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특집> 끌려간 소년-소녀병들은 지금…

  • 김민주 기자 alswn@ilyosisa.co.kr
  • 등록 2023.06.19 11:12:33
  • 호수 14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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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그들은 버려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6‧25전쟁 발발 73주년. 현재 한국은 전쟁의 참사를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정도 가야 확인할 수 있을까? 참사가 현실서 사라지듯, 같이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이다. 이제 이들도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됐다. 이렇게 긴 세월이 흘렀지만, 소년-소녀병들은 6‧25전쟁 참전병으로 인정받기가 힘든 상황이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한국의 역사를 가르는 6‧25전쟁이 발발했다. 6‧25전쟁은 북한이 기습적으로 한국을 침공하면서 발발됐다. 미국과 중국이 참전해 세계적 대규모 전쟁이 될 뻔했으나, 1953년 7월27일 오후 9시에 체결된 ‘한국휴전협정’에 따라 일단락됐다. 세계적 대규모 전쟁을 피했다 뿐이지, 6‧25전쟁은 한국이 치른 전쟁 중 가장 피해가 큰 전쟁이다.

“끌려가…”
강제 징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 13만8000명과 민간인 사망자 24만5000명, 피난민 651만명으로, 베트남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에 비해 6‧25전쟁은 민간인 사망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을 정도로 처참한 전쟁이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이재민도 1000만여명이 넘었다. 이는 전체 인구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다. 

재산 피해는 추산이 어려울 정도다. 북한군에 밀려 마지막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을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됐다. 국내 제조업의 42%가 파괴됐고,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등은 물론 개인 가옥도 대부분 파괴됐다.


6‧25전쟁으로 집을 잃거나 고향을 떠난 피란민은 거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미군 부대서 나오는 포장지와 통조림 깡통 등을 모아 엮어서 판잣집을 지어 살았다. 당시 대부분 국민은 우방국이 원조한 구호 식량과 나무껍질, 풀뿌리로 연명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서 끓인 꿀꿀이죽이 피란민의 주요 영양 공급원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초콜릿을 얻기 위해 미군 병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녔고, 시장에나 거리에서는 담배를 팔거나 구걸하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피해 규모를 비교할 순 없으나, 가장 큰 피해를 본 이는 6‧25전쟁 소년-소녀병이었다. 소년-소녀병은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군인이나 이들로 이뤄진 군대를 뜻한다. 이런 이유로 학생 때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학도의용병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10대에 전쟁 참여…지금도 강제 징집 논란
UN “미성년자 군사 목적 동원은 절대 금지”

하지만 학도의용병은 학생 신분으로 자진해 지원한 비정규군으로, 그 업적과 존재를 인정받았지만 소년-소녀병은 아니다.

소년-소녀병은 병역의무를 지우면 절대 안 되는 17세 이하의 아동임에도 현역병으로 징집돼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으로 참전했다. 국방부 군적에 남아 있는 인원만 무려 3만여명에 달한다. 그 속에는 소녀군도 500명이나 포함돼있다.

UN은 미성년자를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하는 것을 ‘가혹한 형태의 아동노동’으로 판단해 엄격히 금지한다. 중대한 인격침해라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서도 이를 금지하고 있다. 18세 미만을 소년-소녀병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6‧25전쟁 때 소년, 소년들은 어떻게 징집된 것일까? 15세에 대구서 중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달 만에 징집된 생존 소년병 윤한수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윤씨는 “(학교에 온 군인들이)‘제군들, 장교나 일반 병사로도 지원해서 모두 가거라, 나라가 이리 위중하다’며 징집을 권유했는데 법률적으로 우리는 병역의무를 이행할 나이가 안됐으니까, 그건 이제 설사 지원한다고 해도 안 받아 주는 게 원칙”이라며 “그런데 자고 나면 학생이 하나씩 없어졌다. 그때 방위군, 경찰관들이 와서 강제로 데리고 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전쟁 탓에 평범한 학생들이 강제적으로 군인이 된 것이다. 당시 윤씨는 키 160㎝가 안 됐다. 이때부터 책가방 대신 24㎏ 군장을 들어야 했다. 총 쏘는 법도 몰랐던 윤씨는 지옥 같은 전쟁터에 내던져졌다.

그리고 
버려지다

윤씨는 “전쟁터서 다친 아이들을 들것에 담고 내려왔다. 생명이 붙어 있는 놈들은 고함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몸 전체에 소름이 끼쳤다. 나도 곧 저리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어린 소년병에게 담력을 키운다며 실험을 했다. 실험은 제네바 협정에 의해 포로를 잡으면 즉결심판 같은 것을 못 시키는데 즉결심판을 시켰다. 그 즉결심판 처형 사수를 소년병에게 시켰다. 나는 총 쏘는데 안 맞았다”며 “떨려서 잘 안 봤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고, 좌우간 내가 그걸 했다. 너무 무서웠다. 이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6‧25전쟁 당시 무려 1만2000명의 소년병이 가장 치열하고 위험했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 최전선에 투입됐다. 이때 전체 소년병 3만명 가운데 10%인 3000명이 전사했다.

6‧25전쟁 소녀병이었던 김명자씨는 이후 한국 최초의 여군이 됐다. 김씨는 한 방송 프로에 나와 “6‧25전쟁 당시 소녀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16세에 군대에 들어가서 3년7개월 있다가 왔다.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가 와서 폭탄이 떨어지면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며 “난리가 났었다. 그때 여군을 모집했다. 우리 동네서 여자만 20명이고 다른 동네 합쳐서 40명 넘게 트럭을 타고 갔다. 죽을 각오로 간 거다. 가서 싸우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고. 정말 죽으러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씨는 특수부대서 활동했다.

잊혀져 가는
그들의 고통

그는 “켈로 8240부대였고, 작전명이 ‘래빗’이었다. 당시에는 이게 뭔지 몰랐다. 중3이 ‘켈로’가 뭔지 어떻게 아느냐. 아군서 파악하지 못한 걸 보고 알리는 일이었다. 첩보활동이라 비밀을 알아와야 했다. 각자 맡은 게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맡은 임무는 비밀이었다”며 “나는 먼 곳으로 파견돼 100리, 200리를 걸어갔다. 산속이니 엄청 힘들었다. 치마저고리 입고 고무신 신고 다녔다. 겨울에는 발이 얼어서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하다가 도중에 시체도 못 찾고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 50명 모집해서 나처럼 임무를 하다 30명쯤 죽으면 또 가서 모집했다. 나는 죽으러 왔는데 왜 살고 살려고 바둥댄 사람들은 다 죽었다. 울적하면서도 슬프고 이게 인생인가 싶었다. 떠난 동료들이 생각나 잠도 못 잔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트라우마로 소년-소녀병들은 일생을 고통 속에서 보낸다. 이유는 참혹한 전투서 동료들을 두고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소년병 참전자로 강제 징집된 장성곤씨는 3주간의 훈련을 받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됐다. 장씨는 “바로 시체를 넘고 다니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광경이 뇌리에 박혀서 떠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전투 중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는 등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남은 건 정신적‧물질적 상처뿐이다.

그는 “피해는 말도 못한다. 거지가 됐다. 당연히 학업을 못 했는데, (군대에)3~4년 있다가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은 졸업을 했다. 우리는 군에 갔다 왔기 때문에 졸업장이 없으니 대학을 가지 못했다”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진 동네 아이들
“폭탄 떨어져 죽고, 총 쏴서 죽이고”

이런 상황 속에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명예선양법이 더 이상 미뤄지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소년-소녀병이 나라 존망 위기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집중 투입되는 등 희생됐지만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바른미래당 전 유승민 의원이 19·20대에 걸쳐 두 차례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 보상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으나 끝내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1대 국회서도 국민의힘 강대식·임병헌 의원이 2020년과 지난 3월 각각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현재 국회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계류돼있다.

이 법안의 목적은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도 징집 또는 소집돼 참전한 소년-소녀병 및 그 유가족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하게 예우하고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해당 법안에는 ▲소년-소녀병 및 그 유족에 대한 위로금 지급 등에 관한 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소년-소녀병 위로금 지급심의위원회를 설치 ▲6‧25전쟁 당시 병역의무 대상 연령이 아닌데 참전해 희생한 소년-소녀병과 그 유족에 대한 예우에 관한 사항을 규정 ▲소년-소녀병의 희생을 보상하기 위해 소년-소녀병 또는 그 유족에게 위로금 지급 ▲위로금 지급 심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위원회가 검증 또는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함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소년-소녀병을 추모하고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 및 추모기념관 건립 등 기념사업을 추진하도록 함 등의 내용이 들어가 있다.

임 의원은 “소년-소녀병들의 특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가 시급하다. 소년-소녀병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일익이 될 것인 만큼 조속한 법안 통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어린 소년-소녀병들이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남은 분도 2000여명이 되지 않는다. 21대 국회에서는 반드시 6‧25전쟁 참전 소년-소녀병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합당한 예우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여야가 한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 조사기관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소년-소녀병 강제징집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만 17세 미만 소년-소녀들이 강제 징집되는 과정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늦었지만…
시작된 조사

정영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국 국장은 “아동 소년병에 대해 법적 근거 없이 입대 혹은 징집시켜서 군 복무를 시킨 점은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봐 조사 개시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진실규명 신청인인 하경환 변호사는 “지금이라도 대통령께서, 국무총리께서, 국방부 장관께서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뵙고 ‘너무나 죄송하고 감사하다’ 이 말씀을 꼭 드려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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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면죄부’ 역풍 맞은 중앙지검 막전막후

‘김건희 면죄부’ 역풍 맞은 중앙지검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도이치모터스 사건이 사실상 종결됐다. 항고가 남았으나 기소가 어렵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김건희 여사에게 면죄부를 던져준 꼴이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특수통이 아닌 기획통 중심의 연말 인사를 단행할 전망이다. 검찰 내부에서는 갑작스러운 물갈이가 검사 ‘줄사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브리핑도 그렇고 결론 자체가 참담하다.” 서울중앙지검 한 검사의 말이다.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연루된 김건희 여사를 무혐의 처분한 것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김 여사의 핸드폰과 주거지 압수수색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나 법원이 기각했다며 거짓말 논란을 자초했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수사 결론을 내놓은 데 이어 내부에 균열이 생기는 분위기다. 4년 넘게 맹탕 수사 검찰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에 연루된 김 여사를 수사한 건 4년6개월이 넘는다. 증거와 법리를 따져 불기소 처분했다는 입장이지만 면죄부를 던져줬다는 비판은 현재진행형이다. 검찰은 김 여사가 권오수 전 도이치모터스 회장의 주가조작 범행을 간접적으로도 인식하지 못했다고 봤다. 그러나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서 증거 확보 타이밍을 놓치고 엇갈리는 진술 등으로 인해 판단이 어려워졌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거세다. 이번 수사에 관여한 서울중앙지검 전·현직 검사장은 4명이다. 또 수사 실무를 총괄하며 일선 수사팀을 지휘한 부장검사도 4명이다. 이 사건은 문재인정부 시절인 지난 2020년 4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범행에 김 여사 등이 가담했다’는 고발장이 접수되면서 시작됐다. 김 여사는 현직 검찰총장의 부인이었다. 같은 해 9월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이 검찰에 출석해 고발인 조사를 받았고, 이후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에서 반부패수사2부로 재배당됐다. 이듬해 8월, 수사팀이 재정비되면서 수사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직을 내놓고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것이 그해 6월,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확정된 것은 11월이다. 검찰은 2021년 12월 권 전 회장 등 일당을 무더기로 재판에 넘기며 사건을 일단락했다. 처분 대상서 빠진 유력 대선후보의 배우자 김 여사에 대해 검찰은 “주가조작 가담 여부를 계속 수사하고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지난 4월 총선서 야권이 압승하고 김 여사에 대한 소환조사 필요성이 연일 거론되면서 수사가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 7월20일 김 여사에 대한 대면 조사가 이뤄졌지만, 최종 처분은 권 전 회장 등에 대한 항소심 재판 선고 이후로 또다시 밀렸다. 앞서 김 여사는 검찰청사가 아닌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통령 경호처 부속청사서 비공개 방문 조사를 받았다. 이 과정서 서울중앙지검이 이원석 전 검찰총장에게 사후 보고한 점이 알려져 ‘패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수사팀은 경호와 보안상 문제로 제3의 장소서 조사를 진행하게 됐다고 해명했으나 여타 사건의 피의자들과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4년6개월 수사하고 김건희 성역 인정한 꼴 “압수수색영장 법원 기각” 대놓고 거짓말 당시 검찰 안팎에서는 “사법부의 판단을 두고 보면서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건 정권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검찰이 참고하겠다고 밝힌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는 김 여사와 유사한 ‘전주(錢主)’ 역할을 한 인물에게 주가조작 방조 혐의로 유죄를 선고했다. 특히 김 여사가 주식거래로 인한 손실 금액 상당인 4000여만원을 1차 주포에게 입금받은 내역, 2차 주포인 김모씨가 도피 중에 또 다른 사건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서 김 여사를 언급한 정황 등이 알려진 바 있다. 이 같은 상황서 일각에서는 수사 결과의 공정성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처분 전 수심위를 열어 외부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수사팀은 수심위 없이 차·부장급 검사, 일부 평검사 15명으로 구성된 레드팀의 검토를 거쳐 결론을 내렸다. 수사팀과 서울중앙지검의 지휘라인 모두 이 사건은 수심위를 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일치된 의견을 낸 것으로 파악됐다. 최종적으로 김 여사에게 면죄부를 던져준 셈이다. 사건 처분 지연 이유를 묻자 수사팀은 “수사 종결을 위해 김 여사에 대한 대면조사가 반드시 필요했다”며 “여러 차례 출석을 요구했지만, 지난 7월 가까스로 대면조사가 이뤄졌다”고 해명했다. 부장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권오수 전 회장을 비롯한 핵심 관련자들은 일사천리로 기소했는데 유일하게 김 여사에 대해서만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수십명의 검사들이 투입돼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했다는 게 겨우 대면조사”라며 “과연 최선을 다한 수사였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검찰이 시간을 끌어온 게 제일 문제”라고 비판했다. 검찰이 시간을 끈 것보다도 언론 브리핑을 진행하면서 거짓말을 한 사실도 문제로 떠올랐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 관계자는 지난 17일 브리핑서 “코바나컨텐츠와 도이치모터스 수사가 같이 진행돼 압수수색영장 같은 것에도 함께 범죄사실을 적었는데, 2020년 11월 김 여사 주거지, 사무실,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청구가 기각됐다”고 설명했다. 모르고? 알고도? 기각된 영장 혐의를 묻자 “코바나 사건이 주되긴 했지만 결국 코바나와 도이치는 같이 수사 중이었다. 압색영장에도 범죄 혐의가 같이 들어갔다”고 말했다. 도이치 사건으로도 영장 청구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지난 18일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김 여사 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된 건 코바나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논란이 일자 “전달 과정의 오해였을 뿐 거짓 내용을 브리핑한 적 없다”고 해명했다. 브리핑서 ‘김 여사는 기본적으로 계좌주’라고 전제한 후 “계좌주 중 압색영장을 청구한 사람이 없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각된 영장에 도이치 사건 혐의는 없었다’고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던 만큼 브리핑이 부정확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검찰은 김 여사의 자본시장법 혐의에는 한 차례도 강제수사를 시도하지 않은 것이라 수사 의지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수사팀은 “10년 지난 사건이고 실효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재경지검 한 부장검사는 “수사팀 입장서 ‘거짓말 논란’은 억울했을 수 있다. 그러나 도이치모터스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지지 않은 건 수사가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소극적 수사로 꼽힐 수 있는 뼈아픈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검 한 검사도 “수사팀 내에서도 기소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코바나컨텐츠 영장이 기각되지 않았으면 도이치모터스 관련 추가 물증을 확보할 수 있었을 거라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애초 정치적 부담을 고려해 소극적으로 수사한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이 김 여사에게 지난해 7월 2차 서면 질의서를 보내고 지난 7월 답변을 받기까지 1년이 걸린 점도 의구심을 키웠다. 수사팀 관계자는 “서면 답변을 안 주면 (검찰이)어떻게 하느냐”고 했지만 대응이 미온적이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용산 갈등 후 이원석 배제 검찰의 판단으로 논란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명품백 사건의 경우 고발인인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 등이 검찰 불기소 결정에 불복하는 항고 의사를 밝혔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경우도 고발인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최강욱 전 의원이 항고장을 접수한다는 계획이다. 또 공수처 수사와 야당 측의 김 여사 특검 발의 등은 아직 진행 중이다. 공수처는 지난달 ‘국민의힘 공천 개입’ 의혹과 ‘명태균씨 여론조사 비용 부담’ 의혹을 수사4부(이대환 부장검사)에 배당했다. 아울러 민주당은 도이치모터스 사건과 명품백 사건, 명씨 여론조작 등 총 13개 의혹에 대한 특검법을 발의했다. 다만 검찰 항고가 통계적으로 인용되는 비율이 10%로 매우 낮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명품백 사건과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불기소 결론이 서울고검 등 이후 단계서 뒤집힐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법조계는 내다보고 있다. 공수처가 인력 부족 등의 문제를 겪고 있는 점도 고려해 봐야 한다. 또 약 15년 전 벌어진 도이치모터스 사건을 새롭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물리적인 한계도 안고 있다. 심우정 검찰총장이 연말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단행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어그러진 조직 내부를 점검하고 분위기 전환에 나서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현재 공석인 광주고검장과 부산고검 차장검사 등 지휘부 재편이 목적일 수도 있지만 특수통이 아닌 기획·관리에 능한 검사 위주로 조직을 꾸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앞서 심 총장은 취임 직후 이뤄진 인사에서 신봉수 고검장이 광주고검장서 대구고검장으로, 임승철 검사장이 부산고검 차장서 광주고검 차장으로 각각 이동시켰다. 검찰 내부에서는 고위 간부보다 중간 간부 인사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5월 단행된 인사에서 사법연수원 38기 검사들의 부장검사 승진이 보류됐다. 올해를 넘기면 38기부터 1년씩 승진이 유예되는 탓에 인사 적체를 우려하는 검사들이 많다. 연말 고위 간부 인사 정권 수사 힘 빼기? 특수 지고 기획통 주류로…녹슨 칼 되나 명품백 사건과 도이치모터스 사건 수사팀 소속 검사들은 지난 인사에서 잔류해 이들의 승진·전보 인사 요인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단행된 검찰 인사 기조를 보면 특수통은 좌천되거나 주류서 제외됐다. 지난 5월 검찰 인사에서 특수통으로 꼽히는 송경호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부산고검장으로 전보됐고, 기획통에 가까운 이창수 검사장이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됐다. 심 총장 취임식 당일 발표된 인사에서는 전국 특수수사를 지휘하는 대검찰청 반부패부장에 기획통으로 불리는 구승모 검사장이 임명됐다. 향후 인사에서도 이런 ‘관리형 인사’ 기조가 반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검찰 안팎에서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나 이 전 검찰총장과 가까웠던 정통 특수통들이 인사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에 심 총장의 연말 인사 전후로 사직서를 던지는 중간 간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미 사직서를 쓰겠다고 말한 부장급 간부도 있다. 특수통 외면은 이미 6개월 전부터 시작됐다. 특수통이 외면받게 된 이면에는 대통령실 및 김 여사 관련 수사에서 힘을 빼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칼을 미리 부러뜨리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이 전 총장과의 갈등 직후 특수통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게 복수의 검찰 관계자의 말이다. 구권력 신권력 윤 대통령과 같이 근무한 인연이 있는 한 변호사는 “여권이 친한(친 한동훈)과 친윤(친 윤석열)으로 나뉜 것처럼 검찰 내부도 구권력과 신권력 간의 충돌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 중앙지검이 김 여사를 불기소하면서 불만이 쌓인 검사들이 상당히 많다”며 “지금 상황서 특수통을 중용하는 건 당연히 좋은 선택이 아니다. 심 총장이 고위 간부와 중간 간부 대부분을 기획과 정무 감각이 뛰어난 이들로 꾸릴 것으로 본다. 그렇다고 차후 있을 인사에서 내치면 반골 기질이 있는 특수통들이 가만히 있겠나. 특수통들은 항시 정권의 심장을 겨눠왔다. 지금 용산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