994년 인수한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1980년 영남대 이사장직과 함께 육영수 여사가 남긴 육영재단 이사장직도 맡았다. 일기와 독서, 시 작성, 단전호흡, 불교경전 읽기 등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며 '훗날'을 준비했다. 1990년 아버지 일대기를 다룬 책 <겨레의 지도자>를 출간했고,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하며 아버지 명예 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박 당선인이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은 1997년 발생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서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혼자 편하게 살면 훗날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라고 회고했다. 마침내 1997년 12월10일,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지지 선언을 통해 '정치인 박근혜'로서 정치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박 당선인은 2000년에는 선출직 부총재 경선에 참여해 최병렬 후보에 이어 2위에 올라 부총재로 당선됐다.


'천막당사' 배수진
'선거의 여왕' 애칭

2001년 이회창 총재가 당 개혁안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2002년 5월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에는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보내준 특별기를 타고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박3일 머무는 동안 김 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한 적도 있다. 들어올 때는 김 위원장의 배려로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

2002년 11월 16대 대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나라당과 합당한 박 당선인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과 '차떼기 사건' 등으로 당이 위기에 처하자 2004년 3월 당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로 배수진을 쳤다. 당 대표 첫날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했고 조계사에서 108배를 한 데 이어 영락교회에서 반성의 기도를 올렸다. 과거를 반성하고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17대 총선에서 5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완승을 이끌어내 '선거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박 당선인이 당 대표로 있던 2년3개월간 한나라당은 4번의 재보궐선거를 모두 승리했다. 2006년 5월20일 박 당선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서울 신촌로터리 지방선거 유세 도중 오른쪽 뺨이 면도칼에 의해 11cm나 찢기는 테러를 당했다. 의사들은 5mm만 더 찔렸더라도 경동맥을 스치며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했다. 큰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간 박 당선인은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어 지지층을 단결, 호남을 제외한 전 지역 광역단체장 석권을 만들어냈다.

이후 2007년 유력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던 박 당선인은 2006년 6월16일 대표직을 사퇴하고 대선 경쟁에 돌입, 서울시장으로서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다. 박 당선인은 일반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경선에서 모두 승리했지만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져 이 후보에게 패했다. 박 당선인은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 이 후보를 지원해 '아름다운 패배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여러 차례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친이' '친박'계 간 갈등이 본격화 된 것. 18대 총선 때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며 친이계와 정면 대립했고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맞서 본회의장에서 직접 연설을 하며 원안을 고수했다.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해 친박계 60여 명의 복당이 관철되기도 했다.

18년간의 '공주' 생활과 18년간의 '칩거' 생활
1997년 정치권 등장, 2012년 대통령 당선

박 당선인은 2011년 말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보선 패배,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한나라당이 휘청거리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중도적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영입하며 쇄신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새누리당은 선거전 초반 부정적 여론을 극복하고 4·11 총선에서 152석으로 1당을 차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 당선인은 지난 7월10일 "국민 한분 한분의 꿈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18대 대선에 출마했다. 8월20일 김문수 경기지사, 안상수 전 인천시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김태호 의원 등과 벌인 당내 경선에서 84%라는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차지하며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박 당선인은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대통령 후보에게 우위를 지키며 대선 레이스를 달려왔다. 중간 중간 과거사 논란·정수장학회 문제·경제민주화 갈등 등의 악재가 돌출됐지만 지지율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고비라 평가되던 문재인·안철수 간 단일화도 박 당선인의 벽을 넘지 못했다.

박 당선인은 마침내 지난 19일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 첫 과반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세우며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박 당선인은 1577만3128표를 얻어 문재인 후보(1469만2632표)를 3.6%p(108만496표) 차이로 눌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부녀가 처음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기록도 세우게 됐다.

신뢰의 정치로
대선 승리


박 당선인은 지난 20일 오전 국립현충원 참배를 시작으로 내년 2월25일 공식 취임 전까지 정권 인수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박 당선인은 지난 주말 인수위원회 구상을 마친 뒤 이번 주께 인수위원장과 위원 인선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약 두달 여간 정권 인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게 될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은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으로 결정됐다. 내년 1월 중순까지는 국무총리 후보자를 먼저 지명한 뒤 상의를 거쳐 1월 말쯤에는 각부 장관 후보들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박 당선인의 대통령 임기는 2018년 2월24일까지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박근혜 당선인 프로필>

출생 1952년 2월2일
본적 경상북도 구미시 상모동 171
출생지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5-2
혈액형 B형
신장 162cm
특기 피아노연주
취미 산책, 문화유산답사
좌우명 바르고 현명하게 살자

학력
1970년 성심여고 졸업
1974년 서강대 전기공학과 졸업
1987년 대만 중국문화대 명예 문학박사
2001년 대만 중국문화대 대학원 최고산업전략과정 수료
2008년 한국과학기술원 명예 이학박사
2008년 부경대 명예 정치학박사
2010년 서강대 명예 정치학박사


경력
1974~1979년 퍼스트레이디 대리
1974년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이사장(현)
1993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현)
1994~2005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1994년 한국문인협회 회원(현)
1997년 한나라당 고문
1998년 제15대 국회의원
1998~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0~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운영위원, 한나라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공동의장
2003년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2004년 제 17대 국회의원
2007년 한나라당 제17대 대통령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2011~2012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새누리당)
2012년 12월19일 제18대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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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