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성폭행범 범행 분석<3인3색>

방방곡곡에서 ‘멍멍’ 발바리 전성시대

여성들만을 노린 흉악범들의 범행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날마다 터져 나오는 흉흉한 뉴스에 여성들의 귀가시간마저 빨라졌다. 이런 가운데 일명 ‘발바리’라고 불리는 연쇄성폭행범들까지 잇따라 검거돼 밤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강호순이 잡힌 이후 검거된 발바리만 해도 3명. 한 명은 충청도를 무대로, 나머지 두 명은 서울의 각각 다른 영역을 무대로 몹쓸 행각을 벌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1996년 원조발바리 검거 이후 전국 각지에서 검거된 발바리들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수년 동안 보일러공을 가장해 성폭행을 벌인 ‘보일러 발바리’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해 두려움에 떠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강호순 등장 이후 흉악범들이 연일 덜미를 잡히고 있다. 이들 역시 강호순과 마찬가지로 여성들만을 노리고 범행을 저질렀다. 목적은 성폭행.
이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유사한 범행방식과 패턴으로 성폭행을 저질렀다. 각각의 범인들에게 희생당한 이들 역시 비슷한 특징을 가진 여성들이었다. 최근 한 달 사이 적발된 발바리는 모두 3명. 두 명은 서울에서, 한 명은 충청도에서 연쇄성폭행을 저질렀다.

이들 중 한 명은 이른바 ‘동북부 발바리’라고 불리는 김모(27)씨. 김씨는 서울 중랑구, 광진구 일대에서 부녀자들만을 노리고 무려 5년 동안 범행을 이어가다 덜미를 잡혔다.
김씨가 처음 성폭행을 저지른 것은 2003년 11월. 당시 김씨는 여성 혼자 사는 집을 골라 몰래 침입해 성폭행을 하고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 첫 범행에 성공한 김씨는 그후 반복해 성폭행과 강도짓을 이어나갔다. 5년간 그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은 모두 9명. 모두 20~30대의 젊은 독신녀들이었다.

지난해 4월10일 오전 4시20분경에는 중랑구 면목동에서 혼자 살고 있는 A(24)씨의 집 화장실 창문을 뜯고 몰래 침입했다. 김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A씨를 위협한 뒤 현금과 수표 등 110만원을 빼앗고 2차례에 걸쳐 강간했다.

같은 날 발바리 두 명 검거
20~30대 독신녀만 노려

또 지난해 11월25일 오전 4시40분경에는 중랑구 면목동 다세대주택 2층 베란다의 열린 문을 통해 B(25)씨의 집에 침입해 B씨를 때리고 성폭행한 뒤 현금 8만원을 빼앗았다.
이런 방식으로 김씨는 서울 동북부 지역에서만 9명의 여성들에게 몹쓸 짓을 벌이고 170여만원의 금품도 갈취했다.

김씨가 5년 동안 경찰에 잡히지 않은 것은 피해자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마스크를 쓰고 범행을 해 얼굴이 노출되지 않은데다가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장갑을 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경찰은 중랑구와 광진구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의 신고가 집중된 점에 주목해 동일범의 소행일 것으로 추측했다. 그리고 이 일대에 살고 있는 7000여명의 남성을 상대로 6개월간 수사를 벌였다.

강호순 사건 이후 연쇄성폭행 저지른 발바리 3명 검거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 수년 동안 강간하고 금품 갈취
치밀하게 계획하고 증거 남기지 않아 검거망 피하며 반복 범행
수년간 서울 강북지역에서 9명 성폭행 ‘보일러발바리’행방 묘연


또 이들 7000명 중 중랑구 지역에 거주하는 300명의 남성을 다시 추렸다. 범인이 중랑구에 거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 이 가운데 피해자들이 말하는 범인의 인상착의와 연령대가 일치하는 30명을 다시 추린 뒤 이들에 대해 잠복수사를 펼쳤다.
김씨가 잡힌 것은 담배꽁초 하나가 화근이 됐다. 경찰은 뒤쫓던 30명의 용의자들이 흘린 물건 중 DNA조사로 감식할 수 있는 물건들을 수거했는데 김씨가 PC방에서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에서 나온 DNA가 피해자 여성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와 일치했던 것.

경찰은 이에 따라 지난달 17일 새벽 중랑구의 한 PC방에서 김씨를 검거했다. 범행을 자백한 김씨는 “유흥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로써 지난 5년 동안 서울 동북부 지역의 여성들을 두렵게 만들었던 발바리 김씨는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됐다.
또 다른 서울지역 발바리는 관악구 일대를 중심으로 젊은 여성들을 노려 성폭행행각을 저지른 ‘관악구 발바리’ 최모(28)씨다. 최씨는 김씨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더 많은 여성들을 성폭행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7년 동안 12명을 성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한 것.

최씨 역시 혼자 사는 20~ 30대 여성들을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 지난해 9월27일 오전4시20분경에는 관악구 신림동에 사는 김모(25)씨의 집 부엌 창문을 뜯고 들어가 흉기로 위협한 뒤 성폭행하고 현금 2만5000원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최씨가 노린 집들은 주로 경비가 허술한 다세대 주택들. 상대적으로 보안이 잘 갖춰진 신축원룸이나 아파트보다는 오래된 연립 등의 주택들 중 범행대상을 고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12명을 성폭행하고 130여만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은 것으로 드러났다.

수년에 걸쳐 검거망을 피해 온 최씨는 지난해 8월 범행 현장에서 훔친 승용차 열쇠를 흘려 덜미를 잡혔다. 수배를 받던 최씨는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친구를 만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조사에서 최씨는 “술을 마시고 성욕을 이기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 발바리는 충청도 등 지방을 무대로 연달아 성폭행을 저지른 김모(53)씨. 앞선 두 명의 서울 발바리들과 달리 김씨는 타깃을 다방여종업원으로 삼았다. 가정집에 몰래 침입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는데다 단둘이 있는 장소로 유인하기 쉬웠던 탓이다.

다방종업원만 골라 성폭행
두 달간 18명 유인해 범행

김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두 달 동안 무려 18명의 여성을 유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강호순과 마찬가지로 3000CC급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재력을 과시해 여성들을 유혹했다.
그는 대전·충남·충북·경북 등에서 다방종업원들을 여관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간 뒤 수면제를 먹여 실신시킨 상태에서 성폭행하고 금품을 빼앗았다. 이런 방식으로 김씨는 3~4일에 한 번씩 여성들을 꾀어 강도와 강간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여성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한 김씨가 덜미를 잡힌 것은 1월27일. 이날 김씨는 충남 연기군의 한 다방에서 종업원의 금품을 훔치다 발각됐다. 김씨는 합의를 보기 위해 피해자와 함께 경찰서로 갔다.
단순절도혐의로 붙잡혀온 김씨를 본 경찰은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전날인 26일, 충남 홍성군에서 발생한 성폭행미수사건의 범인과 생김새와 차량 등이 비슷했던 것.

1월26일 다방 종업원 최모(38)씨는 한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가 자신이 남성인 것을 안 범인이 성폭행을 포기하고 현금 50만원을 빼앗아가는 피해를 당했다. 당시 최씨는 야산에 버려져 저체온증으로 입원치료까지 받았다.
그런데 김씨가 경찰서에 온 27일, 경찰이 성폭행미수범의 생김새와 김씨가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고 휴대전화 발신지 조회와 국도의 CCTV를 분석해 그가 범인이란 것을 밝혀냈다.

김씨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3일 실종됐던 충남 당진의 한 다방 종업원 김모(48)씨와 함께 나갔던 남성이 김씨인 것으로 밝혀진 것. 경찰은 김씨의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통해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한편 같은 경로에 있는 CCTV 녹화 내용을 분석해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를 추궁해 범행을 자백 받았고 김씨의 시신을 찾았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달 23일 오후 1시쯤 여종업원 김씨에게 접근해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유혹해 자신의 그랜저XG 승용차에 태웠다. 그 뒤 충북 청주의 술집으로 데려가 약을 탄 술을 먹였고 차 안에서 성폭행한 뒤 괴산군 청천면 야산에 버려 숨지게 했다.


경찰은 김씨의 차 안에서 여종업원 김씨를 성폭행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은 휴대전화와 알약 등을 찾아냈다. 자신의 범행이 속속 드러나자 김씨는 그동안의 범행행각을 자백했고 18명의 여성들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것이 밝혀졌다.
이처럼 잇따라 연쇄성폭행범들의 행각이 드러나면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은 수년 동안 서울강북 일대에서 9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보일러 발바리’다. 범인은 보일러수리공이나 택배직원을 가장해 여성들을 안심시키고 문을 열게 한 뒤 성폭행을 저질렀다.

처음 범인에게 피해를 당한 여성은 광진구 군자동에 사는 20대 여성으로 2005년 5월31일 변을 당했다. 이 여성은 범인이 누르는 초인종 소리를 친구로 착각해 문을 열어줬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후에도 마포구 창전동과 서교동에서 4건, 광진구에서 1건, 동대문, 동작구, 종로구에서 각각 1건 등 모두 9건의 성폭행 피해가 신고 됐고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용의자의 DNA가 모두 동일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취 감춘 보일러발바리
불안감 커지는 여성들


현재 경찰은 사건이 자주 발생한 마포경찰서 내에 전담반을 편성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밝힌 용의자의 특징은 180cm 정도의 큰 키에 20대 후반 남성이라는 것.
그러나 범인이 흘린 증거나 단서가 적어 수사는 난항에 빠졌다. 이로 인해 인근에 사는 여성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신도 발바리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밤길을 재촉하는 여성들도 부지기수다.
서울 광진구에 사는 정모(29·여)씨는 “잊혀질 만하면 들리는 성폭행범들의 검거소식에 불안감이 가실 날이 없다”며 “범인들은 수년 동안 성폭행을 저지른 후에야 검거가 되니 결국 여성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킬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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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