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간의 대치국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마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연상케 한다. 지난달 25일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이 22개 미디어법안을 직권 상정한 것을 둘러싸고 국회 문방위 회의장 안팎에서 ‘난투극’을 벌였던 것. 급기야 여야는 각종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한 대치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0일간 논의 후 표결처리하겠다는 합의안이 도출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충돌사태가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이다. 2004년 발생했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과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국회 사무처가 ‘차명진 폭행사건’에 대한 수사를 검찰에 의뢰하는 등 폭력사태에 따른 강경대처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어 여야간 갈등의 골은 더더욱 깊어질 분위기다. 전쟁터를 방불케 한 ‘여의도 잔혹사’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봤다.
여야간의 입법전쟁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지난 1차 입법전쟁에서는 해머, 전기톱, 물대포까지 동원된 데 이어 2차 입법전쟁에서는 한나라당과 민노당 인사들간의 몸싸움이 전개됐다. 게다가 민주당 보좌진들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 퍼붓거나 본청에 난입하는 등 국회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이 과정에서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은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고, 각 당 관계자들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 등 인적 피해도 적잖았다. 국회 사무처는 지난 2일 민주당 소속 당직자 5~6명이 차 의원을 집단 폭행한 사건에 대해 서울지방검찰청 남부지청에 수사를 의뢰해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차 의원 폭행사건에 대한 국회사무처의 일방적인 수사의뢰에 반발하며 지난 1일 서갑원 민주당 의원을 밀어 넘어뜨린 조원진 한나라당 의원을 고발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민심 눈치보는 여야
‘역풍 불면 안되는데’
폭력 사태가 검찰 고발로 비화되면서 여야간 앙금의 골은 더더욱 깊어지고 있다. 여기에 각종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간의 합의가 이뤄졌지만, 한나라당이 금산분리 완화 등을 단독 처리했고, 야당은 반대토론을 통해 ‘시간끌기 전략’을 고수해 쟁점법안 일부를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 이로 인해 2월 임시 국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한 법안에 대해 3월 국회를 통해 통과시키자는 의견이 여당 내부에서 나오면서 여의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과거 국회에서도 법안 처리를 놓고 극한 대치와 폭력사태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사례가 적잖기 때문이다.
1958년 12월24일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당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기 위해 무술경위를 동원, 언론제한 법안을 단독 처리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른바 ‘신국가보안법’은 여당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결국 여론이 급격히 악화됐고, 1960년 4·19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1996년 12월26일 새벽,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단독 처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노동법 날치기 사태’로 불리는 이때 여당은 노동계의 총파업 등 국민적 반발을 일으켜, 김영삼 정권이 레임덕에 빠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결국 1997년 노동법이 재개정되는 아픔을 맛봐야 했던 것.
DJ정부 시절에도 ‘여의도 잔혹사’는 계속됐다. 1999년 1월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한일어업협정 비준동의안 등 130여건의 안건을 단독 처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여야간의 갈등은 한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노무현정부는 다른 어느 정부보다 여야간의 대립이 심해, 끊임없는 전쟁이 비일비재했다. 마치 여의도가 전쟁터로 돌변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2004년 3월12일 박관용 국회의장이 경호권을 발동, ‘노무현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던 것이 대표적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육탄방어에 나섰지만, 한나라당-민주당의 수적 우세에 밀려 이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본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러나 촛불집회 등 여론의 반발이 극심해지면서 4·15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에 원내1당 자리를 내주는 아픔을 겪기도 했던 것. 이 외에도 2004년 국가보안법 폐지안 재상정, 2008년 ‘BBK 특별검사법안’ 등으로 인해 폭력 국회라는 오명은 계속적으로 따라붙었다.
지금도 여야는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강경한 각오로 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심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 배경에는 과거 역풍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인식이 정치권 내부에서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이 때문일까. 여당 내에서는 강경론 속에 신중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민주당의 전략에 속수무책 당했지만, 수적 우위로 밀어붙인다면 국민적 저항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친이계 한 의원은 “내부 비판이 있긴 하지만 당 지도부가 최악의 상황은 피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인정한다”며 “지금은 당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 우선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언론관계법 처리를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를 통해 독소조항을 제거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지난 3일 “한나라당이 여론수렴 결과의 반영 노력을 게을리하고 원안을 고수한다면 전혀 수용할 수 없다”며 “사회적 논의 기구를 통해 전문가 등 여러 관계자가 참여해 논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소조항을 제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회 폭력 사태를 피하고, 최소한의 역풍을 피하겠다는 주장이다.
100일 후 전쟁 예고
역풍 누가 맞을까?
이처럼 2월 임기국회를 통해 일부 쟁점법안을 처리했지만, ‘미디어 법’ 등 쟁점법안 통과 여부를 놓고 여야간 대충돌이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100일 후로 연기된 쟁점법안 전쟁에서 여의도 잔혹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어느 쪽이 승자가 되고, 어느 쪽이 후폭풍의 희생양이 될지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