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5주년 특별대담> 윤석헌 아태경제문화연구회 회장

“한·중은 위기의 부부…특사보다 밀사 보내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한중관계의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사드를 둘러싼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서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졌다. 1992년 수교 이래 최악의 한중관계를 풀 묘수가 필요한 시기다. <일요시사>는 ‘한중수교의 산증인’ 윤석헌 아태경제문화연구회 회장을 만나 그 해법을 들어봤다.
 

오는 24일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25주년 되는 날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THAAD)를 둘러싼 갈등은 한국과 중국이 기념행사를 각각 따로 여는 형태로 분출됐다. 

2012년 20주년 행사에 당시 부주석이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장차관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양국 정부는 각국 행사에 관계자를 참석시키는 등 최대한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반쪽 행사’라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중 갈등의 불씨는 단연 사드 문제다. 2014년 6월 커티스 스캐퍼로티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이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포럼 조찬 강연에서 “한국에 사드 전개를 요청했다”고 밝히면서 시작됐다. 

한국의 사드 배치 움직임을 감지한 중국이 수차례 우려를 표명하면서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해 7월8일 사드 배치가 공식화되면서 한중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최고의 중국통’이라 불릴 만큼 중국 정세에 밝은 윤석헌 아태문화경제연구회 회장은 최근 한중관계를 두고 “위기의 부부”라고 칭했다. 


1992년 수교를 맺기 전부터 한국과 중국을 누비며 민간외교관 신분으로 양국 관계를 물밑에서 조율해 온 윤 회장은 현 상황을 한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입장서 다각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윤 회장과의 일문일답.

-올해로 한중수교 25주년입니다. 현재 한중관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국가 간의 관계는 결혼 생활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20년 넘게 무탈하게 살다가 최근 위기를 맞은 부부죠.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백년해로 하는 것이고 대화가 잘 안되면 결혼 생활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 불행한 상태에 접어드는 거죠.
 

-위기의 원인은 사드입니다. 중국은 왜 이렇게 사드에 민감한가요?

▲한국과 미국은 사드를 통해 북한의 핵 도발을 막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그 말을 믿지 않아요. 북한의 핵 공격 억제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미국이 중국 견제 용도로 사드를 활용할 거라고 보고 있죠.

수교행사 따로…현 상황 반영
사드 두고 미·중 ‘대리전쟁

-이 상황서 문재인 대통령은 사드 4기를 추가 배치하겠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드 추가 배치 결정은 자위권 차원서, 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내려야 할 결정입니다. 단호한 결정이었고 시의 적절했다고 봐요. 하지만 결정 이후 나온 뒷말은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결정 이후의 뒷말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에서 사드 배치는 국가적 중대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업 기준에 따라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는 건 너무 안일한 위기 대처 방식이에요.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현 상황을 국가위기 상황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문재인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재난 지역은 일반 지역과 예산 집행 방식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처럼 국가재난 상황으로 가정하고 정부·여야·진보·보수할 것 없이 초당적, 거국적으로 사드 문제를 다뤄야 해요. 국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명확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외교 무대서 한국의 대응은 어떻습니까?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사드 추가 배치에 중국이 반발하자 ‘방어 차원’이라고 답한 바 있습니다.

▲적절한 대응이었습니다. 사드가 방어 차원의 자위권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주권국가의 외교부장관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오히려 더 강하게 말했어도 괜찮았다고 봅니다.

-중국은 북한 미사일 문제보다 한국의 사드 배치에 더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중국 역시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자국의 입장서 사드 배치를 두고 항의할 수 있습니다. 양국 모두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권리가 있어요. 국가 간에 중대한 현안을 두고 갈등을 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전 정권인 박근혜정부서 중국과의 대화가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박근혜정부의 대응이 아쉬웠다는 말씀이시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은 밀월관계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때가 있었죠. 그때 외교적으로 사드 문제가 잘 해결됐으면 관계가 지금만큼 악화되진 않았을 겁니다. 문재인정부가 그 짐을 한 아름 떠안은 셈이 됐어요. 또 국정 농단 사태가 일어나면서 외교시스템이 아예 정지된 것도 현 정부로선 상당히 부담이었을 겁니다.

-어려운 상황서 정권이 출범한 지 100일이 됐습니다. 현 정부의 대중외교 전략을 평가해 주신다면?


▲정상적으로 정권을 승계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딱 잘라서 평가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취임하자마자 4대 강국(미·중·일·러)에 특사를 보내는 등 발 빠르게 외교 관계를 복원한 건 매우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은 없으십니까?

▲저는 특사보다는 밀사가 필요다고 보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그 방법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현재 중요한 건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대화의 물꼬를 트는 일입니다. 정치권의 공개적인 특사보다는 중국 정부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진 밀사를 파견해 한국의 입장을 진정성 있게 전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죠.

-특사보다 밀사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특사로 갔지만 중국 정부는 눈에 보이는 외교적 홀대를 했습니다. 중국이 한국 정부에 보내는 시그널이라고 봐도 되죠. 중국은 한국 정부와 사드에 대한 대화를 계속 거부하는 중입니다. 이럴 땐 카메라 앞에서 웃으며 악수를 하는 것보단 비공개적으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밀사 파견이 사드 문제 해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거라 보십니까?


▲사실 사드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사드의 본질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은 미중 양국의 힘겨루기 싸움의 중간에 있습니다. 구한말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던 대한제국처럼요.

-사드 문제에 있어서도 ‘코리안 패싱’이 진행 중인 건가요?

▲6·25전쟁 때처럼 한반도서 미중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거죠. 물론 그때와 한국의 위상을 비교할 순 없지만 세계정세는 비슷하다고 봅니다.

"경제보복은 미국이 나서야"
"문재인정부 위기를 기회로"

-그래서 중국의 경제보복에도 속수무책인 건가요?

▲중국의 경제 보복 문제는 한국의 입장보다는 한미동맹 차원서 미국이 나서야 합니다. 한국 정부는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게다가 한국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돼있다고 할 정도로 대중무역 의존도가 높습니다. 이 같은 이유로 미국이 중국과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중국과의 냉각기가 장기화되면 한국이 입는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요?

▲롯데그룹을 보세요. 중국 시장이 막히면서 큰 피해를 봤죠. 자동차, 제조, 전자 심지어는 김치, 콩, 두부, 고사리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중국산이 안 들어온 데가 없어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드 문제의 궁극적인 해법은 무엇인가요.

▲시기가 문제일 뿐 사드는 한반도에 배치됩니다. 최종적으로 사드 배치가 완료되면 중국은 더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것이고 양국 관계는 지금보다 최악으로 치달을 겁니다. 서로 ‘강대강’으로 치받고 있는 상황서 미국과 중국의 빅딜, 말 그대로 극적인 타결이 결국 해결점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중국 간의 빅딜을 언급하셨는데요.

▲빅딜이라는 건 서로 한 발씩만 양보하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좋다, 사드로 절대 너희를 탐지하지 않을게, 믿어줘’라고 했을 경우 중국이 ‘그래, 믿을게. 대신 너희들도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공격하지 않겠다는 평화 조약을 체결해줘’라는 일련의 예상 가능한 조건들을 제시해 합의를 한다면 이게 바로 빅딜이자 극적인 타결이지요.

-미국과 중국은 북한을 두고도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한반도 비핵화’라는 총론에는 동의하고 있어요. 다만 북한을 제재하는 각론서 의견 차이를 보이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번 유엔 안보리 회의서 새 대북제재안에 찬성한 건가요?

▲중국은 국제사회서 이미 미국과 함께 세계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요.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두고 미국의 의도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걸로 보입니다. 다만 북한이 붕괴되면 중국이 너무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에 원유 수출 금지에는 반대하는 등 온도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 붕괴가 중국에 미치는 영향이 뭔가요?

▲전쟁이 발생해 만약 북한이 무너진다면 중국은 당장 미국과 국경을 맞대야 합니다. 또 북한 난민 수백만 명이 대륙으로 들어가는 문제도 있죠. 중국 입장서 생각해보면 현재 태도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도 북한이 좋아서 보호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국익을 위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중국은 통일한국을 바라지 않겠네요.

▲중국뿐 아니라 미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 모두 통일한국보다는 현상 유지가 나쁘지 않을 겁니다. 통일의 견인차보다는 방임자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현 상태 유지가 자신들의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사드나 대북 문제에 한국 정부가 끼어들 자리가 없네요?

▲미국은 한국의 건국을 함께한 옛 친구이고, 중국은 21세기 새로운 동반자이자 새 친구입니다. 한국으로선 옛 친구와 새 친구에게 마땅한 도리를 다하고 저자세도 고자세도 아닌 정자세로 작금의 폭풍 속을 헤쳐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이 취해야 할 정자세는 무엇입니까?

▲한국은 주권국가예요. 할 말이 있을 땐 당당하게 요구하고 협상 자리서 비굴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문재인 대통령이 하는 방식, 즉 할 말은 하는 게 좋다고 봅니다. 한국의 국가위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또 미중 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새 친구를 위해 옛 친구를 버릴 수 없고, 옛 친구를 위해 새 친구를 사귀지 않을 수 없다는 자세로 새 시대에 걸맞은 외교를 추구해야 합니다.
 

-경제 분야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대중 수출 의존도를 줄여야 합니다. 수치상으로 한국의 대중 의존도는 26%에 달해요.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개인무역이나 보따리상 같은 거래를 가상하면 실제로는 더 높을 겁니다. 한 나라와의 거래량이 전체의 30% 가까이 이른다는 건 양쪽 나라에 모두 부담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다변화가 필요합니다.

-어떤 나라를 눈여겨보고 있으신지요.

▲우선 그동안 닫혀있던 중동의 이란 시장을 전략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이 1970∼80년대 누렸던 중동 특수를 한 번 더 경험할 수 있는 시기예요. 중국의 대안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베트남, 인도도 새로운 시장으로 이미 세계 앞에 다가와 있어요. 세계 시장은 국제 각축장입니다. 다른 국가에 기회를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합니다.

-문재인정부의 대중외교에 있어 조언하실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위기는 돌이켜보면 기회입니다. 이 위기를 문재인정부가 잘 극복해 기회로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사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한다면 양국은 21세기의 새로운 동반자적 관계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총리를 2번이나 역임하고 외무장관을 3번 역임한 파머스턴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으며 단지 영원한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할 때입니다.
 

<jsjang@ilyosisa.co.kr>

 

[윤석헌 회장은?]

윤석헌 회장은 현재 아세아-태평양 경제문화연구회와 한·이란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인 최초로 중국 국제상회(한국의 전경련 격) 고문에 임명됐고, 중국 국영회사이자 중국 최대 건축회사인 중국건축의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 내 가장 정통한 중국통’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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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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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