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태극호 선장’ 최강희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 정혜경 jhk@ilyosisa.co.kr
  • 등록 2012.03.06 15: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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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모래바람 잠재우고 월드컵으로 강슛~골인~!!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최강희호’가 중동의 모래바람을 잠재우고 첫 번째 임무를 완수했다. 우리 축구대표팀이 지난달 29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쿠웨이트와의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이끈 것. 이로써 한국은 최종예선 티켓을 거머쥐게 됐다. 이번 승리의 주역은 지난해 12월 태극호의 키를 쥔 최강희 감독이다. 그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돼 있었음에도 대표팀 감독이라는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마신 인물이다. 대표팀 감독 자리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최 감독.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소싯적 축구보다 노는 것 좋아해…술?담배도
외동딸 태어나면서 담배 끊고 축구에만 전념

최강희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은 28세의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요즘 선수들이 일찌감치 A대표 선수가 되는 것과는 달리 늦게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생 시절까지 최 감독은 축구 보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일찍부터 술과 흡연을 했다. 축구하는 친구들과 운동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당구 치는 낙에 살았다. 그러다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어렵게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대학 진학 실패
한일은행 입단

그후 아버지(2006년 작고)의 도움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충의(군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축구를 그만둘 수도 있었지만 어렵게 선수의 길을 이어갔다. 이후 한일은행과 포항을 거쳐 1984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이 생기면서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최 감독은 이때까지도 담배를 피웠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이 현대 구단 감독으로 있었을 때 현대 주장이 됐다. 하루는 팀 동료들과 당구장에서 담배를 물고 당구를 치다 조 감독에게 현장에서 발각됐다. 당시 조 감독은 최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에게 벌금을 물렸다가 시즌이 끝나고 돈을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최 감독이 담배를 끊고 축구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기 시작한 건 1987년의 일이다. 결혼을 하고 외동딸(혜린)이 태어나면서 축구에 몰두했다. 축구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잠자리에 들 때도 볼을 놓지 않았다. 열정과 황소고집으로 정도를 걸었다. 그 끝에 최 감독은 1985년, 86년, 88년 K-리그 베스트11 수비수상을 받았다.


그리고 최 감독은 담배를 끊은 지 1년 만에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다부지게 볼을 찼다. 주로 풀백을 봤다. 정신을 차린 이후로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남달랐다. 그라운드에서 한 발 더 뛰기 위해 희생했다. 그러나 최 감독이 선수로 태극마크를 단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최 감독은 1992년말 33세의 나이로 현대에서 은퇴했다. 당시 차범근 현대 감독과의 불화로 동계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91년 정점을 찍었던 경기력은 바로 다음해 급락, 선수 유니폼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1991년말에는 연봉 협상 문제로 팀훈련 합류를 거부했다. 당시 김호 대표팀 감독은 계속 선수 생활을 하라고 당부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본선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하지만 몸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나빠졌고 결국 은퇴를 했다.

그런 최 감독이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된 것은 10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원 삼성 코치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던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대표팀 코치가 됐다. 이어 2003년 코엘류 A대표팀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발탁됐다. 당시 수석코치는 박성화, GK코치는 박영수였다.

최 감독은 대표팀 코치 시절 코엘류 감독에게 입바른 소리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축구 사정을 잘 모르는 코엘류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힘들어 질 수 있다는 식으로 조언을 많이 했다. 코엘류 감독은 최 감독이 해주는 얘기를 싫은 내색 않고 받아주었다. 조언을 전부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들어주었다. 그러나 코엘류 감독은 2004년 4월, 1년 2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그러면서 최 감독의 코치 생활도 단명으로 끝났다.

그로부터 다시 7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해 12월 21일, 최 감독은 모든 축구 지도자들의 염원인 태극호의 선장이 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보면 이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축구협회가 그해 12월 말 조광래 감독을 경질하면서 제대로 절차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밝혀지자 여론이 들끓었다. 협회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성난 여론을 달랠 수 있는 카드는 전북에서 ‘닥공(닥치고 공격·셧업 앤 어택·Shut Up And Attack)’ 신드롬을 일으킨 최 감독뿐이었다. 축구 인들은 “최강희 밖에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그가 수락하지 않을 것으로 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최 감독은 전북에서 장기계약 제안을 받으며 클럽 감독으로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장밋빛 미래가 보장돼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국가대표팀 감독
독 든 성배 마셔


만일 쿠웨이트에 져서 최종예선에 오르지 못하면 그것으로 축구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최 감독은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마셨다. 감독 수락을 결정한 날, 그는 하얗게 밤을 샜다. ‘내가 왜 이걸 맡는다고 했을까’ 번민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머리가 맑아졌다. 운명을 받아들이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최강희호는 지난달 18일 전남 영암에서 출항했다. 여유가 넘쳤다. 쿠웨이트를 충분히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최 감독은 아시아 축구에 잔뼈가 굵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수차례 부딪혔다. 2006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다. 지난해에는 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비록 우승컵을 품에 안지 못했지만 더 큰 영광을 누렸다. 자신의 히트상품인 ‘닥공’이 아시아축구연맹(AFC)에서 모범사례로 소개된 것.

28살에 태극마크 달았지만 33살에 선수은퇴
결국 쿠웨이트 꺾고 최종 예선 티켓 거머쥐어

최 감독은 취임 이후 줄곧 쿠웨이트전 승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최 감독은 “대표팀의 색깔이나 스타일에 대해서는 언급할 단계가 아니다. 당장은 쿠웨이트전만 생각하겠다”며 “쿠웨이트전을 잘 치르면 시간도 있고 선수들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큰 틀은 그 이후에 말씀드리겠다”고 공언해 왔다.

‘벼랑 끝 승부’에 나선 최 감독은 경험 많은 베테랑과 그동안 대표팀 명단에서 소외됐던 K리거들을 불러 모아 결전을 준비했다. 백전노장 김상식(전북)을 비롯해 태극마크와 유독 인연이 없었던 이동국(전북)이 감독의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김두현(경찰청)과 김치우(상무) 등 한동안 잊힌 이름들도 기회를 잡았다.

경기전 최 감독의 각오는 비장했다. 패하지만 않아도 최소 조 2위를 확보,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비긴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뚜껑을 연 결과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후반초까지 쿠웨이트가 한국을 압도했다. 경기가 풀리지 않자 최 감독은 기성용을 투입했고 이후 한국은 조금씩 경기 주도권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후반 20분에는 한상운 대신 김신욱을 투입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리고 후반 21분, 한국은 마침내 쿠웨이트의 골문을 열어젖혔다. 이동국이 오른쪽 측면으로 침투하는 이근호에게 공을 내줬고 2대1 패스를 받은 이동국은 바로 왼발 슈팅으로 연결, 쿠웨이트의 골망을 흔들었다.

경기 주도권을 가져온 한국은 이후 파상공세를 펼치며 5분 후에 추가 골을 얻어냈다. 후반 26분 박주영에게서 시작된 패스가 이근호까지 연결됐고 이근호가 페널티에어리어 내 오른쪽 지점에서 침착한 오른발 슈팅으로 골망을 갈랐다.

두 골을 허용한 쿠웨이트는 역습에 나섰지만 기세가 오른 한국의 수비벽을 뚫지 못하고 만회골을 만드는데 실패해 예선 탈락했다. 이에 따라 한국팀은 승점 13점(4승1무1패)을 올려 B조 1위로 오는 6월 열리는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 감독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한 셈이었다.

경기를 마친 최 감독은 “경기 초반에 기싸움을 통해 주도권을 잡아가자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60분이 넘어 상대가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 우리의 능력을 믿자고 했고 이후 득점이 이뤄져 승리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앞길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 감독은 “많이 험난할 것 같다. 열흘이라는 시간을 가졌는데도 선수들이 훈련한대로, 의도한대로 플레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훈련할 시간이 많지 않아 고민해야 할 것 같다”며 “이번 경기의 경우 시즌을 시작하는 오픈경기라 어려움이 있었다. 시즌 중에 경기가 열리면 경기 감각이나 선수들을 살피고 뽑을 수 있다.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며칠 만에 전력을 극대화 시켜야 되기 때문에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위기에 몰린 한국축구를 이끌고 첫 번째 고비를 넘긴 최 감독은 이제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두 번째 과제를 앞둔 그의 각오는 좀 더 결연하다. 최 감독은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신이 이끌던 소속팀 전북을 떠나면서 “2013년 6월까지만 대표팀을 맡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시한부 감독을 자청하며 사실상 최종예선에 ‘올인’한 셈이다.

최 감독은 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누구나 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문을 열어 놓고 앞으로 다양한 각도로 대표팀을 운영하겠다”라고 각오를 밝혔다. 마음의 부담을 덜고 본격적으로 대표팀에 자신의 축구 철학을 접목시킬 최 감독의 다음 행보가 주목된다.


“다양한 각도로
대표팀 운영할 것”

한편,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은 다음달 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리는 조 추첨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막을 올린다. 한국을 비롯해 호주, 일본, 이라크 등 10개 나라가 아시아에 배정된 4.5장의 티켓을 놓고 2개조로 나눠 격돌한다. 각조 1,2위 팀은 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고 3위 팀끼리 맞대결을 펼쳐 이긴 팀이 남미 예선 5위와 최종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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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단독]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총책 탈옥한 ‘김미영 팀장’ 포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성민 기자 =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최근 행적이 확인됐다. 지난해 탈옥에 성공한 이후 1년여 만이다. 박씨와 함께 탈옥에 성공했던 인물은 총 3명이다. 이들은 올해 초까지 말레이시아로 여러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박씨는 최근 필리핀 카비테 부근 한 시골 마을로 주거지를 옮겼다. <일요시사>는 지난해 초부터 보이스피싱 총책 김미영 팀장 박정훈씨의 탈옥 가능성을 제기했다. 외교·수사당국은 현지 담당자가 철저하게 관리 중이라며 ‘소극 행정’으로 대처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 꼴이다. 1년이 지난 현재, 박씨는 필리핀 서부 지역 한 시골 마을에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못 잡나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박씨는 필리핀 카마린스 수르 교도소에서 탈옥한 이후 올해 초까지 총 세 차례 이상 말레이시아 사바주로 밀항을 시도했다. 이들이 밀항을 시도한 곳은 필리핀 남서부 잠비앙가와 민다나오 다바오 시티다. 잠비앙가의 경우 여행경보 4단계인 흑색 경보(여행금지) 발령 지역이다. 외교부의 예외적 여권 사용 허가 없이 흑색 경보 지역을 방문·체류하는 경우, 여권법 제26조 등 관련 규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잠비앙가는 우리나라 국민이 여행할 수 없는 곳인 셈이다. 박씨와 송모씨 등 ‘탈옥 멤버’들은 다바오 시티에서 두 차례 밀항을 시도했으나 실패해 잠비앙가로 이동했다. 잠비앙가에서 술루 제도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술루 제도로 이동하던 박씨 일당들은 필리핀 반군에 억류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박씨가 밀항을 시도한 잠비앙가를 비롯해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는 이슬람 반군들이 주둔해 있다. 지난해 10월 말에도 무력 충돌이 발생해 최소 14명이 사망했다. 당시 민다나오 마긴다나오델수르주의 파갈룽간시에서 필리핀 최대 반군단체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의 두 지휘관과 수하 병력이 총기와 흉기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70년대부터 분리주의 무장투쟁을 벌여온 MILF는 2014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를 통해 정부가 민다나오섬에 설치한 이슬람 임시 자치정부인 ‘방사모로 과도당국(BTA)’과 ‘방사모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지역(BARMM)’ 구성에 참여했다. 잠비앙가·민다나오서 ‘뒷돈 도주’ 시도 이슬람 반군에 억류 후 풀려나 마닐라로 MILF는 2019년 9월부터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무기 반납을 시작했지만, 무장 해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여전히 총기를 보유한 MILF 병력은 수천 명 이상이다. 박씨는 반군들에게 마약 및 보이스피싱으로 벌어들인 돈 수천만원을 뇌물로 전달한 이후 풀려났다. 지난 5월 초 박씨는 송씨와 헤어진 후 필리핀 루손섬 카비테주 카비테 시티로 이동했다. 지난달 말에는 카비테 시티 외곽 한 시골 마을에 자신의 현지 부인인 A씨까지 불러 정착을 시도한 것으로 파악됐다. A씨는 그간 마닐라 타기그에서도 부촌으로 꼽히는 보니파시오 글로벌 시티에 거주했다. 현지인들은 보니파시오를 BGC 또는 글로벌 시티로 부른다. 필리핀의 청담동으로 불릴 만큼 고층 빌딩, 고급 주거지, 쇼핑 거리 등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보니파시오의 경우 냉장고와 에어컨 정도만 구비돼있는 콘도 한 유닛의 월세가 필리핀 돈으로 13만~15만페소(약 304만~351만원)에 달한다. 필리핀은 주차장도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차장을 포함하면 월세도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 더 늘어나게 된다. 같은 도시에 위치한 원룸 형식의 콘도 월세도 5만5000페소(약 128만원)에 달한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경찰도 관련 첩보를 파악해 현지 수사당국과 공조 중이다. 아직 정확한 집 주소나 확실한 거주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박씨는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출신의 전직 경찰이다. 2008년 수뢰 혐의로 해임된 그는 경찰 조직을 떠난 뒤 2011년부터 10년 넘게 보이스피싱계의 정점으로 군림해 왔다. 수억 비트코인에 차명 주택 부동산 소유 현지 부인이 조력해 “지속적 현금 조달” 특히, 조직원들에게 은행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로 구성된 대본을 작성하게 할 정도로 치밀했다. 경찰 출신인 만큼, 관련 범죄에선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필리핀을 거점으로 지난 2012년 콜센터를 개설해 수백억원을 편취했다. 10년 가까이 지속된 그의 범죄는 2021년 10월4일에 끝이 났다. 국정원은 수년간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 필리핀 현지에 파견된 경찰에게 “박씨가 마닐라에서 400km 떨어진 시골 마을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넘겼다. 검거 당시 박씨의 경호원은 모두 17명으로 총기가 허용되는 필리핀의 특성상 대부분 중무장했다. 박씨가 위치한 곳까지 접근한 필리핀 이민국 수사관과 현지 경찰 특공대도 무장 경호원들에 맞서 중무장하고 있었다. 2023년 초까지만 해도 박씨가 곧 송환될 것이라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일부러 고소당하는 등의 방법으로 여죄를 만들어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으려 범죄를 계획했다. 국내 정보기관은 박씨 일당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2023년 12월과 지난해 3월 두 차례에 걸쳐 필리핀 교정당국에 박씨의 탈옥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다. 박씨가 탈옥한 것을 두고 필리핀 교정당국은 해당 교도소에 CCTV가 설치돼있지 않아 탈옥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일부 훼손된 철조망을 찾아냈다고 한국 정부에 설명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외교부와 경찰, 법무부 국제형사과 등이 일부 파견을 가 현지에서 한국 범죄자들을 관리하는데, 공문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범죄자와 면담을 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그저 공문만 보내는 것으로는 범죄자들의 탈옥을 막을 수 없다. 당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안 잡나 박씨는 A씨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교도소의 취약점을 파악해 탈옥을 계획했다. 사전에 철저히 ‘탈옥 계획’을 구상하고 보안이 허술한 교도소에 잡혔단 뜻이다. 말레이시아로의 밀항 준비도 A씨가 현금 조달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A씨는 박씨가 교도소에서부터 환전한 수억원 이상의 비트코인을 관리해 왔다. 박씨와 같은 교도소에 있었던 한 제보자는 “환전한 비트코인 외에도 A씨가 박씨의 차명 소유 자택 부동산 등 수십억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hounder@ilyosisa.co.kr>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