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부 5년’ 요동치는 재계 서열

1위는 굳건한데…A 그룹 엎치락뒤치락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문재인정부가 어느덧 집권 5년 차를 앞두고 있다. 그 사이 재계 판도에는 많은 변화가 감지됐다. 건실한 성장을 거듭한 곳이 있는 반면 몇몇 기업은 대기업 지위를 상실했다. 변화의 소용돌이는 신축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 현대자동차 사옥 ⓒ현대자동차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5월 ‘상호출자제한집단 및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발표해왔다. 직전년도를 기준으로 자산 5조원이 넘는 대기업집단을 공개하는 것이다. 여기에 포함됐다는 건 ‘대기업’으로 분류됐음을 의미한다. 회사가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흥미로운 
판도 변화

상호출자제한집단 지정은 재벌에 의한 시장경쟁 저해를 막기 위해 1987년 첫 도입됐다. 초창기에는 자산총액 4000억원이 기준이었지만, 2002년 2조원, 2009년 5조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상호지급보증 금지 출자 총액 제한, 상호출자 금지 등 규제가 가해진다.

해당 기준은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수정됐다. 2017년 7월11일 자산 5조원 이상인 공시대상 기업집단의 지정을 위한 세부기준이 담긴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데 따른 변화였다.

개정안은 석달 전 공표된 개정 공정거래법의 위임 사항을 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시 의무와 사익편취 규제의 적용대상을 기존 자산 10조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집단 외에 자산 5조원 이상의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분류하는 게 핵심이다.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 절차는 기존 상호출자제한집단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산총액 산정은 직전 사업연도 대차대조표상의 자산총액 합계로 이뤄지며, 금융·보험사는 자본총액과 자본금 중 큰 금액에 따른다. 대신 금융·보험업만을 영위하는 기업집단이나 회생·관리절차가 진행 중인 소속 회사의 자산총액이 전체의 50% 이상인 기업집단 등은 지정대상에서 제외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첫해인 2017년에 상호출자제한집단 및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린 일반기업은 총 57곳. 상호출자제한집단이 31개, 공시대상 기업집단이 26개였다. 

자존심 걸린 물밑 순위 경쟁
M&A·분리 나비효과…‘빅5’ 뒤바뀌나

3년 뒤 이 명단에는 변화가 뒤따랐다. 지난해 4월 기준 상호출자제한집단(34곳)과 공시대상 기업집단(30곳)에는 총 64곳이 포함됐다. 문 대통령 부임 첫 해와 비교하면 상호출자제한집단에 포함된 기업은 3개 늘었고, 공시대상 기업집단은 1개 감소했다.

세부항목을 살펴보면 국내 기업 환경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으로 분류되던 몇몇 기업은 더 이상 이 명단에서 이름을 찾기 힘들다.

한진중공업은 인천 북항 운영에 대한 지배력 상실에 따른 자산 감소로 지난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2000년에 자산 기준 재계 순위 11위에 올랐던 한솔은 이후 외형 확대에 소극적인 양상을 나타냈고, 지난해 공시대상 기업집단 명단에서 제외됐다.
 

▲ SK본사 ⓒ고성준 기자

한솔과 한진중공업이 대기업 명단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이들의 공석은 금방 채워졌다. ▲넷마블 ▲유진 ▲애경 ▲다우키움 ▲HMM ▲장금상선 ▲IMM인베스트먼트 ▲KG ▲삼양 등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넷마블과 유진그룹은 2018년 공시대상으로 지정됐다. 넷마블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되며 2조7000억원의 자금이 유입됐고, 유진그룹은 유진저축은행 인수 및 계열사인 유진기업의 실적 개선이 자산 증가에 기여했다.

지난 2019년에는 애경그룹과 다우키움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애경그룹은 계열사가 상장하고 신사옥을 준공하면서 자산이 증가했고, 다우키움은 사모펀드(PEF)와 특수목적법인(SPC)이 늘어난 데 따른 영향이 컸다.

뜨고 지고
흥망성쇠

올해는 5곳이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신규 지정됐다. HMM은 6조5000억원, 장금상선은 6조4000억원, IMM인베스트먼트는 6조3000억원, KG그룹은 5조3000억원, 삼양그룹은 5조1000억원으로 자산총액이 집계됐다.

HMM은 지난 2019년 적용된 국제회계 기준으로 2018년까지 부채에 포함되지 않았던 운용 리스가 부채로 인식되면서 자산이 늘었다. 여기에 글로벌 해운업계 흐름인 대형화에 맞춰 대형 선박 확보에 나선 것도 부채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장금상선은 지난해 흥아해운의 컨테이너 사업 부문을 인수하면서 자산이 늘었다. 장금상선을 비롯해 계열회사 모두 비상장법인으로 구성돼있다.

KG그룹의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은 지난해 동부제철(현 KG동부제철)을 인수한 영향이 컸다. KG그룹은 2018년 말 기준으로 자산총액 2조2337억원의 중견 그룹이었는데, 2019년 8월 말 동부제철 인수를 완료하면서 자산이 대폭 늘었다. 동부제철의 자산총액은 2019년 말 기준 2조3553억원에 달한다.
 

▲ LG 본사

삼양그룹은 계열회사의 사채 발행과 당기순이익이 증가하면서 자산이 늘었다. 삼양그룹의 지주회사인 삼양홀딩스의 사채는 지난 2019년 말 기준 6985억원으로, 2018년 말(3441억원)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사모펀드 최초로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지정된 IMM인베스트먼트는 최대주주인 지성배 대표가 IMM인베스트먼트 지분 76%를 확보한 유한회사 IMM의 지분 42.8%를 보유하고 있는 점이 감안돼 공시 대상에 포함됐다. 공정위는 지 대표가 IMM 지분을 통해 IMM인베스트먼트의 79개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치열한
자리 싸움

지난해 인수합병·계열분리 등 굵직한 이슈가 이어진 만큼 올해 재계 순위는 어느 때보다 요동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상호출자제한집단으로 분류된 최상위권 집단에서의 순위 변동이 관심의 대상이다.

지난해 상호출자제한집단 및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보면 삼성전자가 자산총액 424조원으로 1위를 차지한 가운데 현대자동차그룹과 SK그룹이 그 뒤를 잇고 있다.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의 자산총액은 234조원이고, SK그룹은 225조원이다. 두 기업의 자산총액 차이가 10조원을 넘지 않는 상황에서 SK가 인텔의 낸드 사업부를 10조원에 인수하면서 격차는 한층 좁혀지게 됐다.


SK그룹이 인수합병에 적극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연내 순위 역전 가능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지난 2019년, 111개였던 SK그룹 내 소속 회사 수는 지난해 125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현대자동차그룹은 53개에서 54개로 제자리걸음 수준이었다. 

‘재계 빅5’의 나머지 구성원인 LG그룹과 롯데그룹의 순위 변동 가능성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지난해 상호출자제한집단 및 공시대상 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보면 LG그룹과 롯데그룹의 자산총액은 각각 137조원, 121조원으로 15조원 이상 격차를 보인다.
 

▲ 농심 본사 ⓒ농심

다만 LG그룹의 계열분리가 변수다. LG그룹은 지난달 24일 LG상사와 LG하우시스의 계열분리를 공식화했다. 두 회사의 자산총액 합계는 약 8조원이고, 계열분리가 완료되면 LG그룹은 약 10조원가량의 자산총액 감소가 불가피하다. 계열분리 세부 내역과 롯데그룹의 자산총액 상승 여부에 따라 순위 자리바꿈이 연출될 수 있는 셈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의 약진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해 기준 자산총액 63조원으로 재계 순위 9위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완료하면 순위가 오를 전망이다. 대우조선해양의 2020년 기준 자산총액은 12조원으로, 두 기업이 합치면 한화의 자산총액 72조원을 뛰어넘게 된다.

M&A·분리 나비효과
‘빅5’ 순서 뒤바뀌나

이 경우 재계 순위는 2계단 뛰어오른 7위에 위치하게 된다. 여기에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작업까지 연내 마무리되면 자산총액 규모는 더욱 불어난다. 


지난해 기준 재계 14위 한진그룹은 아시아나항공의 향방에 따라 현재 11위인 신세계그룹을 넘어설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의 자산총액은 13조원 규모로 파악되고 있으며, 한진그룹과 신세계그룹의 자산총액은 각각 33조원, 41조원이다.

반면 재계 순위 하락이나 대기업 지정 제외가 불가피한 집단도 눈에 띈다.

지난해 기준 자산총액 29조원으로 재계 순위 15위인 두산그룹은 재무구조 개선 계획이 마무리되면 순위가 하락할 전망이다. 수년 전부터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두산그룹은 지난해 ‘3조원 자구안’ 마련을 위해 계열사와 자산을 매각해왔고, 이로 인해 자산총액이 9조원 가까이 감소할 것으로 점쳐진다.
 

▲ ⓒ두산그룹

이로 인해 두산그룹의 자산총액이 21조원으로 감소하면, 재계 순위는 2계단 하락한 17위권에 해당한다. 지난해 기준 17위는 부영그룹(23조원)이고, 대림그룹(18조원)이 18위에 이름을 올린 상태다.

자산총액 17조원으로 재계 순위 20위에 위치했던 금호아시아나는 아시아나항공의 매각 속도에 따라 올해부터 대기업 명단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나항공의 자산총액이 그룹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아시아나항공 및 산하 자회사까지 일괄 매각될 경우 그룹의 자산은 3조원대로 줄어든다. 

이 경우 상호출자제한집단은 물론이고, 공시대상 기업집단에서도 제외된다. 사업적인 부분에서는 그룹 명칭도 바꿔야 한다. 건설회사인 금호산업과 운수업체인 금호고속 정도만 남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존 대기업 사이에서의 순위 변동도 흥미롭지만, 새롭게 대기업 편입을 앞둔 집단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농심그룹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변화의 
소용돌이

올해부터 공시대상 기업집단 신규 지정이 확실시 되는 농심그룹은 농심홀딩스를 지배회사로 상장사 3개, 비상장사 15개, 해외법인 15개 총 3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농심그룹 상장사 3개 자산 총액만 4조7000억원 수준이다. 여기에 메가마트, 태경농산, 농심엔지니어링, 엔디에스, 농심미분 등 비상장 계열사 15개까지 합치면 5조원을 훌쩍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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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