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사건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재벌그룹 총수들의 잔혹사엔 특별한 패턴이 있다. 일단 구속 후 이런저런 비슷한 과정을 거쳐 결국 풀려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 휠체어는 꼭 등장한다. 무사귀환을 위한 일종의 필수 퍼포먼스다. 물론 혐의 내용과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법정을 거쳐 간 총수들의 귀환 사례는 거의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첫 공판에 ‘휠체어 출석’
‘왕상무’모친 이선애씨도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
법정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재벌그룹 총수들은 꼭 중간에 풀려난다. 끝까지 옥고를 치른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 국내 내로라하는 대기업 오너일수록 그렇다.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러도 보통 ‘구속→건강 이상→구속집행정지→입원→보석→사면’등의 순으로 자유의 몸이 된다.
사건 마무리되면
‘내가 언제’멀쩡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거나 법정에 선 총수들이 자주 꺼내드는 카드가 바로 ‘아픈 척’이다. 동정심 유발로 곤란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묘책이다. 다리에 힘을 풀고 동공을 흐린 표정은 기본. 헝클어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채로 휠체어에 앉아 마스크를 쓰고 링거 주사를 꽂기도 한다.
실제로 아픈 몸을 이끌고 이동해야 한다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안이 마무리되는 시점엔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닌다는 점에서 동정 여론을 미리 계산했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아프고 안 아프고를 떠나 휠체어 탄 총수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총수들은 죄를 지으면 사법부의 관대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휠체어 퍼포먼스를 벌이는데, 그 속이 훤히 보이는 촌극임에도 불구하고 모두 적중해 자유의 몸이 된다”며 “기업인에 대한 무차별적 봐주기는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당연시되는 세태를 재확인시켜 대다수 국민에게 좌절감을 주는 한편 기업인들의 불법행위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휠체어 퍼포먼스’의 원조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정계와 관계, 금융계 등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엮었던 1997년 한보 비리 사태가 터졌을 때 마스크 차림에 휠체어를 타고 청문회장과 공판장에 나타났다. 고령에 지병까지 겹쳤다는 사유를 갖다 붙였다.
정 전 회장은 매번 법정에 설 때마다 초췌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한때 재계를 주름 잡던 재벌 총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당뇨와 고혈압, 심장질환 등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다.
변호인 측은 “정 전 회장의 혈당치가 355∼400㎎/㎗까지, 혈압은 170∼200㎜Hg까지 올랐다”며 “또 당뇨로 눈과 심장에도 이상 증세가 생겼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병이 악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전 회장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사례비를 주고 허위 소견서를 부탁한 사실이 드러났다. 원래 소견서에 없던 내용을 추가하거나 병세를 과장한 것. 그는 1999년 8월과 2002년 6월 주치의 이모씨에게 형집행정지를 받기 위해 사례비 명목으로 5000만원을 주고 고혈압, 협심증 등의 소견서를 부탁한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결국 1997년 1월 구속된 정 전 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출소 이후엔 운동까지 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항간엔 재기설까지 돌았다. 그러나 정 전 회장은 교비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2007년 5월 신병 치료를 위해 해외로 출국한 뒤 행방이 묘연하다.
정 전 회장의 뒤를 이어 휠체어에 앉는 총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1999년 10월 대우그룹 워크아웃 책임을 피하기 위해 도피성 출국을 한 김 전 회장은 2005년 6월 귀국해 분식회계, 횡령, 자산 국외 도피, 사기대출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그는 2개월 뒤 건강악화 이유로 구속집행정지처분을 받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심장수술과 담석제거수술을 받았다.
동정 유발 묘책으로 활용 마스크에 링거 주사 필수
원조는 한보 정태수…풀려나자 잘 걸어다녀
김 전 회장은 2006년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2대의 링거를 왼손에 꽂은 채 환자용 들것에 실려 법정에 나타났다. 줄곧 입원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2006년 11월 징역 8년6월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다. 김 전 회장은 징역형에 대해 사면을 받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두 발로 잘 걸어 다닌다. 김 전 회장은 최근까지 ‘대우인’행사 등에 참석해 건재를 과시했다.
앞서 2005년 6월엔 김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가 휠체어에 탄 채 인천공항 입·출국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 전 회장과 동반 귀국하기 위한 출국이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었다. 이후 입국한 김 전 회장 역시 휠체어나 침대를 이용해 입국하려 했으나 여론 악화를 의식해 계획을 철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형집행정지 받고
곧바로 병원행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휠체어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삼성 X파일’과 ‘에버랜드 편법 증여’사건으로 한창 시끄럽던 2005년 9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했던 이 회장은 이듬해 2월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입국했다. 다리에 깁스를 하고 허리엔 복대를 둘렀다.
일본에서 건강관리를 위해 산책하던 중 미끄러져 오른쪽 발목의 인대가 늘어났다는 게 그 이유였다. 당시 삼성 측은 “이 회장은 당분간 자택에서 요양할 계획으로 가급적 외부 출입을 자제, 대내외 행사에도 참석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일각에선 동정 여론을 일으켜 책임을 덜어보자는 계산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 회장은 두 사건 때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지만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안기부 불법도청 사건 당시 이 회장은 서면조사만 받은 채 불기소 처리됐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 때도 검찰은 이 회장 소환을 검토했으나 33명의 피고발인 중 이 회장만 조사를 면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출두한 바 있다.
2006년 4월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된 정 회장은 그해 6월 보석 결정으로 석방된 뒤 곧바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열린 첫 공판에서 흰색 환자복에 한쪽 팔에 링거를 꽂은 채 휠체어에 실려 법정에 출석했다.
변호인 측은 “정 회장이 협심증과 관상동맥경화협착증, 고혈압과 함께 심장막에 물이 고여 있고 좌측 폐에 혹이 있는 것으로 진단받았다”며 “심하면 돌연사 가능성까지 있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2008년 6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8월 광복절 특별사면 당시 면죄부를 받았다.
2007년 5월 ‘보복 폭행’사건으로 구속된 김 회장은 같은해 7월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곧바로 심한 우울증과 충동조절 장애 등이 있다고 주장해 구속집행정지가 떨어졌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던 김 회장은 2개월 뒤 열린 2심 선고 재판장에 환자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병원 응급차를 이용, 법원에 도착했으며 휠체어를 탄 채 법정에 들어섰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상태였다.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도 전혀 손질을 하지 않았다. 법원은 김 회장에게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김 회장은 정 회장과 함께 2008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됐다.
MB정부 들어 최대 스캔들 메이커 박연차-천신일-곽영욱 ‘3인방’도 낯설지 않은 광경을 연출했다. 이들은 모두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08년 12월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2009년 11월 병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계속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섰다. 지난해 1월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박 회장은 최근 나무지팡이를 짚고 의사들의 부축을 받아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구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지난달 16일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들어섰다. 그전에도 고혈압 증세 등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재판을 받아왔다. 지난해 12월 구속된 천 회장은 이날 임천공업 이수우 대표(구속기소)로부터 워크아웃 조기 종료 등 청탁과 함께 46억여원 상당의 금품을 불법수수한 혐의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천 회장은 건강 악화 등의 사유로 지난 1월 보석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도 휠체어를 탄 채 법원을 드나들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에게 인사청탁과 함께 5만 달러를 준 혐의로 기소된 곽 전 사장은 손에 링거액 바늘을 꽂고 마스크를 낀 채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서고 있다. 변호인 측은 “(곽 전 사장이) 말도 잘 안 들릴 정도로 매우 건강이 안 좋다”고 전했다.
최근엔 태광그룹 오너 모자가 나란히 휠체어를 타고 법원에 출석해 시선을 모았다. 지난달 22일 140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태광그룹 전·현직 고위 간부들의 첫 공판이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구급차를 이용해 법원에 도착한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은 환자복 차림으로 이동식 침대에서 휠체어로 갈아타고 재판장에 들어갔다. 지난 4월 간암수술을 받고 구속집행이 정지돼 서울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이 회장은 헝클어진 머리에 면도도 하지 않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이 회장은 링거 주사를 팔에 꽂은 채 피고인석에 앉았다.
헝클어진 머리
덥수룩한 수염
이 회장의 어머니인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는 이보다 먼저 승용차를 타고와 역시 휠체어에 올라 법원 안으로 향했다. 이 전 상무는 지난 1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을 당시에도 구급차 환자 이송용 침대에 누운 채 검찰청사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점퍼에 달린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 전체를 가려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