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아동 출연자’ 학대 논란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19.07.29 11:00:57
  • 호수 12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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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홍어 먹이고 회당 5만원?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방송가에는 여전히 열정페이가 존재한다. 아역 배우를 둔 학부모들은 최저임금을 지키는 표준계약서는 구경도 못했을 뿐더러, 아이들을 장시간 촬영에 방치하는 등의 열악한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화려한 방송가 뒤에 숨겨진 민낯에 대해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S양은 “추운 밤길에 혼자 뛰어다니는 연기 등 고된 촬영을 많이 해봤지만, 가장 힘든 촬영은 모 방송국서 홍어나 광어회를 먹는 장면이었다. 또 같이 출연한 언니는 사춘기라는 이유로 편의를 봐줬지만, 나한테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나이도 어린 나에게 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일단 출연?
계약서 없이…

2017년 S양은 학원형 기획사인 D사에서 연기를 배웠다. D사는 모 방송국서 아이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S양에 관한 프로필을 모 방송국 프로그램 외주 제작사인 L사로 전달했다. 

L사는 S양의 프로필을 확인한 후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다. S양은 같은 해 3월경 OO공개홀서 열린 모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당시 8세였던 S양은 오디션에 합격해 캐스팅되는 기쁨을 누렸다.

S양 어머니는 “오디션이 일주일 이상 진행된 것으로 안다. 우리 아이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처음에는 포함되지도 않았다. 프로그램 측에서 원하는 아이가 없어서 연령을 확대하다가 우리 아이가 눈에 띄어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S양 어머니를 불러 스케줄만 맞으면 S양과 함께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S양은 같이 출연하게 되는 출연자 A양과 함께 3번의 대본 리딩을 진행했다. 이때 S양 어머니는 제작진에게 계약서에 관해 운을 뗐다.

하지만 프로그램 관계자는 “그전에 하던 애들도 계약서 안 썼어요. 아이들이기 때문에 변수도 많이 있고, 3개월 묶어놔도 아이에 따라서 그 기간을 못 채우는 경우도 있고, 3개월 이상 촬영하는 경우도 있어 사실상 의미가 없어요”라고 답했다.

S양은 어머니는 촬영 경험상 아이들과 제작사가 원해야 계속 촬영이 진행되기 때문에 계약서 작성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이 출연에 관해서는 계약사항을 서로 못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S양 어머니는 “오디션에 참여해서 캐스팅된 아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모르겠지만, 엄마들은 다 알고 있다. 불공정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들이 힘들게 얻은 배역을 엄마가 괜히 나서서 놓치게 될까 봐 말을 못했다. 이 업계에선 성인·아이 할 것 없이 무명 배우들은 불합리한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아이 피해 갈까봐 항의도 못 해 
따로 쉬는 시간 없이 대본 연습

D사 관계자도 “원칙상으로는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시간을 자꾸 미루더니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고 전했다.

2017년 5월23일 S양은 본격적인 첫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은 오전 8시부터 시작됐지만, 오전 7시까지 도착해 촬영 준비를 마쳐야 했다. 메인 MC였던 S양은 2주에 1번씩 촬영을 진행했는데, 오전 8시부터 이르면 오후 10∼12시까지 하루에 4회분의 촬영을 해야 했다.


8세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타이트한 촬영 스케줄이었다. 
 

▲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S양 어머니는 “촬영 시간 동안 별도의 쉬는 시간은 없었다. 필름이나 메모리 교체할 때나 촬영 환경을 바꿔야 할 경우 틈틈이 쉬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시간마저도 대본 연습하느라 바빴다. 온전히 쉬는 시간이라 하기도 민망하다”며 “체력적으로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하다. 촬영을 다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올 때 녹초가 된 아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졌다. 특히 촬영이 오후 12시에 끝난 다음 날에는 학교에 가지 못한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촬영을 담당했던 작가는 “촬영은 8시부터 시작한 게 맞다. 하지만 아이들이 온전히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인서트(화면이 없어도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는 영상) 촬영을 앞에서 몰아서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휴식시간을 넉넉히 제공했다”고 항변했다.

S양 어머니에 따르면 촬영 특성상 아이들은 서서 촬영에 임해야 했고, 나이가 어려 키가 작은 아이는 같이 출연한 성인 연기자와 키를 맞추기 위해 발 받침대를 사용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S양 어머니는 “촬영 당시 프로그램 제작진은 주위 소품 중에 키를 맞출 수 있을 만한 물건을 급한대로 사용했다. 아이가 그 받침대서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열악한 촬영환경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S양은 프로그램 특성상 음식을 먹고 맛을 평가해야 했다. 출연자들은 홍어, 광어회, 청양고추가 담긴 김치 등을 먹어야만 했다.

S양은 가장 힘들었던 음식으로 홍어를 꼽았다. S양은 82회 때 같이 출연했던 출연자 A양과 함께 홍어를 시식했다. S양은 고기, 김치와 함께 홍어를 먹어야 했다. S양은 “언니(A양)도 홍어를 먹고 콜라를 계속 마시면서 힘들어했다. 홍어를 맛있게 먹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밝혔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녹취록서도 S양은 고등어회를 시식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S양은 “고등어회가 너무 비려서 토할 뻔했어요. 다른 회를 먹어도 고등어회 맛이 계속 나서 ‘아, 이게 비린내구나’ 했어요. 물도 계속 마셔봤지만, PD님과 대표님이 계속 맛있다고 하라 하시니까…. 솔직히 먹기도 싫었고 맛있다고 하라는데 맛있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같이 출연한 언니는 사춘기라는 이유로 다독여주는데 저한테는 계속 ‘언니 대사인데 네가 좀 해봐라’ ‘이렇게 맛있다고 해줘’ 이런 식으로 언니보다는 나한테 자꾸 요구했다. 그 상황서 안 한다고 할 수 없으니까 일단 ‘예’ 하고, NG가 나면 계속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는데 좀 힘들었다. 저를 좀 거칠게 대한 거 같은(느낌이 들었다)…. 작가님들이 얘기하실 때는 친하니까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저를 좋다고 얘기하시는데, (L사 대표와 작가를) 못믿겠다”고 덧붙였다. 

S양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먹인 음식들은 제작진들도 먹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당시 촬영현장에 있던 작가는 “아이들에 중간에 맵다고 한 건 안 먹이고 넘어갔다. 억지로 먹인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모 방송국 외주제작사서 촬영한 이 프로그램은 촬영 기준이 아니라, 방송 기준으로 출연료를 지급한다고 했다. S양이 처음 출연한 방송날짜는 2017년 7월10일이었다. 7월 6회, 8월 8회, 9월 6회, 10월 7회, 11월 8회, 12월 7회분이 방송됐다. 이후에도 2018년 1월 5회, 2월 3회, 3월 6회, 4월 9회, 5월 7회, 6월 7회, 7월 9회, 8월 5회, 9월 5회분에 출연했다. 

교통비도… 
1회당 5만원

마지막 촬영은 2018년 7월31일이었다. S양 어머니는 “촬영을 며칠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았다. 아이는 잘하고 있었는데…. 제작진에선 아이가 오래 일하기도 해서 교체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아이가 촬영은 힘들어했지만, 막상 끝난다고 하니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S양 출연을 두고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2018년 7월31일 마지막 촬영을 끝냈을 때도 S양 어머니는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회당 출연료는 5만원으로 책정됐는데,한참이 지나서야 일부분만 지급됐다.

S양의 새 소속사 B사 대표는 “7월 6회 차에 관해서 L사는 D사로 출연료를 입금했다고 말했고, D사는 L사로부터 입금된 돈이 없다고 하며 말이 서로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출연료 5만원으로 책정해서 6회 차는 30만원이다. L사는 D사로 송금했다고 하나 우리는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8월부터 11월까지 총 29회 차에 대한 출연료는 1년도 지난 2018년 12월3일 L사로부터 받았다. 2017년 12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총 48회 차에 대한 출연료는 같은 해 8월13일 B사가 L사로부터 받아 S양 어머니에게 지급했다. 


B사 대표는 “지난해 8월 S양이 프로그램서 퇴출당하고 난 후 출연료가 급하게 지급됐다. 그 이유는 타인이 항의하자 프로그램에 손상이 갈까 봐 지급한 것”이라며 “출연료 5만원은 근로 기준 시간을 초과한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S양 어머니는 2017년 7월 6회분인 출연료 30만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호소하고 있다.

S양 어머니는 “이러한 일들이 여기만 그런 게 아니고 비일비재하다. 이전 방송활동서도 출연료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이전 프로그램 작가한테 입금됐는지 물어보니 입금명세서까지 보여주며 확인시켜줬다. 당시 D사 대표에게 물어보니 출연료에 대해서 별말은 없고, ‘출연시켜줬는데 그 까짓 돈 얼마나 되느냐고 난리냐’ 이런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트라우마…못 먹는 음식은 ‘홍어’
출연료도…항의하자 뒤늦게 지급

D사 대표는 “우리도 억울하다. 우리가 2017년 S양을 케어 하는데 인건비, 교통비, 식사비, 헤어 메이크업 등 들어가는 돈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하는 돈을 새로운 소속사가 받아갔다. L사는 계약서를 우리랑 안 쓰고 B사와 쓴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우리도 피해자”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L사 대표는 “출연료 지급은 다 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근로기준법상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하루에 7시간, 1주일에 40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없다. 다만 사용자와 근로 청소년이 합의한 경우에는 하루에 1시간, 1주일에 6시간을 한도로 연장해 일할 수 있다.
 

해당법에 따르면 S양에 관해서는 근로기준법 위반의 여지가 있다. 현재 B사는 L사에게 S양을 비롯해 소속 아역 배우들의 미지급된 출연료를 요구하고 있다. 

해당 프로그램 PD는 B사 대표에게 S양의 촬영본을 보내 S양의 시선과 표현에 대해서 지적을 하기도 했다. PD는 S양이 방송본만 확인하다 보니 (문제점을)잘 모를 수 있다면서 촬영본을 전송했다. 

2017년 5월부터 S양과 함께 출연한 A양도 홍어에 관한 기억이 좋지 않다고 했다. 1년 후 A양이 SNS를 통해 “싫어하면서 못 먹는 음식이 홍어”라고 말한 것. 텐**는 S양과 A양이 홍어를 먹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애가 못 먹겠다고 먹기 싫다는 거 굳이 저렇게 먹이는 건 아동학대 아니냐?? 성인들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불호가 더 많은 음식인데”라는 댓글을 달았다. 

성인도 못먹는
음식을 강요?

권상집 동국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부 교수는 “방송업계서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그렇게 출연료와 처우에 대해 요구할 거면 하지 마’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이들, 솔직히 많다. 드라마가 생방송처럼 촬영되다 보니 근로계약서를 바탕으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스태프는 방송업계서 이른바 매장되기 쉽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연기학원의 사기

아역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이용해 금품을 가로채는 일이 기획사뿐 아니라 일부 연기학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를 이용해 돈을 갈취하는 드라마 제작 감독까지 있다. 아역 배우 지망생 부모들에 따르면 ‘꿈팔이’는 연기학원서 상습적으로 일어난다. 연기학원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학원이 폐업을 하면, 수업료를 돌려받지 못하기도 한다. 

한 웹드라마 제작사 A 감독이 꿈 팔이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아이가 오디션에 합격하려면 연기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며 아역 배우 부모들에게 25회에 300만원짜리 연기 수업을 제안했다. 수업은 5차례가량만 이뤄졌고 이후 그와의 연락은 끊겼다. 

“돈 주면 데뷔”

고소하겠다고 항의해 돈을 일부 돌려받은 부모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아이 앞가림에 방해가 될까봐 쉬쉬했다. 전국출연자노조에 따르면 피해자는 수십명이다.

피해 부모들에 따르면 A 감독은 출연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인당 3만∼4만원의 출연료를 지급한 사실도 있다. 일반적인 1회 보조출연료보다도 적은 금액이다.

A 감독은 지난 23일 출연자노조 측에 사실을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구>
 

<기사 속 기사> 보람튜브 아동학대 논란

최근 건물을 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화제가 된 ‘보람튜브’가 아동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2017년 보람튜브는 전기 모기채로 아이를 협박해 춤을 추게 하는 연출, 임신과 출산을 흉내 내게 한 연출, 아빠 지갑서 돈을 훔치는 상황 연출 등으로 그해 9월 국제구호개발단체 ‘세이브더칠드런’으로부터 몇몇 아동 채널 운영자와 함께 고발당한 바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해당 유아뿐만 아니라 영상의 주 시청자인 유아와 어린이들에게도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또 보람튜브는 과거 다소 과한 설정 때문에 일부 맘카페서 논란이 되거나 유튜브로부터 몇 차례 경고를 받기도 했다. 

재주는 아이가 돈은 부모가?

논란이 불거진 후 보람튜브는 사과했고 논란이 된 영상을 모두 비공개로 전환했다.

보람튜브 측은 “초창기 업로드 영상을 포함 일부 비판을 받았던 영상에 책임을 통감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아이를 키우는 부모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후 1년 이상 큰 논란이 될 만한 자극적인 콘텐츠는 제작되지 않았다. 현재 일부 부모들은 보람튜브가 대다수 ‘키즈 크리에이터’ 채널에 비해 유해한 것은 아니라고 평한다.  

과거 논란에 대해서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부모도 있다.

보람튜브를 향한 비난이 뜨거워지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난이 ‘질투’에 기인한 것이 아니냐”는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와 인기를 끌었다.

이번 비난이 일반인은 열심히 노력해도 평생 못 벌 돈을 한 달 만에 번 데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라는 이유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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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