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법의학계 큰 족적 남긴’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

“이태원 참사에 법의학자는 없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놈의 세상이 다 변해도 이거 하나만큼은 안 변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동네 할아버지’라고 말한 노회한 법의학자는 수십년째 그대로인 법의학 환경에 한탄을 쏟아냈다. 무리의 선두에서 서서 ‘진군의 나팔’을 불었던 지난날에 대한 진한 아쉬움도 토로했다. <일요시사>는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을 만났다.

지난해 9월15일 서중석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 원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에스제이에스(SJS) 법의학 연구소를 찾았다. 직원과 손님으로 북적이는 연구소에서 서 전 원장은 컴퓨터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취재진을 맞았다. 이날 인터뷰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정신없이 이어졌다. 빽빽한 서 전 원장의 일정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야 했다.

지쳐버린

지난 10일, 서 전 원장을 다시 만났다. 이전과 달리 서 전 원장은 조용한 연구소에서 혼자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4개월 전, 그는 “우리나라 법의학에 미래는 없다”고 말했었다. 2012~2016년 2대 국과수 원장을 지냈던 그는 2011~2013년에는 대한법의학회장도 역임했다.

국내 법의학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의 발언은 묵직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서 전 원장은 이날도 여러 차례 날카로운 말을 던졌다. 특히 지난해 10월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로 159명이 사망했고 19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대량 재해 현장에서 ‘죽음 전문가’인 법의학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존재도 역할도 그야말로 무(無)였다. 서 전 원장은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법의학자가 ‘배제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반박했다. 

“배제는 참석할 자리가 있는데 하지 못하도록 한 거죠. 이태원 참사 현장에는 법의학자를 위한 자리가 아예 없었어요. 대량 재해가 일어나면 매뉴얼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이태원 참사는 그 단계까지 가지도 않았습니다. 유명한 이야기 중에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은 잊히는 것’이라는 말이 있죠. 이태원 참사에서 법의학자의 역할은 아예 잊혔습니다.”

300명 넘는 사상자 대량 재해
사인에 대한 논의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는 한 장소에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이른바 대량 재해가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지하철 화재사고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 2014년 세월호 사고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을 비롯한 3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로 29명이 사망했다.

반복된 참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과수 법의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서 전 원장은 “법의학뿐만 아니라 유전자 감정, 유류품을 분석하는 법과학도 많이 발전했다. 예전에는 국과수에 치과의사가 없어서 대학에서 법치의학을 하는 사람이 와서 감정을 도와주곤 했는데 지금은 4명 정도 있다. 이들은 대량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현장으로 달려가 묵묵히 일하면서 매뉴얼을 만들었다. 혼란을 피하고 피해를 입은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겠다는 의지였다”고 말했다. 

최근 이런 기조가 차츰 변질돼가면서 사건을 ‘쉽게, 쉽게’ 해결하려 한다는 게 서 전 원장의 생각이다. 특히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사망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점에 의문을 표했다. 좁은 장소에 많은 사람이 몰려 사고가 일어나 사망자가 발생하면 사인을 ‘압사’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눌리거나 깔려서 사망했다고 보는 것. 

하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처럼 좁은 장소에 많은 사람이 몰리면 압사 외에도 ▲코와 입이 막혀 질식하는 경우 ▲복부가 눌러 토사물이 역류해 질식하는 경우 ▲트라우마로 사망하는 경우 ▲공포스러운 환경에서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급격하게 악화돼 사망하는 경우 등 다양한 원인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서 전 원장은 이 부분에 대한 논의를 분명히 진행했어야 했다는 입장이다. 

“대량 재해가 발생했을 때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당사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복구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태원 참사 당시 상황을 보세요. 사체가 도처에 놓여있고 일반인이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이 말 그대로 생중계됐습니다. 이런 나라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법의학 의사 또는 인권을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어요.”

문제는 이미 ‘피로 만든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대량 재해를 경험하면서 희생자가 남기고 간 것들이다. 2002년 4월15일 경남 김해 민항기 추락사고가 일어났을 당시 국과수는 비상설기구로 집단사망자관리단(KDMORT)을 발족했다.

미국의 재난대응팀 디몰트(DMORT)에서 착안했다. 디몰트는 재해로 사망한 사람을 안치할 수 있는 영안실과 사인 조사 등의 법의학 서비스를 제공한다. 

‘피로 쌓은’ 경험과 노하우
“아무도 자리를 주지 않아”

2018년부터는 경찰청과 국과수가 합동으로 재난희생자 신원확인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경찰 과학수사관과 국과수 법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K-DVI’(재난희생자 신원확인팀)도 운영 중이다. 앞서 국과수는 2015년 <Waiting and Condolence(기다림과 애도)>라는 제목의 DVI 매뉴얼을 발간했다. 대량재해가 일어났을 때 개인식별하는 방법을 기술한 저서다. 

서 전 원장이 안타까워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대량 재해를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노하우를 쌓고 매뉴얼을 만들어 직접 현장에 적용한 경험이 있는 법의학 전문가가 설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전문가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법의학을 하려는 사람은 점점 찾기 힘들고 국과수는 법의학자에게 더 이상 명예로운 곳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결국 도돌이표처럼 검시제도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지난해 9월 서 전 원장은 2014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를 언급하면서 “지금은 의지가 다 닳았다. 아무리 얘기해봐야 달라지는 게 없다. 검시제도는 평생의 바람이었는데…”라고 말한 바 있다.

검시제도 관련 법안 7개 중 6개가 임기 만료로 폐지됐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 발의한 법안도 ‘제자리 걸음’ 중이다. 21대 국회가 끝나면 다음 법안 발의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다. 


서 전 원장은 몇 년 전부터 검시제도와 관련해 “지금처럼 검사가 검시권한을 행사하되 부검 여부를 결정하기 전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법제화됐으면 한다”는 뜻을 비쳤다. 검시제도를 완전히 뒤엎는 방식이 아닌 전문가, 즉 법의학자의 역할을 점차 늘려가는 식으로 가자는 것이다.

“아쉽다”

서 전 원장은 인터뷰 동안 여러 번 ‘아쉽다’는 말을 반복했다. 4년간 국과수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경험이 부족해 진행하지 못한 일 등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욕을 먹더라도 ‘진군의 나팔’을 더욱 불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터뷰 마지막까지 법의학자에게는 대량 재해에서 사망자와 그의 유가족을 돌봐야 하는 임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어렵게 쌓은 기술이 사라질 때까지 방기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끝끝내 덧붙였다.


<jsjang@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

[단독]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탈옥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모씨와 조직원 3명이 필리핀 현지 수용소서 탈옥한 것으로 확인됐다. 8일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와 함께 보이스피싱 등의 범행을 함께한 조직원 포함 총 4명은 최근 필리핀 루손섬 남동부 지방 비콜 교도소로 이감됐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지난 4월 말, 현지서 열린 재판에 출석한 박씨와 일당은 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서 도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한 수사 당국 관계자는 “박씨와 일당 3명이 교도소로 이송되는 과정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구체적인 탈출 방식 등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던 바 있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간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왔다. 특히, 박씨는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는 후문이다. 박씨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 “박씨가 마닐라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필리핀 루손섬 비콜교도소 수감 보이스피싱 이어 마약 유통까지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또, 박씨는 새로운 마약왕으로 떠오르고 있는 송모씨와 함께 비콜 교도소로 이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비쿠탄 교도소에 수감돼있는 한 제보자에 따르면 “박씨의 텔레그램방에 있는 인원이 10명이 넘는다. 대부분 보이스피싱과 마약 전과가 있는 인물들로 한국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씨는 본래 마약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송씨와 안면을 트면서 보이스피싱보다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 사업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교도소 내에서 마약 사업을 이어왔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경찰 안팎에서는 “새로운 조직을 꾸리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당시 일각에서는 이들이 비콜 교도소서 탈옥을 계획 중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비쿠탄 교도소 관계자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서 약 100만페소(한화 약 2330만원) 정도면 인도네시아로 밀항이 가능하다. 비콜 지역 교도소는 비쿠탄보다 탈옥이 쉬운 곳”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한편, 지난 7일 외교부와 주필리핀 대한민국 대사관 측은 정확한 탈출 방식이나 사건 발생 일자에 대해 “확인해줄 수 없다”고 일축했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