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사’로 묻힐 뻔한 ‘산낙지 의문사’의 진실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2.04.10 12: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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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새 애인과 외제차 타고 나타난, 그놈이 결국…

[일요시사=김설아 기자] 2년 전 인천에서 20대 여성이 낙지를 먹다 질식한 것으로 사고사(死) 처리된 일명 ‘산낙지 질식사’ 사건. 그런데 사건 발생 2년 만에 범인은 ‘산낙지’가 아닌 ‘남자친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최근 ‘사망보험금을 노린 살인죄’로 이 여성의 남자친구를 구속했다. 낙지가 목에 걸려 죽었다는 의문 가득한 죽음을 맞이한 딸과 보험금을 둘러싼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내려는 아버지. 스물두 살 젊은 여성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그 의문점을 추적해봤다.

2010년 4월 19일 새벽, 술에 취한 딸 윤혜원(당시 22세)씨와 그녀의 남자친구 김모(당시 30세)씨는 횟집에 들러 낙지를 샀다. 2만원어치는 잘게 썰었고 두 마리는 통째로 구매했다. 이들이 통째로 가져간 낙지는 연포탕 등에 쓰이는 낙지로 일반적으로 절단을 해 가져가지 통째로 가져가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큰 낙지였다. 낙지를 산 둘은 횟집 인근 모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1시간 뒤 다급한 목소리로 모텔 카운터에 전화가 왔다.

“낙지 먹다가
내 딸이 죽었다?”

다짜고짜 119를 불러달라는 전화였다. 이에 모텔주인은 전화가 온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을 확인해 보니 사망한 윤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병원으로 곧바로 후송됐지만 결국 낙지로 인한 기도 폐쇄로 뇌사상태에 빠졌고, 16일 후인 2010년 5월 5일 결국 숨을 거뒀다.

갓 스물두 살, 윤씨는 사회초년생이었다. “다툰 남자친구와 화해할지 모른다”며 나갔던 딸은 그렇게 집을 나선지 1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사건은 단순 변사사건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딸의 죽음은 억울하다”는 아버지의 고발로 1년 만에 재조명됐다. 그의 아버지는 딸의 죽음이 단순 사고사가 아닌 남자친구 김씨에 의한 ‘계획된 살인’이라고 주장했고,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세간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보도를 접한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는 까닭은 하나. 아버지의 주장대로 이 죽음은 남자친구의 계획살인 정황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남자친구 김씨가 유가족 모르게, 또 보험사와 충돌하지 않고 보험금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 정황들이 포착된 것이다.

“딸의 죽음은 억울하다”는 아버지의 고발로 1년 만에 재조명
딸의 남자친구를 둘러싼 보험 관련 의문들…‘계획살인’의 정황까지

윤씨의 부모는 중환자실, 목숨이 바람 앞 등불 같던 딸 옆에서 남자친구 김씨로부터 처음 딸의 보험에 관련된 얘기를 들었다.

윤씨의 어머니에 따르면 “딸이 죽기 3일 전, 걔(남자친구)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보험 얘기를 꺼냈다. 몰랐는데 보험설계사인 자기 고모한테 혜원이가 실비보험을 들어놨더라고 하더라.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정신이 없어 그때는 흘려들었다”는 것이다.

또 김씨는 “혹시라도 혜원이가 잘못되면 입원비로 5천만 원이 나오니 나중에 입원비에 보태 쓰시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윤씨가 가입했다는 그 보험은 실비보험이 아닌 생명보험이었다. 또 보험 가입을 권유한 이는 김씨의 고모가 아닌 김씨였으며, 보험금 역시 5000만 원이 아닌 2억 원이었다.

당시에는 딸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 보험 이야기는 그냥 흘려듣기만 했다는 유족들은 “(김씨가) 식물인간 상태인 딸과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미 한 달 전에, 자기를 배우자로 올려서 혜원이 사망보험금을 받게 손을 써놓았다”고 증언했다.

남자친구의 거짓말과
수상한 행적들


이상한 건 보험금뿐만이 아니다. 특히 이 죽음에 결정적 사망 동기로 등장한 ‘산낙지’에 강한 의구심이 든다.
윤씨는 치아가 모두 썩어 저작 능력이 매우 부실한 상태였다. 그런 윤씨가 대형 낙지를, 그것도 산 채로 먹다가 목에 걸려 질식했다는 것이다.

윤씨의 아버지는 “딸이 이가 평소에도 좋지 않아 낙지 같은 것은 먹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말했고, 사건당일 낙지를 판매한 상인의 말에 따르면 ‘그런 (큰)낙지를 산 채 먹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사건당일 등장한 낙지는 죽으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아니 죽으려고 해도 먹기 힘든 사이즈였다.

남자친구 김씨의 거짓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에게 보험 가입을 권유하기 전부터 딸의 사망보험금을 수령할 때까지 이어진 김씨의 거짓말과 수상한 행적들은 이렇다.

그동안 김씨는 사시공부를 한다며 윤씨에게 1000만 원이 넘는 돈을 갖다 썼다. 둘은 평소에도 자주 다퉜고, 사건 직전에도 윤씨는 부모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건 당일 1주일간 연락이 없던 김씨의 ‘잘해보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 것이다.

또 김씨의 전직은 보험설계사였다. 월급여 120만원인 윤씨는 월 보험료 13만 원짜리 사망보험을 들 여유가 없었음에도 김씨는 윤씨에게 “보험금 13만원을 매달 대신 내주겠다”며 안심시키고 사망보험에 가입시켰다.

사건 발생 후 김씨는 주변사람들에 자수성가한 돈 많은 사람의 이미지로 숨져가는 윤씨를 미국이라도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을 정도로 살가웠다고 했다. 하지만 딸 사망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며 어이없어 했다.

윤씨의 부모는 “딸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 딸을 어떤 경우에라도 책임질 것처럼 말해 우리 부부를 안심시켜놓고 그사이 보험금을 전액 상속받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윤씨가 뇌사상태로 누워있던 날 누군가가 보험료를 납입한 흔적까지 발견됐다. 특히 윤씨의 통장에는 잔액이 없어 자동이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확인 결과, 입금자는 박모씨로 김씨 고모의 딸이었다. 김씨가 윤씨의 보험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모 딸을 동원해 돈을 납입했던 것이다.

윤씨가 사망한 후에도 김씨의 행적은 수상했다. 김씨는 윤씨의 영정 앞에서 유가족들에게 “아버지가 십정동에 땅과 건물 1만평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 홈플러스가 들어선다. 그래서 3억 원에 철거업체를 입찰했는데 깡패들이 매일 찾아와 자기들에게 철거를 넘기라고 해 고민이다”며 사망보험금 수령을 감추기 위해 자신이 부유한 사실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이 후 윤씨의 부모가 찾아가보니 김씨 가족은 반지하 월셋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2억 원의 보험금 빼돌린 후 잠적한 남자친구, “나는 죽이지 않았다”
2년 만에 드러난 보험금 노린 사기극…숨은 진실까지 모두 밝혀내야

김씨는 또 한때 연인이었던 윤씨의 사망 후에도 슬픔이나 죄책감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했다. 윤씨가 죽은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김씨가 새 여자친구를 데리고 유흥업소에 온 것을 목격한 윤씨 친구들의 증언, 김씨가 외제차를 사서 새 여자친구를 태우고 다니는 것을 목격한 지인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그러나 남자친구인 김씨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 김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윤씨가 질식사한 경위에 대해 “여자친구가 무언가 먹는 걸 봤다. ‘컥’ 하는 소리가 나 등을 두들겨주고 목에 걸려 있는 것을 뺐다. 그게 (낙지의) 몸통인지 다리인지 확인할 경황은 없었다”며 혐의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보험 가입 경위에 대해 김씨는 “보험설계사인 고모의 실적을 높여 주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또 보험 수익자가 윤씨의 직계가족에서 김씨로 바뀐 것에 대해서는 “윤씨가 ‘보험금이 부모에게 가는 게 싫다’며 내가 수익자가 되길 원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검찰은 문서 정밀감정과 최면수사 등 과학수사 기법을 통해 김씨가 보험금 수익자변경신청서를 위조한 사실을 밝혀냈고, 사건발생 2년 후에야 김씨를 ‘사망보험금을 노린 살인죄’로 구속했다.

곳곳에 드러난 ‘계획살인’
보험금 노린 타살?

검찰에 따르면 “김씨는 윤씨가 작성한 ‘사망 시 보험 수익자’를 법정상속인에서 자신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수익자변경신청서를 위조해 보험사에 제출했고, 질식사 시킨 도구는 산낙지가 아닌 김씨가 윤씨의 코와 입을 막아 질식으로 인한 혼수상태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구속 수감 중인 김씨는 아직도 범행을 강경하게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김씨를 범인이라고 확정할 수 없고, 앞으로 긴 재판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려는 아버지의 절규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단순사고사로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음 후에도 가족들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은 단 하나. 진실을 파헤치는 것 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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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