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대선주자 7인 검증 ①출생(가정환경)

  • 이주현 jhjh1313@ilyosisa.co.kr
  • 등록 2012.06.07 1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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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환경은 다르지만 이제는 같은 대권주자!

[일요시사=이주현 기자]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대선 주자들이 치열한 대권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상대를 이겨야 웃을 수 있는 치열한 레이스에서 최후에 웃게 될 자는 누가 될 것인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요시사>는 여(박근혜·김문수·정몽준)·야(문재인·김두관·손학규) 6인과 비정치권 주자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유력 대선주자로 선정해 검증하기로 했다. 첫 번째로 출생과 가정환경을 살펴봤다.


각 주자별 사상과 정치 색깔이 다르듯 검증의 첫 번째 주제로 선정한 출생과 가정환경 또한 판이하게 달랐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부터 대통령의 딸까지 극명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마치 현재 보이고 있는 지지율 격차처럼 말이다.

자신이 살아오며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는 있지만 출생과 가정환경은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진리다. 따라서 현재 대중들에게 비쳐지는 모습은 자신이 개척해온 삶의 이미지지만 출생과 가정환경은 숨기고 왜곡하려해도 변할 수 없는 가장 순수하고 근본 된 본질이다.

이것이 대선주자들에게는 ‘스토리’로 활용 될 수도 있는 반면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대선주자 7인의 출생과 가정환경을 살펴보자.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범상치 않은 유년시절 보낸 박근혜
 
먼저 가장 높은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으며 새누리당의 유력대선 주자인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1952년 2월2일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삼덕동)에서 육군 정보학교장 박정희 대령(당시)과 부인 육영수의 딸로 태어났다.


육 여사에게는 첫 딸이었으나 박 전 대통령은 이혼경력과 전처의 자제가 있었으므로 박 전 대통령에게는 차녀였다. 형제자매로는 언니 박재옥과 동생 박근령(훗날 박서영으로 개명), 박지만씨가 있다.

박 전 위원장의 본관은 고령박씨로 신라 경명왕의 왕자군 중 한사람인 고령대군 박언성의 후손이다. 조선 후기의 소론 정치인이자 정조 때의 암행어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유명했던 어사 박문수는 그의 8대 방조였다.

그 후 그의 가문은 몰락했지만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과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해 육군대장에 이르렀다.

육 여사는 소학교 가정교과목 교사였는데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농토와 수많은 하인과 첩을 거느린 대지주 육종관씨의 외손자였다. 외할아버지는 박 전 대통령을 사위로 삼는 것을 반대했으나 외할머니 이경령과 육 여사가 박 전 대통령의 대구 관사로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 전 위원장이 태어났을 무렵 박 전 대통령은 겨우 여순 사건의 회오리를 벗어나 대구에 집을 마련한 상태였다. 이후 한국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와 가족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유년기를 보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후 프랑스에서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그해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귀국했다.

육 여사의 사후 박 전 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고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서거에 이어 아버지 또한 암살되었지만 박 전 위원장은 의연하게 대응했고 며칠 뒤 청와대를 떠나 동생들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이후 남동생인 박지만이 2002년까지 사창가와 여관 등에서 윤락녀와 어울리며 상습적인 마약 투약에 빠져 지낸 것 등으로 인하여 맏딸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노동운동으로 해고·고문·구속
입지전적인 인물 김문수

새누리당의 또 다른 대선주자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1951년 8월27일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서 평범한 가정의 4남3녀 중 여섯 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경북 영천초등학교 졸업 후 대구로 유학하여 경북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노동운동을 벌이다 제적됐다.

제적 뒤 고향에서 4H운동, 야학 등 농민운동을 했으며 전국금속노동조합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됐고 80년 광주항쟁의 여파로 회사는 노조해산 정책을 추진해 해고당했다. 이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해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체포, 연행돼 고문을 받기도 했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어 복직했고 여성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구로2공단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을 지낸 부인을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 후에도 노동운동을 계속해 나갔으며 노동운동가 전태일 기념 사업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1985년 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출범하자 그는 심상정(현 통합진보당 의원)과 함께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함께 서울 구로구 구로공단에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위장 취업노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노동계몽운동을 하던 고대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을 만나 그로부터 마산수출자유지역, 영등포공장 이야기 등 언론에 보도되지 않던 비화 등을 접하며 한국노동계의 현실을 체험하기도 했다.

1986년에 인천시 5·3직선제 개헌투쟁 주도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받고 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아 복역, 1988년 특별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복학해 입학 25년 만인 1994년 뒤늦게 졸업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 6남

보기 드문 엘리트 코스 밟은 정몽준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는 1951년 10월27일 부산에서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8남1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서울 장충동 집에서 삼촌과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 워낙 식구가 많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단체 생활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이 치워지고 없는 것이었다.

장충초등학교를 다닌 정 전 대표는 박근혜 전 위원장과 동기생이자 박 전 위원장의 동생 지만씨의 선배다. 1차 지망인 경기중학교 시험에 떨어져 당시 2차였던 중앙중에 입학했고 3학년 때 반장이 되자 부친인 정 회장이 시멘트 1만 포대를 기증했다.

그는 중앙고에 진학했으며 고교 시절부터 축구·농구·복싱·승마를 했다. 승마와 스키 실력은 대학시절 전국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을 정도다.

고2 때 그는 11일이나 결석했다. 사유는 ‘질병’으로 되어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복싱을 배운 그는 학교 유도부 선수와 싸워 두들겨 팬 적이 있다. 그 뒤 유도부의 보복이 두려워 병을 핑계로 1주일 이상 결석한 것이다.

그는 “이런 일에는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었고 결국 등교해 많이 얻어맞고서 매듭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진학한 그는 ROTC 학군단 13기로 병역을 이행했다.

병역을 마친 정 전 대표는 유학길에 올라 경영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정 전 의원은 유학을 생활을 통해 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세계의 리더인 미국과 일본을 이해하게 된 것을 최대 성과로 생각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유년시절
유치장서 사법시험 합격통지서 받은 문재인

야권의 유력대선주자 문재인 의원은 1952년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출신으로 지역 명문인 함흥농고를 졸업한 수재다.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 흥남철수 때 미군 군용함정에 몸을 실어 북한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피난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막노동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계란행상을 한 어머니의 걱정은 늘 끼니를 때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를 갔다.

태풍 때는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천장 아래서 울어야 했던 일화와 이른 새벽 암표장사를 해보려고 어린 문 의원을 데리고 영도에서 부산역까지 걸어갔지만 차마 아들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지 못하고 돌아오며 토마토 한 입으로 허기를 달랬던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문 의원은 “가난은 자신을 강하고 따뜻하게 키운 또 하나의 스승”으로 회고한다.

남항초등학교, 경남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후기로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 72학번으로 입학했다. 대학 재학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집회를 주도하다 구속되어 제적당했다.

강제 징집되어 특전 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수중폭파요원으로 활동했다. 복무 중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기도 했으며 표창도 수차례 받는 모범병사였다.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한 문 의원은 사시 22회에 합격하고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 의원은 과거의 구속 및 수감의 전력으로 그가 원하던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의 길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합격했지만 등록금 없어 대학 포기
형들의 도움으로 학업 마친 김두관

김두관 경남지사는 1959년 4월10일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마을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5남1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났다.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농민의 아들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더욱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며 가세는 더욱더 기울었고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감당했지만 집안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만 갔다. 운동화를 신어 보는 것이 어릴 적 소원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역사책과 위인전 읽기를 좋아했던 김 지사는 고등학교 때 관람 차 들른 <MBC장학퀴즈>에 현장 응모로 참가해 차석을 차지한 수재였다.

국민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에서 2년간 마늘 농사를 지었다. 학업의 뜻을 접지 못한 김 지사는 경상전문대학(현재 경북 전문대학) 행정학과 입학 후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했다.

그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 형들 덕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큰형은 서독의 광부로 갔고,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둘째형은 남해의 논밭을 지켰으며, 중학교를 나온 셋째형은 기술을 배워 이라크 노동자로 일했다. 형들이 보내준 돈으로 김 지사는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그는 고려대학교 운동권이었던 친동생의 영향으로 민통련 가입, 간사 활동 중 개헌추진본부 충북지구 결성대회 주도 혐의로 구속됐다.

3개월간의 감옥생활 중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귀향해 남해 농민회를 조직했고 아내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끝없는 사회운동과 오랜 수배기간

고문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손학규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교사인 아버지를 4살 되던 해 교통사고로 여의고 손 고문과 그의 형제들은 홀어머니를 모시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매동초등학교와 경기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생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한 손 고문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했다. 2학년 때에는 삼성그룹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다. 무기정학 중에 데모를 해서 또 무기정학을 받았다.

연이어 무기정학을 받은 손 고문은 강원도 함백탄광에 가서 광부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했다. 학교로 돌아온 손 고문은 전태일 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민주당 대표와 더불어 서울대 삼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손 고문은 육군 병장 만기 제대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고 소설가 황석영과 함께 구로공단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오랜 수배생활 도중 암으로 투병중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부음 소식을 접하게 됐다. 하지만 손 고문은 체포될 것을 알고도 주저 않고 어머니의 영정을 찾아 불효의 눈물을 흘렸다.

1979년 부마항쟁 진상 조사시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어 김해보안대에 수감. 48시간 취조 없이 구타로 사망 직전에 이르렀다가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되며 목숨을 건졌다.

'책벌레'의 평범했던 학창시절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 안철수

비정치권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1962년 2월26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동성초등학교, 부산중앙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학창 시절에는 반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고 운동 등 특별하게 잘하는 게 있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의 책을 대부분 다 읽을 만큼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 스스로 “활자 난독증이었던 것 같다”고 밝힐 정도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1등을 차지하고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학교를 졸업 한 그는 1990년에는 당시 최연소인 만 27세에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학과장을 역임했다.

의대 재학 중에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백신 프로그램인 V1, V2와 V3를 만들었다. 이후 7년간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백신을 무료로 제작·배포했다.

대학생 때 만난 부인은 1년 후배로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 처음에는 봉사 진료를 하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도서관에서 자리 잡아주는 사이로 지냈고 쉬는 시간에 커피도 마시면서 사랑을 키웠다.

두 사람은 생각과 가치관도 비슷했고, 같은 공부에 같은 의료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안 원장은 한 TV프로에서 군대에 갈 무렵 미켈란젤로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려 이에 대한 백신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해 군대 가는 날 까지 만들어 V3 최초 버전을 PC통신으로 전송하고 입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무반에서 다른 사람들이 입대 전날 가족들과 헤어진 얘기를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족들한테 군대 간다는 말을 안하고 나왔다”고 밝혔다.

안 원장의 아내가 “군대 가는 날 아침까지 백신 프로그램 업데이트하더니 허둥지둥 지하철 타고 서울역으로 달려가더라. 기차 태워 보내고 혼자 돌아오는데 무지 섭섭했다”고 밝힐 만큼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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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단독] ‘또다시 나타난 그때 그 사기꾼’ 케이삼흥은 왜 서울시 팔았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케이삼흥 사태가 대국민 사기극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가 최소 1000여명, 피해액은 수천억원에 이르는 등 실체가 드러날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무엇에 홀려 돈을 넣었을까? 무엇이 그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안겨줬을까? “징조도 없었어요. 2월까지는 돈이 잘 들어왔거든요. 3월25일하고 27일에 원금하고 배당금이 안 들어오면서 난리가 난 거죠.” <일요시사>와 연락이 닿은 한 케이삼흥 투자 피해자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 듯했다. 이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에게도 투자를 권유했다고 한다. 현재 원망 그 이상의 감정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2월까진 괜찮았다 최근 케이삼흥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2021년 설립된 부동산 투자플랫폼업체 케이삼흥은 월 최소 2% 수익을 보장하겠다며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연 단위로 따지면 24%의 고수익 투자상품인 셈이다. 피해자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의 말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케이삼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개발 예정인 토지를 매입한 뒤 개발사업이 확정되면 소유권을 넘겨 보상금을 받는 방식으로 수익을 만들 수 있다고 홍보했다. ‘토지 보상 투자’라는 용어가 나왔다. 직급에 따라 수익금을 차등 지급하는 다단계 방식으로 업체를 운영해 전형적인 ‘다단계금융 사기’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번 사태서 의문이 제기된 부분은 횡령 등의 혐의로 복역한 경험이 있는 김현재 케이삼흥 회장이 어떻게 또다시 수천명에 이르는 투자자를 끌어모았는지다.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의 창시자로 불린다. 토지를 싼 가격에 사들인 뒤 개발 호재 등이 있다고 소문내 이를 쪼개 파는 방식으로 사기를 저질렀다. 이 과정서 투자금 200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2006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20여년이 지난 2021년 김 회장은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서울 등 전국에 7개 지점을 둔 케이삼흥은 언론 광고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투자자를 모았다. 한 케이삼흥 직원에 따르면, 7개 지점서 일하는 직원은 300~350명가량이었다. 직원들은 이른바 가족·지인 영업을 통해 투자자를 모집했다. 월 2% 수익 약속에 수천명 투자 20년 전과 과정도 결과도 같다? 대부분의 직원은 중·장년층으로 인터넷 기사 등을 통해 공개된 김 회장의 과거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회장의 사기 전과를 알고 있던 피해자 역시 “원래 무죄였다”거나 전직 대통령을 거론하는 김 회장의 말솜씨에 넘어갔다고 한다. 훈장, 공적비, 기부 기사 등은 김 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따박따박 통장에 찍히는 배당금은 김 회장에 대한 신뢰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투자금의 1.5~2%에 이르는 배당금이 매달 입금되고 계약에 따라 만기가 되면 원금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예를 들어 1000만원을 투자하고 3개월 만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1060만원을 돌려받게 되는 셈이다.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파격적인 수준이었다. 김 회장은 본인의 사재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고 직원들에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투자자를 모집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김 회장은 자신의 재산이 1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수익이 나기 전까지 자신의 돈으로 원금과 배당금을 일부 주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원금과 배당금을 받은 대부분의 피해자는 더 많은 돈을 재투자했다. 피해액이 천문학적인 수준으로 불어난 이유다. 하지만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방식의 사업구조는 자금 순환이 막히면서 결국 무너져 버렸다. 피해자는 지난 2월까지 원금과 배당금을 정상적으로 받았기에 케이삼흥 사태를 예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중장년층↑ 하지만 경고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회계법인은 케이삼흥에 대해 ‘감사 의견 거절’을 냈다. 감사 의견 거절은 ▲감사인이 감사보고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 표명이 불가능할 때 ▲기업의 존립에 의문이 들 때 ▲감사인의 독립성 결여 등으로 회계 감사가 불가능한 상황에 제시한다. 기업 내부 사정이 심상찮다는 소리다. 케이삼흥의 경우 ‘회계연도의 현금흐름표 및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을 받지 못했다’가 감사 의견 거절의 근거가 됐다. 그럼에도 수많은 피해자는 김 회장을 철석같이 믿었다. 오히려 정관계 인사를 잘 안다는 김 회장의 말이 피해자의 투자심리를 부추겼다. 과거에도 김 회장은 기획부동산 사기로 검찰 조사를 받던 시기에 정관계 로비 의혹을 받은 바 있다. 당시 김 회장이 횡령한 돈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정치권 등의 유력인사를 언급해 투자자의 믿음을 사는 김 회장의 수법은 이번 케이삼흥 사태서도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한 피해자는 “(김 회장이)정치인 인맥이 많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통로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에 비해 정보에 어두운 중‧장년층은 김 회장이 주장하는 인맥에 신뢰를 보냈다. 사기 전과 있는데도…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과의 친분도 주장했다. 강연 과정서 서울시 고위공무원의 직책을 언급하면서 그를 통해 협조 약속을 받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서 토지나 주택 등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이름도 등장한다. 투자자에게 수익금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김 회장은 “작년에는 부동산 경기 자체가 불투명하니까 1년 동안 거의 안했어요. 착공 들어가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보상 업무잖아요. 올해 작년 것까지 합쳐서 하고 있어요. 사업계획 세워놓은 것은 차질이 없다고 하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공기관,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을 말하면서 “(서울시 고위공무원 직책이)그걸 관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은 서울시서 주택, 재난안전 등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김 회장은 “(서울시 고위공무원을)만나서 사업이 진행되면 케이삼흥 것을 우선적으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다. 토지 보상을 하는 과정서 케이삼흥에 우선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주진입도로’ 등을 언급하면서 “2단계든, 3단계든 관계없이 케이삼흥 것을 먼저 협조해주겠다고 그 약속까지 제가 다 받아냈으니까. 하반기에 보상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강연에 참석한 투자자들은 중간중간 호응하다가 김 회장의 말이 끝나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정치인 인맥·훈장 자랑 당사자는 “처음 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일요시사>에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회장이 언급한 직책의 인물은 지난 8일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김현재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고 전했다. 케이삼흥이라는 회사명도 이날 처음 들었다고 주장했다. 김 회장과는 사적 친분은 물론이고 전혀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현재 케이삼흥 사태는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서 수사하고 있다. 김 회장 등 케이삼흥 경영진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과 유사수신행위 규제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는다.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와 피해액은 최소 규모로 시간이 가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직원으로 불린 모집책이 가족이나 지인 등을 상대로 투자를 권유한 경우가 많아 가정이 파탄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가족의 병원비 등을 투자금으로 넣은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수사기관에 고소하거나 집회를 준비하는 등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빠른 수사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자가 받는 정신적 고통이 커지기 때문이다. 실제 케이삼흥 사태와 같은 대형 사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거나 투자를 권유한 사람에게 독촉을 받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빠른 수사 피해 복구는? 한 피해자는 “가족과 지인 돈까지 다 끌어모아서 투자했다. 원금만이라도 제발 돌려받고 싶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직원이면서 동시에 투자자인 이 피해자는 5억원 이상을 투자금으로 넣었다고 고백했다. 김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문자메시지, 전화 등을 통해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