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터지는’ 외교관 성추문 백태

국가 대표로 국가 망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외무공무원의 성 비위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외교부장관이 나서 무관용 원칙을 말해도, 처벌 수위를 높혀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온다. 해외서 국가 이미지 제고에 힘써야 할 외교관들이 성 관련 사건에 휘말리면서 ‘나라 망신’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지난 1월 미투 운동으로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국내 미투 운동의 시초로 알려진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법조계서도 성범죄 사건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문화·예술계, 방송계, 종교계도 미투 운동서 자유롭지 못했다. 최근에는 교사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는 ‘스쿨 미투’ 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외교부도
성비위 발칵

국내 미투 운동은 ‘설마 검사가 피해자일까?’ ‘설마 선생님이 학생들을?’이라는 의심을 걷어내는 데 일조했다. 누구나 가해자일 수 있고, 누구나 피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미투 운동으로 민낯이 드러난 각계각층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엄중한 처벌 혹은 징계,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앞다퉈 내놨다.

문제는 이 같은 사후대책에도 불구하고 성 비위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데 있다. 외무공무원들의 연이은 성 비위 사건이 대표적이다. 

앞서 한 외교관의 성 비위 사건으로 처벌 수위가 강화됐고 장관이 무관용 원칙을 천명했지만 근절은 요원한 상태다. 더군다나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외국서 국가 이미지에 신경 써야 할 외무공무원인 점이 더 큰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외교부 산하 해외공관서 외무공무원 2명이 성 비위 문제를 일으켜 귀국 조치된 사실이 확인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박병석 의원이 지난 3일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7월 이들은 부하직원을 성추행, 성희롱한 혐의로 적발됐다.

해외 공관서 여직원 성추행
무관용 원칙에도 계속 표출

박 의원실에 따르면 파키스탄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 중인 고위 외교관 A씨는 여성 행정직원 B씨를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B씨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 와인을 마신 뒤 피해자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히는 등의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B씨에게 자신의 집에 과일이 많으니 나눠주겠다고 부른 것으로 파악됐다. B씨는 사건 발생 다음날 대사관 동료에게 얘기했고, 사건담당 영사가 피해자와 면담 후 외교 본부에 보고했다. 

당시 A씨의 부인은 한국으로 가서 집에 없던 상황이다.

같은 달 인도 대사관서도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인도 대사관에 파견 나간 4급 공무원이 동료직원에게 “자신이 머무는 호텔서 술을 마시자” “방 열쇠를 줄 테니 오라” 등 부적절한 언행을 반복한 사실이 드러났다. 
 

동료 직원이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해당 공무원의 언행은 계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로 소환 조치된 이들은 대기발령 상태서 징계위원회를 앞두고 있다.


재발 방지
다짐했지만…

지난해 7월에는 주 에티오피아 대사관서 근무하는 간부급 외교관 C씨가 여성 행정직원 D씨를 성폭행했다는 제보가 접수돼 외교부서 조사에 돌입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의 진술에 따르면 C씨는 사건 당일 D씨와 와인 3병을 곁들여 저녁을 먹은 뒤, 만취해 의식을 잃은 D씨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이튿날 새벽 깨어난 D씨는 상담기관의 조언에 따라 병원 진단서를 받은 뒤 모친을 통해 외교부 영사콜센터에 피해사실을 신고했다. C씨와 D씨는 사건 이후 귀국해 외교부 감사관실 등에서 조사를 받았다. 

C씨와 D씨는 조사에서 진술이 엇갈렸지만 외교부는 조사를 거쳐 C씨를 검찰에 고발했고, 징계위원회서 파면을 결정했다.

당시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서 해당 의혹에 대해 사과하고 “해외근무 외교관에 대한 복무 감찰의 획기적인 강화를 위해 감사관실 내 감찰담당관실 신설 등을 적극 검토하는 한편, 외교부 혁신 태스크포스를 중심으로 조직·인사의 강도 높은 혁신을 통해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강 장관 역시 “신정부 출범을 계기로 외교부가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혁신을 추진하는 과정서 이렇게 심각한 재외공관의 복무기강 문제가 발생하게 돼 정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미 전 재외공관장에 대해 엄중한 복무 기강 지침을 하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성 비위’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용 원칙 그리고 관련 규정 법령에 따라 엄중 조치할 것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외교부서 해당 의혹을 조사하는 과정서 또 다른 성추문이 불거지기도 했다. 피해자가 조사를 받는 과정서 김○○ 전 에티오피아 주재 대사도 성추행을 했다고 진술한 것. 

김 전 대사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외교부가 에티오피아 현지에 특별감사단을 파견해 조사하던 중 그의 추가 혐의를 잡아냈다. 결국 외교부는 지난해 8월, 김 전 대사를 성범죄 혐의로 검찰에 형사고발했다.

김 전 대사는 에티오피아 대사로 재직한 2015년 3월 대사 직위를 이용해 여성 1명과 성관계를 맺고 2014년 11월과 지난해 5월 각기 다른 여성 2명을 각각 성추행한 혐의를 받았다. C씨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한 D씨는 조사 과정서 ‘김 전 대사에게도 기분 좋지 않을 정도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당했다’고 외교부에 알렸다. 
 

이후 교민사회서도 김 전 대사가 현지에 파견된 외교부 산하 단체 직원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부적절했다는 등의 제보가 잇따랐다.

김 전 대사는 지난달 12일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박주영 판사는 김 전 대사에 징역 1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재판부는 “김 전 대사는 대한민국 위상을 드높일 책임이 있는 지위에 있었음에도 오히려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지휘·감독 관계에 있는 피해자를 추행하고 간음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 전 대사는 별다른 죄의식 없이 비교적 대담하게 성폭력 행위에 이르렀다”며 “간음에까지 나아간 점을 보면 죄질이 불량하고 죄책이 무겁다”고 덧붙였다.

실형 선고
법정 구속

앞서 2016년에는 칠레 주재 공관서 일하는 외교관이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실이 현지 방송을 통해 드러나 충격을 안겼다. 

2016년 12월18일 SNS를 통해 공개된 영상은 칠레의 한 방송사가 함정 취재를 통해 포착한 내용으로, 한국의 박○○ 참사관이 미성년자에게 성적인 표현을 하며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하려는 모습은 물론 원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미성년자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집안에 끌어들이는 장면 등이 실렸다.

심지어 해당 방송 관계자가 함정 취재를 통해 성추행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리자 박 전 참사관이 ‘제발 부탁한다’며 사정하는 모습까지 담겼다. 이 영상은 첫 피해 여학생의 제보를 받은 현지 방송사가 다른 미성년 여학생에게 의뢰해 박 전 참사관에게 접근시켜 함정 취재를 벌이는 과정서 포착됐다.

박 전 참사관은 현지 미성년자 여학생에게 휴대전화로 음란한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혐의도 받았다. 영상이 공개된 이후 문제의 외교관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나라 망신’이라는 비판부터 칠레 교민 사회에 끼칠 악영향까지 부정적인 반응이 폭발했다.


교민사회에도 부작용
징계 절반이 성 문제

외교부는 즉각 박 전 참사관을 국내로 소환했고 징계위원회를 열어 파면을 의결하는 한편, 검찰에 형사고발 조치했다. 1심서 박 전 참사관은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됐다. 광주지법 형사11부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박 전 참사관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성추행 횟수가 4차례에 이르고 피해자와 합의되지 않았다는 게 양형 이유였다. 법원은 박 전 참사관의 범행으로 공무원의 품위와 국가 이미지가 손상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와 원만한 합의가 이뤄졌고 피해 가족들이 용서를 한 점 등을 고려했다”며 형량을 2년6개월로 감형했다.

2016년에는 중동 지역에 주재하는 현직 대사가 대사관 직원을 성희롱한 혐의로 징계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문제의 대사가 현지 여직원을 성희롱했다는 민원이 외교부를 통해 접수됐고, 외교부는 민간 전문가 등에게 의뢰해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해당 대사는 감봉 3개월 처분을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에서 드러났다. 당시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잇단 외교관 성추문에 대해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송구스럽다”며 “과거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태국, 뉴질랜드 등지서도 외교관이 성 문제로 물의를 빚은 사건이 있었다. 2012년 태국 방콕 주재 한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이 현지서 한국인 여교수를 성추행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뉴질랜드에선 분관장이 해외에 다른 부처 공무원과 몸싸움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서 분관장은 성희롱 의혹도 받았다.

한국 외교관 성추문 사건에 있어 가장 큰 흑역사로 꼽히는 ‘상하이 스캔들’도 있다. 상하이 스캔들은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 외교관들이 중국 여성인 덩신밍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사건을 말한다. 

외교관 성추문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함께 수면 위로 올라오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상하이 스캔들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중국 여성과 외교관들의 부적절한 관계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2007년 대통령 선거 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비롯한 정치권 핵심 인사들의 연락처를 포함한 정부 자료가 유출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파문이 커졌다. 

중국 상하이 주재 한국 총영사관 영사들은 덩신밍에게 한국 비자를 부정 발급해주고, 한국비자 신청대리권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덩신밍이 스파이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정부는 합동조사단을 주 상하이 영사관에 파견해 조사를 벌였지만 해당 사건을 ‘심각한 수준의 공직기강 해이 사건’으로 마무리지었다. 당시 외교부는 상하이 스캔들 사건에 연루된 외교관 전원을 징계했다.

외교관의 성 비위 사건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외교부서 발생한 징계 중 절반은 성범죄 사건인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지난 4일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직원 징계 현황에 따르면 외교부서 발생한 12건의 징계 중 절반인 6건이 성희롱, 성폭력 등 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지난해 징계자 중에는 커피숍서 16차례나 여성을 몰래 촬영한 공무원이 포함됐다. 외교부 소속 김○○씨는 2015년 4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의 치마 속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등 지난해 8월까지 10여회 넘게 여성의 신체를 동의 없이 촬영한 혐의를 받았다.

재판서 김씨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울서부지법 형사23단독 남현 판사는 김씨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을 40시간 이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외에도 총영사로 재직하며 상습적으로 성희롱 발언을 일삼은 고위공무원도 징계를 받았다.

몰카 공무원
벌금형 받아

2016년에도 전체 17건의 징계 중 7건이 성 문제로 인한 징계였다. 이 의원은 “전 에티오피아 대사의 성폭력, 주 칠레 외교관의 미성년자 성추행 등은 주재국서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라며 “교육 등을 통한 사전예방에 최선을 다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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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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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