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④> 대목 기다린 사람들

“한 몫 잡자” 남들 놀 때 장사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정부가 10월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서 ‘10일간의 황금연휴’가 완성됐다. 역대 최장 기간이다. 휴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다. 이런 와중에 명절 대목에 가장 바쁜 사람들이 있다. 이번 연휴는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다.
 

서울 강서구에 사는 30대 주부 한모씨는 지난해 추석 당일 올해 추석에는 해외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연휴가 긴만큼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을 대비해 미리 예약을 해놓자는 말도 나왔다. 1년 전이었지만 예약은 벌써 꽤 차 있었다. 그만큼 올해 추석연휴를 기다린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항공권 다 팔려
장거리여행 늘어

사람들은 여름휴가보다 긴 연휴에 들떴다. 저마다 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하지만 첫 손에 꼽히는 건 단연 여행이다. 추석 연휴 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내국인이 13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이는 명절 기준으로 최대치다. 지난해 추석(47만명), 올해 설(50만명) 연휴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높다.

여행사들은 역대 최장 기간 연휴에 휴식도 잊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여행 전문업체 모두투어 관계자는 “이미 황금연휴 기간 항공권이나 여행상품은 대부분 판매됐다”면서도 “최근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선택폭이 넓어져 남아 있는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연휴가 길어진 만큼 중국, 일본, 동남아 지역 못지않게 유럽이나 미국 등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여행객도 많아졌다.

또 명절 연휴 때 고향에서 차례만 간단히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여행이나 나들이를 떠나는 D턴족의 증가로, 국내 여행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5월6일 금요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어린이날을 포함, 주말 등 4일의 연휴가 생겼다. 이때 고궁 입장객은 전년대비 70%, 전국 고속도로 통행량은 8.6%, 철도 탑승자 수는 8.5% 증가한 바 있다. 

해외 여행객의 증가로 발생할 내수 구멍을 국내 여행객들이 일정 부분 메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면세점 업계는 추석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다. 면세점 업계의 이번 추석 마케팅 타겟층은 내국인이다. 
 

그동안 10월1일 중국 국경절을 기점으로 중국인 관광객 잡기에 몰입했던 것과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사드로 인한 중국 정부의 경제 보복으로 중국인 관광객이 뚝 끊긴 점도 한 원인이지만 연휴 때 해외로 떠나는 국내 여행객이 급증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임시공휴일 지정 최장 10일 연휴
국내·외여행객수 100만명 넘을 듯


면세점 업계는 국내 고객을 대상으로 프로모션과 이벤트를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신라인터넷면세점의 경우 10월9일까지 자동차, 적립금 등을 지급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한다. 

롯데면세점은 오프라인 전점에서 1달러 이상 구매한 고객을 대상으로 휴가비 현금 지원 이벤트를 선보였다. 업계 관계자는 “상황이 어려운 만큼 10일간의 연휴는 단비와도 같다”며 “업체들은 다양한 프로모션을 준비해 분주하게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추석연휴 기간 국내 또는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방범 문제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명절 등 연휴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빈집털이범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에스원 범죄예방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4∼2016년) 추석 연휴 기간 일어난 침입범죄가 평소에 비해 21%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에스원은 긴 연휴동안 장기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아 침입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 때문에 명절 때만 되면 방범장치 매출이 폭등한다. 온라인에선 빈집털이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손쉽게 장착할 수 있는 방범용품과 CCTV, 금고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 G마켓에 따르면 지난달 14일부터 이달 13일까지 한달간 CCTV-IP 카메라 매출이 57% 늘어났다.

CCTV-IP 카메라는 어디서나 집 안 상황을 관찰할 수 있는 가정용 방범 카메라로, 외부에서도 스마트폰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집을 지켜볼 수 있다. 최근 어린아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에서 설치가 증가하는 추세였는데 추석이 가까워오면서 매출이 크게 늘었다.

방범장치 매출 증가는 매년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지난해에도 추석 연휴를 앞두고 방범장치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심지어 CCTV와 디자인만 동일할 뿐 실제 촬영은 되지 않는 가짜 CCTV 등 이색 방범용품도 큰 관심을 받았다. G마켓 관계자는 “긴 연휴에 대비해 가정용 방범 장치를 직접 구매하는 사람이 늘었다”며 “창문이나 베란다에 쉽게 설치하는 제품도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집 지키는 물건을 구매했지만 반려동물이 남았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이른바 펫팸족(Pet+Family)이 1000만명에 이르는 등 반려동물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 중이다. 유통업계는 펫팸족의 시선을 끌기 위해 앞 다퉈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반려동물 호텔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 국내,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반려동물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최근 반려동물 서비스업은 전년 동기 12%가 증가했다. 이 중 숙박·호텔업은 전체의 약 46%로 가장 많았다. 미용·화장업(32%), 장례·장의업 및 산책·돌보기업(각각 11%)보다 높은 수치다. 청주의 한 애견호텔은 명절을 열흘 정도 앞두고 있지만 예약률이 평균 50%를 넘었다.

침입범죄 기승
방범장치 불티


최근 반려동물 호텔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있는 게 펫시터다. 펫시터는 타인의 반려동물을 위탁 받아 일정 기간 돌봐주는 사람을 말한다. 많은 반려동물을 거의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반려동물 호텔보다 맞춤형으로 돌봐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또 호텔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다.

차가 없는 사람이 반려동물과 멀리 이동할 때 이용 가능한 펫미업 서비스가 각광을 받고 있다. SK플래닛 11번가에서 추석 연휴를 맞아 펫미업 택시 서비스 이용권을 정가 대비 50%에 제공하는 등 이색상품이 나올 정도. 

차에는 반려동물을 위한 안전벨트는 물론 배변패드 등이 갖춰져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신사업으로 떠올랐다.

반려동물과 함께 동반 여행을 떠나는 비율도 늘었다. 숙박O2O인 ‘여기어때’에 등록된 반려동물 동반 숙소는 지난해 7월 70여곳에서 올해 7월 210여곳으로 1년새 3배가량 증가했다. 반려동물 동반 호텔에서는 반려동물 베드 겸 쿠션, 식기, 물그릇, 배변판 등을 제공하고 있다. 

가평에 있는 한 펜션에는 온수풀이 구비된 애견수영장과 놀이터는 물론, 훈련 기구까지 마련돼 있어 펫팸족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벌초·차례 등 명절에 직접 챙겨야 했던 일을 대행해주는 서비스도 점차 확대 중이다. 가족의 규모가 줄고 일정이 바빠지면서 조상의 묘 관리를 대행업체에 맡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비전문가가 예초기를 들고 산소의 풀을 베다 큰 부상을 입거나 벌집을 건드려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늘면서 그 수요는 더 많아지고 있다. 또 예초기를 빌려 벌초를 하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한 점도 대행서비스가 각광을 받는 이유다.


벌초에 상차림
대행서비스 인기

농협중앙회에 따르면 농협의 벌초 대행 서비스인 ‘산소 관리 서비스’의 지난해 이용건수는 1만8308기로 전년대비 39%가 늘었다. 전국 300여개 지역 농협과 산림조합은 물론 사설 대행업체도 500곳에 이른다. 

농협의 경우 이용료가 1기당 6만∼10만원이지만 분묘가 있는 지역이나 위치·거리·봉분 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조상의 묘 관리는 업체에 맡기는 것을 두고 부정적인 시선이 있긴 하지만 이용자들의 전체적인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차례 상차림 대행업체도 예약이 폭주 중이다. 편리성과 경제성을 중시하는 소비자가 늘면서 이용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차례상에 올라가는 모든 음식을 직접 조리해 배달해 주기 때문에 이용자들은 차리기만 하면 된다. 
 

지난해 기준 차례상 대행서비스의 가격은 20만원 초반대로 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추정한 4인 가족 기준 명절 차례상 준비 비용(24만∼33만원)과 비교해도 저렴한 편이라 앞으로도 수요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성형외과·극장 물만나
‘혼추족’ 잡으려 마케팅

명절 대행 서비스가 증가하면서 고수익 단기 아르바이트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추석 장을 보는 주부들을 겨냥한 제수용품 판매와 상차림 음식을 시연하는 등의 초단기 실속 아르바이트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것. 

추석선물 판촉·배달·상하차 업무에 사람을 구한다는 게시물은 온라인 카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짧고 굵게 벌어보자’는 생각으로 명절 기간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경쟁도 심화되고 있다. 경기불황 속 용돈을 마련하려는 대학생·취준생뿐 아니라 귀향하지 않는 직장인에 주부까지 가세했기 때문. 명절 단기 아르바이트는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높은 데다 임금도 즉시 받을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전국 아르바이트생 164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를 희망하는 이유는 ‘평소보다 시급이 높아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40.7%)였다. 

하루 8시간 노동을 최저시급인 6470원으로 계산하면 5만1760원이지만 명절 기간 마트 단기 근무를 하면 최저 5만5000원서 10만원이 넘는 일급을 받을 수 있다.

추석연휴 동안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향집에도 내려가지 않고 혼자 있길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이른바 혼추족(혼자 추석을 보내는 사람)이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세태라고 볼 수 있다. 

1인 가구는 자신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 업계에선 이들을 잡기 위한 다양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당장 혼추족의 증가로 호텔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혼자 호텔에 묵으면서 서비스를 이용하는 ‘호캉스(호텔+바캉스의 합성어)’족이 늘었기 때문이다. 

호텔업계에선 혼추족을 겨냥한 패키지 구성에 나섰다. 그랜드힐튼 서울호텔은 1인 북맥(책과 맥주의 합성어) 패키지를 선보였는데 예약이 폭증 중이라고 밝혔다.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에서도 1인 예약 손님을 위한 싱글즈 패키지를 내놨다.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스파 서비스와 칵테일 등을 제공한다.

유통업계도 혼추족의 증가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 백화점에서는 혼추족을 위한 1인 명절음식 세트를 내놓은 것은 물론 소포장 셀프 선물세트도 등장했다. AK플라자에서는 ‘명절음식 DIY 선물세트’를 출시했다. 삼색나물, 동태전과 쇠고기 완자전 등 제수용 전, 송편과 같은 명절음식 중 원하는 상품을 골라 세트로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편의점 업계도 혼추족의 증가로 도시락 매출이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한 대형 편의점 업체의 추석 연휴 기간 도시락 매출은 무려 580%나 급증했다. 추석 대목을 노리는 편의점 업계는 혼추족의 입맛을 잡기 위해 제품 늘리기에 나섰다.

추석 대목을 맞이한 곳으론 성형외과도 빼놓을 수 없다. 연휴 기간을 이용해 간단한 성형수술·안과수술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성형외과는 이들을 위해 연휴 기간에도 진료를 하는 등 본격적인 ‘대목 맞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최장 10일을 쉴 수 있기 때문에 연휴 첫날 수술을 받고 남은 기간 푹 쉬면 바로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 있다. 강남의 유명 성형외과들은 연휴 동안 정상 진료는 물론 야간 진료까지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극장가 역시 추석 성수기를 대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추석 연휴는 영화 산업 최대의 대목이다. 가족, 연인 단위 고객은 물론 1인 고객들도 긴 연휴 기간 극장가를 찾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로는 조선 인조14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남한산성>이 선봉에 선다.

1인 가구 잡아라
셀프 선물세트도

<광해, 왕이 된 남자> <관상> <사도> 등 추석 연휴 흥행 영화의 계보를 잇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외화로는 최근 주연배우가 내한한 <킹스맨: 골든서클>이 있다. 1편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된 속편으로 극장가를 노리고 있다. 영화계는 굵직한 국내외 영화간 대결로 추석 관객몰이를 기대 중이다.
 

<jsjang@ilyosisa.co.kr>

 

<기사속기사> 추석 연휴 ‘스미싱’ 주의보
‘아차’ 순간 다 빠져나간다

여행사, 유통업계뿐 아니라 인터넷 사기꾼들도 추석 연휴를 대목으로 잡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피싱 사기 수법인 스미싱 주의보가 내렸다. 명절을 맞아 선물세트를 주문하거나 항공권을 예매한 사람들을 노린 범죄다.

‘OO통운인데 OOO고객님이 주문한 선물세트의 배송지가 불확실해 정정을 부탁한다’는 내용과 인터넷 주소가 섞인 문자메시지를 발송하는 식이다.

아무 인터넷 주소 클릭 금지
선물 주문자 노린 범죄 늘어

실제 선물세트를 주문해놓은 고객이 무심코 인터넷 주소를 누르면 그 순간 숨겨진 악성코드가 작동해 저장된 지인들의 연락처나 사진, 금융거래에 사용되는 공인인증서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빼앗기게 된다.

‘추석맞이 상품권·숙박권·항공권 떨이’ 등의 문자에 속아 돈을 실제로 입금하면 다시 되돌려 받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지난 추석의 경우 연휴 전후로 2주간 212건의 피해가 접수돼, 한 해 평균보다 16%나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은 “출처가 불분명한 문자메시지 인터넷 주소는 절대 누르지 말고 휴대전화 소액결제 기능을 사전에 차단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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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