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장 입수> 국세청 ‘표적 사찰’ 의혹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10.10 10:48:37
  • 호수 11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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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직원에 고소당한 전 국세청장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임환수 전 국세청장이 송사에 휘말렸다. 고소인은 다름 아닌 부하 직원이다. 역대 최장수 임기를 마치고 명예롭게(?) 퇴직한 임 전 청장이 부하 직원에게 고소당한 까닭은 무엇일까.
 

현직 국세청 직원 김모씨가 임환수 전 국세청장을 직권남용죄로 지난 5월24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는 지난달 13일 고소인 조사를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세무서 납세보호실장인 김씨는 “임 전 청장이 재직 당시 길들이기 식으로 특정 세무서를 표적감사했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사건 당시
우병우 조사 주장

먼저 김씨는 왜 자신이 표적 감사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걸까. 김씨는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면서 국세청 내부 게시판에 사건과 연루된 핵심 관계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제안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박근혜정부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해 9월2일 김씨는 내부 게시판에 ‘우병우 수석 처가 탈세 혐의에 대한 세무조사 공개 제안’이라는 글을 썼다. 우 전 수석의 장인 이상달씨와 그의 자녀들이 상속세와 종합소득세 등을 탈루한 혐의를 인정할 만한 자료가 있기 때문에 김씨는 세무조사를 즉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9월5일부터 ‘대통령의 7시간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지록위마(指鹿爲馬)’ ‘지부상소(持斧上疏) ’ ‘광화문 집회 참여가 정치적 중립의무 위반이라고요?’ ‘군주민수(君舟民水)’ ‘대통령의 거짓말’ ‘갈 데까지 가보자’ ‘탄핵23456’ ‘국세청도 박근혜게이트서 자유롭지 않다’는 등 박근혜정부와 내부 비판에 관한 글을 아홉 차례에 걸쳐 썼다. 


이를 본 복수의 공무원 관계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김씨의 글이 윗사람에게는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입 모았다. 현직에서 근무 중인 한 공무원은 “공무원 조직은 정권 따라 바뀐다. 각 부처 장차관 임명권자는 사실상 대통령이기 때문이다”며 “저렇게 노골적으로 현 정부를 비판하는 건 직속 기관장 얼굴에 침 뱉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외에도 그동안 수많은 내부 비판성 글을 남기며 조직서 ‘문제아’로 찍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글을 쓴 이후 김씨는 내부 감사를 받게 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고소장에 따르면 김씨는 약 두 차례의 감사를 받았다. 
 

국세청은 지난 2월9일부터 14일까지 김씨를 상대로 분야별 업무매뉴얼 활용 실태를 감사했다. 업무매뉴얼 감사란 말 그대로 업무를 매뉴얼대로 집행했느냐를 살펴보는 것. 그런데 국세청은 일선 세무서로 서울지방국세청 산하 종로세무서와 광주지방국세청 광주세무서 두 곳만 감사했다.

현 직원 직권남용죄 혐의 임환수 고소
“재임 시절 내부 비판하자 보복” 주장

이에 대해 김씨는 고소장에 “지방 국세청은 6곳이다. 서울·중부·부산·대구·광주·대전이다”며 “일선 세무서 업무 매뉴얼 감사를 하려면 다른 지방 국세청들도 한 곳 씩 감사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고소장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3월14일부터 21일 납세자보호실분야 기획 감사도 받았다. 당시 감사 계획은 3월9일 통보돼 촉박하게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감사는 대전지방국세청에 설치된 감사장에서 진행됐다.


광주지방국세청 산하 14개 세무서가 감사 대상이었다. 당시 감사에서 요구한 자료는 ▲국세심사위원회 심의결과 ▲인용 사건 명세 ▲세무조사 중지 적정 여부 ▲각 민간위원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소속과 위촉기간 등이었다. 

김씨는 2015년 1월부터 2017년 1월까지 광주지방국세청 산하인 정읍세무서에서 납세자보호담당관으로 재직한 바 있다. 

때문에 김씨는 “국세청에서 본인을 표적 감사하기 위해 정읍세무서에 재직했던 자료가 필요했을 것이다”며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면 직접 현장에 나와 감사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국세청 내부 감사 결과 김씨와 관련된 비위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자성 목소리 냈다
2차례 감사 받아

일각에선 당시 감사가 급박하게 진행됐다고도 말한다. 일선 세무서는 정기 감사 때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 감사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예고하고 진행할 수 있었음에도 급박하게 감사를 진행했다는 점에서 김씨는 ‘표적 감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세청은 ‘표적감사는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누굴 표적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안 된다”며 “감사한 것은 맞으나 특정 감사는 아니고 표본 감사일뿐이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국세청 직원들이 해당 기사를 막기 위해 언론사를 찾아다녔다는 의혹도 있다. 전임 국세청장이 고소를 당했는데 왜 국세청 직원들이 나선 것일까. 이에 대해 국세청 관계자는 “이게 적극적으로 해명 자료를 낼 사항은 아니다. 국세청 신뢰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해당 언론사에 찾아가 해명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임 전 청장은 지난 6월28일 퇴임했다. 2014년 8월 취임한 임 전 청장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추경석 전 청장(1991년 12월∼1995년 12월)에 이어 두 번째 장수 청장이 됐다. 

그는 박근혜정부 두 번째 국세청장에 올라 국세 행정에 주력했다. 2015년과 2016년 정부가 세수 결손을 면하고 초과 세수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노력이 한몫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임 전 청장은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박근혜정부의 부역자라는 상반된 평가도 있다. 실제로 임 전 청장이 재직 때 박근혜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사들과 특정 기업에 대한 표적 세무조사를 벌인 의혹이 있다. 

전 정권 부역?
석연찮은 정황

국세청은 2015년 1월 통일교 관련 회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들어갔다. 통일교는 ‘청와대 청윤회 동향 문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세계일보>를 소유하고 있다. 통일교에 대한 세무조사는 애초 2013년 10월 시작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 기업 경기를 살린다는 정부 방침이 세무조사를 최소화한다는 방침이 정해지면서 세무조사가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국세청은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 이후 통일교를 다시 세무조사를 하며 ‘표적 조사’를 받았다.

이외에도 지난해 최순실 태블릿PC를 통해 비선실세 국정농단을 보도한 JTBC가 보도 직전 청와대로부터 세무조사 압박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국회에서 제기됐다. 추혜선 정의당 의원은 “청와대가 전방위로 JTBC 보도를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며 “JTBC 세무조사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서는 청와대 지시로 세무조사를 당했다는 증언이 잇달아 나왔다. 이현주 대원어드바이저리 대표의 경우 2014년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의 부탁을 받고 김영재 원장의 가족회사 해외 진출을 컨설팅 제안을 받고 일이 틀어지자 세무조사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감사 맞으나 특정 감사 아니다”
“우리는 표본 감사했을 뿐”

대원어드바이저리 측에 따르면 당시 세무조사를 받은 곳은 이 대표가 운영하는 헤드헌팅업체 D사와 이 대표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원어드바이저리, 이 대표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부동산업체 E사 등 3곳이다.

김 원장과 특허 분쟁을 벌이던 중소기업 대표 이모씨도 국세청으로부터 표적 수사를 당했다는 의혹이 있다. 김 원장 부인이 운영하는 와이제이콥스가 이씨를 상대로 2014년 특허청에 심판을 제기했다. 이후 이씨의 회사는 국세청 등 국가기관 네 곳에서 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승마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과정서 정씨의 판정 점수에 이의를 제기하던 선수의 아버지에게 대한승마협회 내 최씨의 측근이 세무조사를 거론하며 항의하지 못하게 했다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해당 선수의 아버지의 회사는 세무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장 개입 여부 
진상 밝혀지나 

이 모두가 임 전 청장이 재직했던 당시 일어났던 일이다. 어쩌면 김씨의 내부 비판이 국세청 고위간부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향후 국세청 적폐청산기구 격인 국세행정 개혁 태스포크의 진상조사에서 임 전 청장의 표적 세무조사 지시 여부가 드러날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정치적 세무조사 진상은?

국세청 적폐청산기구 격인 국세행정 개혁 태스크포스(TF)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촉발시킨 태광실업 세무조사의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국세행정 TF는 이명박·박근혜정부 시절 ‘정치적 세무조사’ 의혹이 짙은 10여건도 조사하고 있다. 연내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세행정 개혁 TF 산하 세무조사 개선 분과는 최근 첫 회의를 갖고 과거 정치적으로 논란이 된 세무조사에 대해 본격 점검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세무조사 개선 분과 외부위원들은 국세청으로부터 위촉장을 받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으며 최근 첫 회의를 개최한 것으로 전해졌다.

첫 회의에선 ‘정치적 세무조사’에 대한 대상 및 범위 등 핵심 사안을 논의했으며 개별 조사 사건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또 표적 논란이 없도록 기간과 대표적인 점검대상을 정하고, 필요할 경우 조사당사자나 참고인 조사도 병행할 것으로 전해졌다.

TF는 정치적 세무조사와 관련한 개별사건 점검을 완료하고 이를 토대로 정치적 중립성 제고를 위한 세무조사 개선 방안을 연말까지 마련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세청이 적폐청산 차원에서 과거 정치적 세무조사를 점검하겠다고 밝힌 이후 세정가에선 그 대상으로 태광실업, <세계일보>, 다음카카오, CJ E&M 등을 올려놓고 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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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