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코리안 특급’ 박찬호 야구인생 19년 희로애락

'IMF 시련' 국민에 희망을 던졌다

[일요시사=연예팀]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전격 은퇴를 선언하며 프로인생을 마감했다. 1994년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LA다저스에 진출해 아시아 선수로는 최다승인 124승을 기록한 박찬호. 이제 마운드 위에서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IMF 금융위기 때 희망을 던진 박찬호의 불같은 강속구는 국민의 뇌리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야구영웅 박찬호가 마운드를 떠난다. 단지 소속팀을 이전한다는 게 아니다. 현역을 은퇴하며 19년 프로선수의 화려한 삶을 마감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29일 한화 구단은 “박찬호가 금일 오후 본인의 은퇴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고, 구단은 박찬호의 은퇴 결정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레전드’ 박찬호는 정든 마운드를 떠나게 됐다.

국민영웅 등극

박찬호는 한국야구의 선구자나 다름없다. 충청도 공주 출생인 그는 공주중동초-공주중-공주고를 거쳐 한양대에 입학했다. 학창시절부터 빠른 강속구를 던지며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던 박찬호는 한양대에 진학한 후 최고 구속 156km를 찍는 등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주고 3학년 시절인 지난 1991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를 통해 처음 다저스스타디움에 발을 디뎠다. 이후 1993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1승2세이브 평균자책점 1.10으로 활약해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후 대학교 2학년이었던 지난 1994년, 박찬호는 LA 다저스와 120만달러의 금액을 받고 성공적인 계약을 이끌며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게다가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17번째 선수라는 타이틀도 얻게 됐다.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의 벽은 높았다. 단 2경기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된 것. 그는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칼을 갈며 재기할 생각만 다졌다. 1996년이 되던 해, 2년 간 다잡았던 노력과 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중간계투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5승(5패)을 거둔 박찬호는 마침내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는데 성공했다. 이듬해부터는 믿고 쓰는 선발투수로 발돋움하며 승승장구했다.

이어 그는 1997년 14승(8패), 1998년 15승(9패), 1999년 13승(11패), 2000년 18승(10패), 2001년 15승(11패)으로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따내며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는 특급 선발투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IMF라는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박찬호의 빛나는 활약이 국민에게는 실낱같은 희망과도 같았다. 즉 박찬호는 국민 영웅으로 우뚝 올라선 것이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그는 이윽고 슈퍼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와 계약했고, 시즌 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최대 6500만달러라는 초대형 FA 계약을 터뜨리며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기대를 한몸에 받고 간 텍사스에서 박찬호는 첫 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2002년 9승(8패)으로 기대에 한참 못 미친 성적을 보여준 그는 허리와 햄스트링 부상을 차례로 당하며 2003년 1승(3패), 2004년 4승(7패)에 머물렀다. 박찬호를 향한 텍사스 주 지역여론은 차갑게 식었고 팬들의 비난이 들끓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긴 시련 끝에 부상에서 회복된 그는 2005년 텍사스에서 8승을 거두며 개인 통산 100승을 채우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는 고액 연봉에 비해 한참 못 미친 성적으로 ‘먹튀’라는 오명을 떠안게 됐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트레이드 돼버리고 말았다.

숱한 좌절과 고비에도 박찬호는 같은 해 2005년, 12승(8패)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 2006년에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7승(7패)을 거뒀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일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장출혈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강악화에 박찬호의 재기는 기약할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박찬호는 생애 첫 포스트시즌을 위해 불굴의 의지를 보이며 빠르게 회복을 찾아갔고, 데뷔 후 처음으로 가을잔치 무대를 밟는 영광을 누렸다.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거…아시아 선수 최다승
‘굿바이 마운드’ 한화 유니폼 입고 전격 은퇴


축제도 잠시 그에게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7년 뉴욕 메츠와 계약한 박찬호는 단 1경기 출전이라는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이어 불안한 성적 때문에 시즌 중 방출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방출된 뒤 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했다. 그런데 이는 메이저 계약이 아닌 마이너 계약이었다. 또 다시 마이너리그로 추락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해 박찬호는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마이너리그에서 보냈다. 모두가 “포기하라”며 고개를 저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친정팀 LA다저스로 돌아온 박찬호는 선발투수가 아닌 불펜투수로 4승(4패)을 거두며 보란 듯이 부활했고, 2009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옮겨 3승(3패)으로 불펜의 한축을 맡으며 생애 첫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밟았다. 이듬해 2010년 박찬호는 우승반지 하나만 노리고 뉴욕 양키스로 이적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해 시즌 중 웨이버 공시됐고,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로 옮겼다. 시즌 성적은 4승(3패) 평균자책점 5.12로 다소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지난 1994년 처음으로 발을 디딘 후 17년간 9개의 팀을 옮겨 다닌 박찬호는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 476경기 124승98패, 평균자책점 4.36, 탈삼진 1715개로 통산 승수는 아시아 출신 선수로는 최다승이며 1993이닝으로 최다 투구이닝을 달성했다.

오랜 시간 동안 야구인생을 엮어나갔던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한 뒤 그는 일본프로야구 오릭스에서 7경기 중 1승5패, 평균자책점 4.29를 기록했다. 그리 훌륭한 성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는 1년 동안 일본에서 메이저리그와는 다른 야구를 배웠다.

18년간의 해외 선수 생활을 뒤로 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오랜 꿈이었던 고향 팀 한화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다. 명성에 걸맞게 연봉을 백지위임하며 최소 연봉 2400만원, 옵션 6억원 전액을 야구발전 기금으로 쾌척하는 위엄을 보였다.

개막 후 7경기 연속 선발등판한 날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티켓파워’를 대대적으로 과시한 박찬호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펼치며 국가대표 에이스 류현진과 함께 원투펀치를 이뤘다.

‘먹튀’ 오명도

베테랑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국내 야구팬들은 살아있는 레전드 박찬호가 투구를 던질 때마다 환호를 내지르며 열광했다. 그러나 허리와 팔꿈치 통증이 도진 후반기에 그는 타 팀 타자들로부터 난타 당하기 일쑤였고, 체력도 예전만큼 받쳐주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프로인생 1년 동안 23경기 5승10패 평균자책점 5.06의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 마감 후 박찬호는 오랜 고민 끝에 은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며 20여 년에 이르는 프로선수로서의 삶을 내려놓았다.

이제 프로야구선수 박찬호는 없다. 그러나 그가 몸소 보여준 야구 열정과 힘들 때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해준 불꽃같은 희망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김지선 기자 <jisun86@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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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